[공감토크] 데뷔 40주년 원조 꽃미남 가수 윤수일

[공감토크] 데뷔 40주년 원조 꽃미남 가수 윤수일

2016.03.11. 오후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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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수일, 가수

[앵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노래방에서 이 노래 한 번쯤은 불러보셨을 것 같습니다.

국민가요라고 할 수 있겠죠. 아파트의 주인공 윤수일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올해가 뜻깊은 해가 될 것 같은데요. 데뷔 40년이 되시죠?

[인터뷰]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40년이 흘렀습니다.

[앵커]
이번에 40주년 맞아서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떤 공연인가요?

[인터뷰]
40주년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전국투어를 4월달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여러분들에게 참 과분한 그런 사랑을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제가 무대에서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그 빚을 갚는다고 생각을 하면서 준비를 착실히 지금 현재 하고 있습니다.

[앵커]
윤수일 선생님이라고 하면 어르신들께서는 세월을 같이 건너온 추억의 가수일 테고요. 그리고 저희 젊은 세대에게는 아파트의 주인공. 꽃미남 가수로 기억되고 있는데요. 오늘 구하기 힘든 LP 몇 장을 직접 갖고 나오셔서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앨범이 데뷔앨범인 건가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윤수일과 솜사탕이라는.

[앵커]
여기에서 선생님이 제일 끝에 계신 거죠?

[인터뷰]
네.

[앵커]
지금 하고 헤어스타일이 많이 다르시네요.

[인터뷰]
아무래도 20대 완전 초반이니까요.

[앵커]
그다음 사진을 보면 많은 분들이 또 추억에 잠기실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사진인데요.

[인터뷰]
이건 88년도에 나온 앨범인데요. 황홀한 고백이라는 곡이 실려 있는 앨범입니다.

[앵커]
저는 개인적으로 이 LP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요. 영화배우 같습니다.

[인터뷰]
사진 찍을 때 연출을 참 잘했던 그런 사진 중의 하나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이 곡은 현재 아파트가 주머릿곡인 그런 앨범이 되겠습니다.
[앵커]
히트곡만 모아놓은 앨범이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윤수일 선생님 하면 아무래도 아파트, 국민가요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아파트라는 노래가 그 시대상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떤 사회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인터뷰]
아파트 붐이 막 시작하려는 그러한 시점에서 제가 그 곡을 만들고 발표를 했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되돌아보면 그 당시 서민 여러분들, 대다수의 우리 국민 여러분들이 아파트에 살고 싶어하는 그런 어떤 동경의 대상물이었어요. 저는 거기까지 깊이 이렇게 생각하고 곡을 만든 건 아닙니다. 제가 단순히 지나가다가 잠실벌의 갈대밭을 지나서 드문드문 있는 아파트들을 보면서 착상을 떠올려서 만든 곡이기 때문에 깊은 생각은 없었습니다마는.

[앵커]
좀 외로움을 느끼면서 쓰셨습니까?

[인터뷰]
아무래도 그렇죠. 그 내용 자체가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이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떠난 그 애환을 노래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아파트붐과 저의 발표하는 시기가 맞아떨어져서 여러분들의 큰 관심을 이렇게 받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앵커]
저희가 보통 흥겹게 부르는 노래지만 외로움이 배어 있는 노래였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선생님의 히트곡 하면 아파트 또 황홀한 고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 큰 인기를 모았던 응답하라 1988에서 이 노래가 나와서 다시 한 번 히트를 쳤습니다. 라미란 씨가 그 노래를 부르면서 댄스를 췄는데 그 장면 먼저 함께 보시죠. 라미란 씨의 황홀한 고백, 몇 점 주시겠습니까?

[인터뷰]
무반주로 저렇게 액션까지 취하면서 하신다는 건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점수 많이 드리고 싶네요.

[앵커]
선생님도 그 당시에 황홀한 고백 부르실 때 화려한 댄스를 보여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라미란 씨와 비교해본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인터뷰]
저는 군무라고 해서 여러 명이 한꺼번에 서서 목꺾기 춤도 개발을 했고 그걸 시도했는데 저분은 혼자서 연출을 하시는데 중요한 포인트, 그걸 제대로 표현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참 내심 놀랐습니다.

[앵커]
윤수일 선생님을 추억하는 분들을 위해서 윤수일 선생님의 버전으로 잠깐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인터뷰]
무대가 아니라서 조금 그렇지만 한번...

[앵커]
저희가 기타를 준비했습니다.

[인터뷰]
준비를 해 보겠습니다.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인터뷰]
여기는 스테이지가 아니니까 이해하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통기타 버전의 황홀한 고백, 또 황홀한 노래였던 것 같은데요. 너무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추억 중에서 아무래도 가장 각별한 건 어머니가 아닐까 싶은데요. 어머니 하면 어떤 의미일까요, 선생님께?

[인터뷰]
우선 어머니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부터 저는 가슴이 뭉클하죠. 최근에 굉장히 히트한 영화 국제시장인가요. 그 영화를 보면 흥남부두에 눈 내리는 그 군함 위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속에 저희 어머니가 타고 내려오셨어요. 그것도 혈혈단신이죠.

그래서 어렵사리 남쪽지방에 정착을 하면서 저를 홀로 키우셨는데 그러한 여러 가지 상황들이 저에게는 어떻게 보면 어머니가 정말 신 같은 존재이고 혼자서 여러 가지 열악한 상황을 헤쳐나가면서 나름대로 비뚤어지지 않도록 이렇게 키우신 것에 대해서 지금도 저는 너무나 감사드리고 그리고 한 가지 또 아쉬운 점은 효도를 제대로 못했다. 하고 싶어도 못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제가 1977년도에 노래를 발표를 하고 가수로 데뷔를 하게 되는데. 그래서 제게 많은 관심을 주셨잖아요. 사랑만은 않겠어요라는 노래로. 그래서 뭔가 시간적으로나 또 경제적으로나 어머니께 효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어머니가 암투병에 들어가셨어요.

그래서 시한부 삶을 사시고 이런 가운데에서 제가 효도할 수 있는, 간병을 하는 걸로 제가 효도를 대신했던 그런 저 나름대로의 슬픈 추억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앵커]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다문화가정 1세대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어린 시절을 떠올리시면 아픈 추억도 많으실 것 같아요.

[인터뷰]
그 당시 제가 자라날 때는 다문화라는 단어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변 환경이 소위 손가락질을 하고 소위 편견을 가지고 모든 학업이라든가 또는 직장 이런 데 제약을 받는 그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열악한 그런 환경이었죠. 거기서 저도 저지만 어머니께서 마음고생이 더더욱 많으셨던 것으로 이렇게 기억이 있습니다.

[앵커]
아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상당히 강하셨을 것 같은데요. 다문화라는 말조차 없었던 그때 자라시면서 그렇게 가슴안에 뭉쳤던 그 아픔이 선생님의 음악인생에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됐을까요?

[인터뷰]
그래서 제 가슴속에는 저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게 더 필요했죠. 그 탈출구가 바로 저는 음악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음악에 심취를 했고 일찌감치 친구들과 규합해서 밴드생활도 했고요. 그래서 아마 제가 세상을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음악이 저의 삶에 대한 치유를 했다, 저는 이렇게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앵커]
선생님의 그런 음악인생을 가장 가까이에서 열렬히 응원했던 분이 어머니이실 텐데요. 어머니라고 하면 어떤 추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세요?

[인터뷰]
어머니가 막 생을 마감하시는 그런 순간에 제가 병실에서 노래를 한 곡 불러드렸어요.

[앵커]
어떤 노래를 불러드리셨나요?

[인터뷰]
제 데뷔곡입니다마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즈음에는 눈도 잘 안 보이시고 귀도 잘 안 들리시는 그런 합병증세가 있으셔서 제가 귀에다 속삭이면서 마지막 노래를 불러드렸던 그리고 눈을 감으시던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앵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을 떠나신 건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조심스런 질문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마음은 지금은 어떠신가요? 한 번도 얼굴을 못 보신 거죠, 친아버지는요?

[인터뷰]
제가 태어나자마자 본국으로 소환돼서 가버리신 그런 비극이 있었죠. 그 이후로는 소식도 단절되고요. 여러 가지 부분에서 물론 제가 찾으려고 노력했으면 어떻게 보면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 역시 이 한국에서 제 삶을 이룩해야 한다는 어떤 강박감 때문에 그렇게 정이 없는 분을 제가 구태여 찾으려고 이렇게 노력 안 했던 그런 세월이 있었습니다.

[앵커]
지금은 그리움으로 남아 계실까요, 아버지라는 존재가요?

[인터뷰]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저를 만들어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지금도 사실은 가지고 있죠.

[앵커]
오늘 선생님을 뵙고 말씀을 들어보니까 선생님의 음악인생 40년을 한마디로 하자면 희망을 노래하다, 이렇게 얘기를 붙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데뷔했을 때 곡이 사랑만은 않겠어요. 그 노래를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들려드리신 거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선생님의 음악인생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머니께 들려드리는 마음으로 오늘 인터뷰 끝곡으로 그 노래를 청해서 들어도 될지 모르겠네요. 선생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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