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되새기는 민주주의..."기억해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되새기는 민주주의..."기억해야"

2025.06.10. 오전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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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6·10 민주항쟁 기념일'을 맞아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정식 개관했습니다.

40여 년 전 남영동에서 고문 피해를 입은 유동우 씨는 오늘 민주주의가 있기까지의 역사와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배민혁 기자가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기자]
짙은 회색빛 벽돌과 좁고 긴 창문이 눈에 띄는 건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입니다.

70~8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던 유동우 씨는 1981년 8월, 예비군 훈련을 받다가 갑작스럽게 남영동으로 끌려왔습니다.

[유동우 / 학림사건 고문 피해자 : 수사관이 권총을 옆구리에 탁 대면서, 소리 지르거나 도망가면 갈겨버릴 거야….]

유 씨는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빨갱이'로 몰렸습니다.

노동자와 학생들이 연대해 신군부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려다 반국가 단체로 조작된 '학림사건'의 당사자가 된 겁니다.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대공분실에 끌려와 경찰에게 들은 첫 질문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유동우 / 학림사건 고문 피해자 : 첫 번째 질문이 뭐냐면 '너 공산주의자지?' '공산주의자 아닌데요.' 그랬더니 '그럼 너 사회주의자야?']

이후 대공분실 5층 조사실에서 폭행과 고문이 이어지며 같은 질문이 반복됐는데, 경찰이 원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유동우 / 학림사건 고문 피해자 : (경찰이) 미리 틀을 짜놓고 거기에 끼워 맞춰서 하니까. 아니라고 하면 고문 들어오고 막 뚜드려 패니까. 계속 그 싸움이에요.]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당했던 509호 조사실에는 당시 고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바닥이 고정된 의자, 물고문을 위한 욕조, 바깥세상과 차단된 좁은 창문까지, 지금도 그때의 참혹함이 느껴집니다.

허위 자백을 하지 않으면 3층 특별조사실로 끌고 갔는데, 여기에도 사람을 구타하고 전기 고문하기 위한 장치들이 남아 있습니다.

유 씨는 이런 대공분실에 불법 구금된 한 달 동안 고문으로 세 번이나 병원에 실려 갔고, 몸과 정신이 피폐해졌습니다.

세월이 흘러서도 피해자인 자신이 위축되는 게 싫었던 유 씨는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탈바꿈한 뒤 경비와 해설사로서 자신의 경험을 알려왔습니다.

[유동우 / 학림사건 고문 피해자 : 늘 공포의 대상이죠. 이쪽을 쳐다보기도 싫고. 왜 이게 이 건물만 보면 위축이 되고, 피해야 하고, 왜 이래야 하냐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이렇게 아픈 역사를 간직한 대공분실이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정식 개관했습니다.

지난 2018년 실태조사를 통해 파악된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자가 4백 명에 달하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피해도 상당할 것으로 보이는 상황.

유 씨는 이제 이곳이 민주주의를 억압한 국가 폭력을 잊지 않고 계속 진실을 파헤치는 현장이 되길 희망합니다.

[유동우 / 학림사건 고문 피해자 : 앞으로 그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경각심도 일깨우고, 교훈도 주고, 대단히 중요한 장소가 될 수 있겠구나.]

YTN 배민혁입니다.


영상기자 ; 윤소정



YTN 배민혁 (baemh0725@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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