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전달자들 8편, "일제를 대변하다, 친일 언론"- 이동형의뉴스정면승부(5/3)

[카드뉴스] 전달자들 8편, "일제를 대변하다, 친일 언론"- 이동형의뉴스정면승부(5/3)

2019.05.29. 오전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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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5월 3일 (금요일)
■ 대담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8편, “일제를 대변하다, 친일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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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를 대변하다, 친일언론


#1
일왕 부부의 사진과 일장기가 크게 실린 이 신문.
- 1940년 1월 1일 조선일보 1면

일본의 신문이 아닌, 바로 ‘조선일보’입니다.


#2
일제강점기, 민족을 등지고 일제의 편에 섰던 언론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1936년 1월 1일 조선일보 신년사

“1933년부터 40년까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제호만 가리면 그 당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구별이 안 된다고 하는 평이 있었거든요”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3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민족지를 자임하며 창간되었으나,
1924년 1월 다섯 차례에 걸쳐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게재합니다.

“조선 내에서 (일제가)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 이광수 <민족적 경륜 中>

“조선 민족의 표현 기관임을 자임하면서 만들어진 신문이 더 이상 조선은 독립할 능력이 없으니 일본 밑에서 참정권이나 획득해보자, 라고 글을 썼으니, 당시 민중들이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죠.”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4
조선일보 역시 1933년 방응모가 인수한 이후 본격적인 친일 행적을 보입니다.

“광주학생사건에서 발단이 된 학생시위사건이 전 조선에 확대된 오늘날에 있어 제군이 비상(非常)을 버리고 평상(平常)에 돌아와 고요한 책상 앞에 용기 있게 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허다한 불만과 실망 속에 이토록 확대된 것은 학생들의 불행이자 조선의 불행이었다.”
- 1930년 1월 12일자 사설 <동요 중의 학생제군―책상 앞으로 돌아가라>

“많은 민중들이 3·1운동 10주년을 맞아서 뭔가 다시 한 번 독립의 욕구를 밝혀야겠다고 하는 차에... 학생들은 데모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1930년판 ‘가만히 있으라’가 되겠습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5
조선․동아일보의 친일 논조는 1940년 일제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천황폐하께옵서 육군관병식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시는 길에 앵전문 앞에 이르렀을 때 사고가 발생하였다. 전방 약 18간에 수류탄과 같은 물건을 던진 자가 있었는데, 천황의 마차에는 이상이 없어 무사히 궁성으로 돌아오시었다. 범인은 조선 경성생 이봉창.”
- 1932년 1월 10일자 조선일보 <천황 폐하 환행도중 돌연 폭탄을 투척>

“조선 통치사의 한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자 미나미 총독의 일대 영단 정책하에 조선에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된 것에 대하여 이미 본란에 수차 우리의 찬의를 표한 바 있거니와 황국 신민된 사람으로 그 누가 감격치 아니하며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 장래 국가의 간성으로 황국에 대하여 갈충진성(竭忠盡誠)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래서 국방상 완전히, 신민의 의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 1938년 6월 15일자 조선일보 사설


#6
광복 이후 두 언론은 복간되었지만, 동아일보의 모스크바 3상회의 오보사건이 일어납니다.

미국은 즉각 한국의 독립, 소련은 신탁을 주장했다는 내용

“미국과 소련의 주장을 완전히 거꾸로, 오히려 신탁 통치 주장은 소련이 했다는 식으로 대형 오보를 내면서, 민족주의 진영에서 격렬하게 반탁 운동을 하게 만들고, 그것이 남북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시발점이 됩니다.”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7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웠다?

여운형 선생이 운영하던 조선중앙일보의 최초 보도였으며,
이 보도 이후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던 송진우는 해당 기자인 이길용을 해직시킵니다.


#8
“프랑스 지도자 샤를 드골은 정계 은퇴 후 회고록을 쓰는데요, 본인이 왜 나치 청산을 확실하게 했는지, 그중에서도 언론인들에 대해서 왜 철저하게 했는지 소상히 밝힙니다. 한마디로 책임의 화신이다. 프랑스 민중들을 이리로 끌고 갈 수도 있고, 저리로 끌고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책임이 막중하기 때문에 그 막중한 책임을 방기한 부분이 대해서 가혹하게 처벌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9
“언론은 그 시대가 가야 할 조타라고 할 수 있는데요.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서 언론이 제대로 된 역사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서 반성해보는 계기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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