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오빠들'이 떴다...쎄시봉 친구들

'전설의 오빠들'이 떴다...쎄시봉 친구들

2015.04.08. 오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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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이 노래 아세요?

[앵커]
당연히 알죠. 트윈폴리오의 노래잖아요.

[앵커]
어떻게 아십니까?

[앵커]
제가 워낙 쎄시봉을 좋아하기도 했고요. 영화를 재미있게 봤거든요.

[앵커]
최근에 개봉된 영화가 있죠. 그래서 요즘에는 젊은 팬층이 많이 생겼을 것 같습니다. 쎄시봉. 오늘 쎄시봉의 주인공들을 저희들이 모셨습니다.

전설이 된 쎄시봉의 세 남자를 모셨습니다. 가수 윤형주 씨, 김세환 씨 그리고 방송인 이상벽 씨가 함께 합니다. 어서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반갑습니다.

[인터뷰]
반갑습니다.

[앵커]
진짜 어렸을 때부터 TV에서 뵙던 모습과 지금 실제로 제가 본 모습이 똑같아요.

[인터뷰]
그래요?

[앵커]
어쩌면 그렇게 똑같으십니까?

[인터뷰]
저는 할아버지가 됐고 우리 모두 다 경로석에 앉는 나이가 됐어요.

[앵커]
전혀 경로석에 앉으시지 않을 것 같은데...

[앵커]
제가 쎄시봉 영화를 재미있게 봤는데 쎄시봉 하면 일단 음악감상실인데 그때는 어떤 곳이었는지를 소개를 해 주세요.

[인터뷰]
그러니까 저희가 젊었을 당시에 스테레오 사운드의 좋은 음악을 들을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음향장치가 돼 있는 곳을 가야 아름다운 음악과 아주 풍부한 음향의 그 노래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앵커]
그래서 두 분은 쎄시봉을 대표하는 가수였는데 오늘 이상벽 씨가 같이 나오셨어요.

[인터뷰]
쎄시봉 친구들 공연에 오신 분들도 그래요. 이상벽이는 왜 다니느냐 하는데 사실 쎄시봉에 매일 먼저 발을 디딘 사람은 저였습니다.

우연히 현장에서 우리 조영남 씨를 발견해서 스카우트를 했고요.

[앵커]
직접요?

[인터뷰]
송창식 씨는 우리 모교 잔디밭에서 많이 노래를 부르는 젊은 아이들이 있었는데 제가 데리고 쎄시봉까지 갔고요. 그 뒤에 윤형주 씨하고 인연이 됐고 우리 김세환 씨, 한대수, 이장희 이런 분들이 추가로 모여서 정말 후일 이 나라의 청년문화의 기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배출된 곳이 쎄시봉이다, 최초에는 이상벽이 있다.

[인터뷰]
이상벽 씨가 그 당시 저희들이 대학가에서 노래를 한다는 친구들이 등장을 해서 노래를 했던 것이 금요일 저녁마다 있었던 대학생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때 이상벽 씨도 홍익대학교 학군단 ROTC였는데 그 제복을 입고 MC를 봤어요. 대학생 MC요.

그래서 조영남의 데뷔를 소개했고 송창식, 윤형주의 시작을 다 소개를 했던 MC입니다, 이상벽 씨는요. 이런 관계입니다.

[앵커]
장 앵커가 영화를 보셨다고 하니까요. 거기 보면 노래를 매주 우승을 하던 학생이 이 자리에 있습니다. 갑자기 우승을 놓쳐서 의기소침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사실과 같습니까?

[인터뷰]
그렇게 매주 하지는 않았고요. 그냥 곧바로 저희들이 개인적으로 데뷔했다가 곧바로 트리오 쎄시봉을 결성을 해서 하다가 군대가는 바람에 남은 것이 트윈폴리오였고 군대 간 한 친구를 주인공으로 해서 가상의 그런 픽션을 만든 게 영화입니다.

[앵커]
김세환 씨는 쎄시봉에 어떻게 합류를 하게 되셨어요?

[인터뷰]
저는 그러니까 이 형님들 노래를 할 때 구경을 했었습니다. 저는 노래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 형님들 노래하는 게 좋아서요. 저는 쎄시봉에서도 막내고 모든 곳에서 막내입니다.

[앵커]
막내라서 불편한 점이 많았겠어요?

[인터뷰]
별로 차이가 안 나요, 8개월밖에 안 나요.

[앵커]
사실 저희 어머니가 대학을 다니실 때 쎄시봉에서 음악 좀 듣던 여대생이라고 말씀을 하셔서 영화를 같이 봤거든요. 그때 쎄시봉에서 제일 잘 나가던 가수가 누구였는지 직접 증언을 해 주세요.

[인터뷰]
누구랄 것도 없고요. 사실 외모적으로는 윤형주 씨가 제일 예쁘장했으니까 여학생팬이 많았고 특히나 노래만 한 것이 아니라 작사, 작곡을 했었어요. 게다가 당시 팬들이 가장 좋아했던 게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DJ를 했어서 당연히 주목을 받았어요.

이전까지는 송창식 씨랑 같이 공연을 다니다가 지금은 조영남 씨랑 같이 다니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빠지고 들어온 것에서 공연의 차이를 이제 여러분께서 오시면 실감을 하실 텐데 송창식 씨와 함께 하는 공연은 듣는 그런 공연이라고 한다면 우리 조영남 씨와 함께 하는 공연은 보는 공연이다.

오늘 조영남 씨가 여기에 안 나오셨는지 여러분들 궁금하실 거예요.

[앵커]
왜 안 나오셨어요?

[인터뷰]
YTN같은 곳에서 조영남 씨를 캐스팅하기에는 대단히 부적절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정해진 대로 안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차례라든가 이런 것들을 사전에 다 알고 그대로 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게 안 합니다.

[앵커]
저도 두 번 인터뷰를 했거든요.

[인터뷰]
여기 나온 적이 있어요?

[인터뷰]
정말 어려웠던 인터뷰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기억이 나네요.

[인터뷰]
힘들었을 거예요. 제대로 안 있고 일어서죠. 담당하시는 분이 안 부르기로 하셨다고 해서 안 불렀습니다.

[앵커]
그러면 장 앵커가 음악을 어머님이 들으셨다고 했는데 이제는 따님이 직접 한번 노래를 듣는 영광을...

[인터뷰]
우리 이 여성을 향해서 불러드려야겠다. 영화 쎄시봉에 나오는 원래 우리가 그 당시에 불렀던 노래인데요. 영화에서 백일몽이라는 트리오 쎄시봉이 불렀던 노래를 김세환 씨와 같이 불러보겠습니다.

박수로 청해 듣겠습니다.

"이른 봄날에 꿈처럼 다가온 그대 영원할 줄 알았네. 그 여름 바닷가 행복했던 모래성. 파도에 실려 가 버렸네. 떠나가도 좋소. 나를 잊어도 좋소. 내 마음 언제나 하나뿐 더욱더 더 사랑 못 한 지난날들 후회하오. 사랑은 한순간의 꿈 백일몽. 깨어날 수 없는 꿈 백일몽. 깨어날 수 없는 꿈 백일몽. 아직 그대를 사랑하오. 영원히 사랑하오."

[앵커]
우와, 되게 설레이네요.

속삭인다는 그런 느낌이 드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시나요?

[인터뷰]
할아버지들 노래인데.

[인터뷰]
김세환 씨를 데뷔 시켰습니다.

아주 잘 자라주어서요.

[앵커]
그때 어떤 역할이셨어요?

[인터뷰]
캠퍼스 내에서 만났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의대생이었기 때문에 데모를 하다가 만났어요. 그런데 의대생인데 가운을 입고 있더라고요.

[앵커]
의사 가운이요?

[인터뷰]
아, 그 당시 의대생은 가운을 입고 전열에 섰어요. 그랬었는데 그때 세환이를 만나서요.

[인터뷰]
그러다가 이제 학교 행사 때 영문과, 국문과 이렇게 행사할 때 노래를 하면서 만났습니다.

[인터뷰]
저는 이미 유명했었고요. 그런데 김세환 씨는 유명해지고 싶었던 그 중 하나였죠.

[앵커]
이제는 같이 유명해지시고요.

[앵커]
그런가 하면 저희들이 윤형주 씨는 CM송의 대가 이런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도대체 몇 곡의 CM송을 작속을 하셨나요?

[인터뷰]
1400곡이요. 그리고 전체 CM송 중에서 제작은 한 30, 40%인데요. 노출 빈도는 7, 80% 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메이저급들의 CM이 많았기 때문에요.

[앵커]
저희가 알 수 있는 것이 뭘까요?

[인터뷰]
"손이 가요, 손이 가. YTN에 손이 가요."

[앵커]
국민과자 새우깡 CM송.

[인터뷰]
"하늘에서 별을 따다."

[앵커]
음료. 그런데 이게 시장을 뒤집었던 CM송 가운데 제가 한 거의 15, 16곡을 메들리로 부릅니다.

[앵커]
그러면 잠깐 그것도 들려주시죠.

[인터뷰]
그런데 그걸 다 보여드리기가 힘들어요.

[앵커]
몇 개만요.

[인터뷰]
지붕 만들고. YTN. 어때요, 멋있잖아요. YTN. 그다음에 김세환 씨가 부른 거.

[인터뷰]
저는요. YTN. 부드러운 맛. YTN. 상쾌한 기분. Y, Y, YTN.

[앵커]
김세환 선생님은 이게 이제 부드러운 맛 이건 H사의 껌이었고요.

[인터뷰]
저는 L사 거. 멕시코 치클처럼 부드럽게 말해요. '껌이라면 역시 YTN'. 그런 지난 날 30여 년간에 걸친 CM송 중에 시장을 뒤집었놨던 노래들을 제가 묶어서 불러드리는데 이거는 텔레비전에서도 보시는 일이 없죠. 방송에서 들으시면 특정 제품이 나가기 때문에 그걸 굉장히 기억하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앵커]
아직까지도 많이 불리는 CM송을 두 분이 불러주셨는데 그러면 이런 질문을 드리기가 실례일 수도 있는데 돈도 많이 버셨을 것 같아요?

[인터뷰]
그런데 원칙적으로 외국에서는 저작권의 범주에 속해서 해마다 계약을 연장하게 되면 저희가 받아야 되는데요. 그때만 해도 사회 초년병인데 일감을 갖다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했죠. 무슨 저작권말고요. 그런데 그걸 해 놓지 않은 것이 소급해서 하자고 하는데 저는 그냥 됐다고요, 기업이 잘 됐으니까요.

[앵커]
아까 새우로 만든 과자 OOO 있지 않습니까? 그거는 매출이 CM송 이후에 많이 올랐죠?

[인터뷰]
그때 500억 하던 스낵이 850억이 되고 1000억이 넘죠. 한 가지 아이템이요.

[인터뷰]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조금 앞서 산 겁니다. 30년 뒤에 이런 세상이 올 것을 예상을 했더라면 제가 지금 저작권 단체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윤형주 씨가 저도 그렇고요. 이전에 이런 관계로 만났다고 하면 지금 재벌입니다.

[인터뷰]
저 같은 경우에는 H사인데 L사로 녹화로 갔어요. 그랬더니 L사의 간부가 오셔서 저 사람 H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니까 좀 출연 좀 금해 달라고 해서 녹화를 못했어요. 그 정도였어요. 라이벌 관계기 때문에.

[앵커]
두 분이 가면 H와 L사 사장님은 참.

[인터뷰]
그런데 두 회사가 다 왔어요. 저희는. 처음에는 거부를 했는데 왜 그러냐면 이 회사의 제품을 성공시켰기 때문에 대안, 말하자면 다른 방법은 당신이 알고 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될지를. 그래서 이제 두 곳을 모두 다 했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이 평소에 궁금했던 내용들을 몇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름하여 그것이 알고 싶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때리고 싸우고. 영화를 보니까 참 많이 싸우더라고요. 워낙 젊은 시절이고 혈기가 왕성할 때니까 실제로도 많이 다투셨나요?

[인터뷰]
영화에서 그렇게 만들었고요. 그냥 싸움은 아니지만 영남이 형이 송창식 씨 따귀 한 번 때린 거 외에는 우리한테는 폭력은 없었죠.

[앵커]
여자 때문인가요?

[인터뷰]
아닙니다. 다들 어렵게 사는데 그렇게 성장을 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느냐고, 너나 나나 어려운데. 그래서 한 번 그랬죠. 형으로서요.

[인터뷰]
우리 중에는 이장희, 조영남 씨 다 포함해서 우리 중에서는 뜻밖에도 주먹 좀 쓴다고 하는 사람은 우리 윤형주 씨밖에 없었습니다. 명동에서 한참 할 때 그 동네에서 힘 좀 쓴다는 사람이었고 또래 불량한 사람들을 아주 앞장서서 제거하고 그런 역할을 했던 사람이 윤형주 씨입니다.

[앵커]
그러면 그래도 쎄시봉에서 사회도 보고 그러실 때 유명한 가수가 혹시 폭력에 휘말릴까봐 걱정 많이 하셨겠어요.

[인터뷰]
걱정까지는 아니고 저 친구가 알아서 하니까 실전을 내가 봤던 것은 우리들 식구이기도 한,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박상규 씨가 그 사람이 힘 좀 쓰는 편에 속했죠. 그래서 명동을 주기적으로 드나들어야 됐어요. 그쪽에 공연장이 있으니까요. 그 일대를 주름을 잡았던 주먹잡이들이 있었어요. 지나가면 한 번씩 시비를 거는 거예요. 그거를 정말 딱 한 방에 처리한 사람이 고인이 된 우리 박상규 씨입니다. 두 번째 주먹이 윤형주 씨일 거예요.

[앵커]
합의금 많이 나오셨겠어요.

[인터뷰]
그런데 지난 일이지만 싸우고 나면 화해를 하지 않으면 그 싸움은 많은 문제를 낳게 되어 있죠.

[앵커]
알겠습니다.

거기까지만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두 번째 그것이 알고 싶다, 어떤 게 궁금한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앵커]
많은 여성팬들이 열광을 했네요.

쎄시봉 최고의 스타는 조영남이었을까, 트윈폴리오였을까?

이거는 이상벽 씨가 증언을 해 주세요.

[인터뷰]
그거는 시기적으로 조금씩 다른데요.

조영남 씨야말로 어느 비오는 날 객석에 숨어있던 아마추어 한 사람을 픽업을 하게 돼서 조영남 씨가 데뷔가 됐는데 딜라이라를 본인이 불렀는데 그 노래를 담은 앨범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본인이 모를 정도로요.

그러니까 밤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어느 프로듀서가 녹음을 해서 그걸 판으로 낸 게 첫 번째 앨범이었습니다. 공전의 히트를 쳤죠.

그러니까 그다음부터 조영남 씨가 안경을 끼지 않는 얼굴을 여러분들 상상을 해 보십시오. 그 얼굴을 가지고 영화 주인공, 또 남정님 씨하고 연인관계로 연기를 했을 정도이니까 그 인기는 대단했고요.

트윈폴리오는 중간에 있던 이장희가 군대를 갔는데 그때 송폴리오라는 음악잡지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이름을 따서 트윈폴리오라는 이름을 만들었는데 만들자마자 하얀 손수건이니 한 장 안에 있는 레퍼토리가 거의 히트가 됐을 만큼 연이어서 아주 안타를 때려서 조영남, 트윈폴리오가 나중에는 같은 반열에서 인기를 같이 공감을 했습니다.

[인터뷰]
저 같은 경우에는 조영남 리사이클에 그걸 구경하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게스트로 트윈폴리오가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영남이 형보다 트윈폴리오가 인기가 더 있었어요. 그 정도였어요.

[앵커]
그러면 여기에서 윤형주 씨가 지금 가수로 치면 어느 정도였다, 이렇게 딱 말씀을 해 주시죠.

[인터뷰]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많은 아이돌 가수가 등장했던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서 그런 것이지 하여튼 4년 동안 매일 일기처럼 편지를 보낸, 하루도 안 빼놓고 보낸 그런 소녀들도 있었고요.

머리카락을 많이 뜯겼어요. 왜냐하면 수첩에 껴놨다 쉬는 시간마다 꺼내본다는 여학생도 있었고 하여튼 그런데 요즘 팬들처럼 극성은 아니었는데 굉장히 여론하기는 했던 것 같아요.

[앵커]
알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최근에 또 공연을 앞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공연장 가서 듣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한 곡을 아까 하셨습니다마는 아쉽습니다. 한 곡만 더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인터뷰]
오프닝 같은 노래인데요. 한번 해 보겠습니다.

[앵커]
우와. 지금 저희 스튜디오에 견학을 오신 분들이 계신데 바깥에서도 지금 박수를 치고 계십니다.

[앵커]
아름다운 화음 전국투어 가면 볼 수 있는 거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시작에 불과한 이만큼만 보여드리게 됐는데 제일 우리가 지금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공연이 25일 서울 코엑스에서 있는 공연입니다.

[인터뷰]
3시와 7시 두 번.

[인터뷰]
저희는 그렇습니다.

50년 가까운 세월 끝에 이렇게 여러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서 이 은혜를 갚는 길은 매 공연 때마다 죽기살기로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올라가기 전에 죽자고 다짐을 하고 올라갑니다.

[인터뷰]
공연 때 우리가 최근에 있었던 지난 3월 20일에 있었던 광주 공연에서 오늘 세상을 떠나신 어떤 환우가 마지막 산소통을 맨 채로 공연장에 누이들이 오빠를 모시고 와서 저희들의 공연을 같이 보셨어요.

그분이 마지막 공연을 보신 게 되는데요. 오늘 아침에 별세를 하셨습니다.

[인터뷰]
저희들도 깜짝 놀랐어요. 휠체어에다가 산소통을 메고 코에 호흡기를 낀 채 이렇게 가족들하고 오셨어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될까 우리끼리 이분한테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보너스는 같이 사진을 찍어 드리는 것밖에 없을 것 같아서 같이 사진을 찍어드리고 어떻게든지 쾌유를 하십시오 하고 이렇게 했는데 애석하게도 오늘 아침에 별세를 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앵커]
그분은 생애 잊지 못할 아름다운 공연일 겁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아직도 쎄시봉의 그 추억을 잊지 분들을 위해서 좋은 공연을 계속 부탁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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