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터뷰] "시민에게 총 겨눌 수 없다" 故 안병하 치안감...아들이 기억하는 '그 날'

[퀵터뷰] "시민에게 총 겨눌 수 없다" 故 안병하 치안감...아들이 기억하는 '그 날'

2020.05.18. 오후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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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김영수 앵커
■ 출연 : 안호재 / 故 안병하 치안감 아들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앵커]
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 붙잡혀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숨진 고 안병하 치안감. 역시 무고한 희생자들 중 한 명일 겁니다. 안 전 치안감의 아들 안호재 씨가 전화로 연결돼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호재]
안녕하세요.

[앵커]
안호재 씨가 기억하는 1980년 5월 18일. 40년 전입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시죠?

[안호재]
그 당시 제가 5월 18일에는 광주 현장에 없었고요. 그때는 저는 서울에 있었는데 저희 가족은 평범한 공직자 가정이었습니다.

[앵커]
당시 대학생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안호재]
네.

[앵커]
어떻습니까? 그날 아버지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안호재]
아버님은 경찰국에 근무하실 때 무슨 일이 발생하면 집에는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저도 서울에 있었고 아버님을 제가 뵙게 된 게 2개월, 3개월 만에 뵙게 된 것 같았습니다.

[앵커]
2개월, 3개월 만에 뵙게 됐다. 어디서 뵈셨는데요?

[안호재]
아버님이 보안사에 압송되고 그다음에 경찰 치안본부 조사받고 나오셨을 때 그때 아주 오랜만에 뵙게 되었습니다.

[앵커]
아버지 고 안병하 치안감. 당시 전라남도 경찰국장이셨죠.

[안호재]
네.

[앵커]
그때 맡고 계신 임무가 무엇이었죠?

[안호재]
경찰로서 전남 지역, 그쪽의 시민, 도민의 단순한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경찰의 임무를 맡고 계셨습니다.

[앵커]
그렇죠.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의무 그걸 수행하고 계셨는데. 경찰은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없다, 이런 생각을 갖고 계셨고 실제로 신군부의 지시를 거부하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신군부에 체포돼서 보안사령부에 끌려가서 갖은 고문을 당하신 거죠?

[안호재]
네.

[앵커]
그때 두 달 만에 뵈셨다고 했는데 어떤 고문을 겪으셨습니까?

[안호재]
처음에는 아버님이 말씀을 안 하셨어요. 나중에 말씀하시는 게 허리도 펼 수 없는 공간에서 계속 잠을 안 재우고 불을 비추고 똑같은 말을 계속 질문하고. 그 당시에는 그냥 죽을 방법만 있으면 죽고 싶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앵커]
고문이 매우 심해서 그 고문 후유증이 여러 병으로 이어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안호재]
처음에 집으로 귀가하실 때는 당당하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몇 시간을 못 넘기더라고요. 바로 쓰러져서 그다음부터 응급실 가시고 병원에 입원하시고 또 집에 와서 요양하시고. 그 생활을 한 8년간 반복했습니다.

[앵커]
8년간 그런 생활을 반복하셨고 그런 어려움을 겪다 88년 그러니까 1988년 민주화운동 후 8년 만이죠. 1988년 10월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가족들이 당시에 많이 힘드셨죠?

[안호재]
여러 가지로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도 힘들었고 옆에서 아버님을 지켜본다는 게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앵커]
올해 고 안 전 치안감에 대한 평전이 나왔죠? 평전 읽어보셨죠?

[안호재]
네. 평전은 광주에 계신 분들 한 150명하고 타지에서 한 50명 그분들이 십시일반 모으셔서 평전을 만들어주셨습니다. 평전의 의미는 아버님의 정신이 사라지나 했는데 기록으로 남게 되어서 너무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앵커]
그 평전의 내용을 보면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씨의 회고록 내용과 다른 부분들이 있어요. 전 씨가 광주를 방문했다. 그리고 어머니 전임순 여사께서 증언하셨는데 전 씨가 광주를 방문했을 때 아버지께서 직접 상황 보고를 했었다, 이런 증언을 하셨거든요. 혹시 아드님도 이런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안호재]
그건 생전에 두세 번 들었습니다.

[앵커]
두세 번 들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전두환 씨가 비밀 리에 광주를 방문한 거군요?

[안호재]
그 상황은 제가 정확히 모르는데 말씀하시기로는 전두환이 그 당시에 보안사령관이고 아버님은 전남 치안 담당자니까 육사 후배지만 전두환 씨한테 업무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다음에 송정리 비행장일 거예요. 거기로 아버님한테 나오시라고 했나 봐요. 그런데 아버님이 업무가 바빠서 거기를 늦게 갔답니다.

늦게 갔더니 전두환 씨가 기다리고 있다가 올라가면서 여기 선배님, 서울에서 꼭 한번 만납시다. 그 얘기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앵커]
그랬군요. 안 전 치안감께서는 참고로 육사 8기. 김종필 전 총리와 동기시고요. 그런데 중간에 경찰로 전직하신 거죠?

[안호재]
네.

[앵커]
그래서 전두환 씨가 선배라고 이렇게 불렀다는 건데 아드님께서 직접 전두환 씨에 대해 어떤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아버님께서?

[안호재]
그냥 어떻게 하다가 80년 얘기가 나오다가 전두환이라는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려고 야심을 품고 그런 것도 모르셨어요.

그래서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서울에 오면 꼭 들러라. 아버님이 그때 전남에서 학생 시위가 예상되고 시위가 벌어지니까 아버님이 자리를 안 뜨시고 서울을 안 올라가셨습니다.

[앵커]
혹시 시민을 향한 발포 명령 또 헬기 사격.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고 또 헬기 사격 같은 이야기, 이런 말씀은 혹시 들어보신 적 없나요?

[안호재]
그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적이 없고 한 가지는 80년 5월 25일날 회의가 있었답니다. 최규하 대통령, 아버님 동기생인 이희승 씨, 그리고 군 원스타, 투스타 잔뜩 모여서 회의장을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조금 놀라셨대요. 들어갔는데 별 하나, 원스타들이 다리를 꼬고 대통령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더랍니다.

[앵커]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 대통령이죠?

[안호재]
네. 그래서 아버님이 군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그때 정확히 아셨답니다.

[앵커]
그랬군요. 당시에 지시 거부로 징계받은 경찰관이 60명이나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 가운데 21명이 이번에 징계취소 처분을 받았죠? 이 소식 접하면서 어떤 생각 드셨습니까?

[안호재]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부하분들을 못 지켜준 것에 대해서 상당히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저 나름대로 오랜 기간 그것 때문에 많이 정부에 요청도 하고 했는데 좀 늦은 감은 있고 제가 생각했던 수준은 아니지만 명예회복을 시켜준 경찰청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앵커]
5.18 광주 민주화운동 올해 40주년. 앞으로 많은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 반드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보십니까?

[안호재]
잘못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일단은 사죄를 해야죠. 하고 벌을 받는 건 둘째고 일단은 사죄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국민들한테 일단은 제대로 알려야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앵커]
진심 어린 사죄가 필요하고 진실이면 전 국민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라는 말씀 해 주셨습니다. 여기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고 안병하 치안감의 아드님이시죠. 안호재 씨 연결해서 자세히 들어봤습니다. 오늘 연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호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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