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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 수상자 “사진 속 모녀 난민수용소서 다시 만나, 가장 슬펐던 취재는 세월호”
퓰리처상 수상자 “사진 속 모녀 난민수용소서 다시 만나, 가장 슬펐던 취재는 세월호”
Posted : 2019-04-18 19:28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4월 18일 (목요일)
■ 대담 : 김경훈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


퓰리처상 수상자 “사진 속 모녀 난민수용소서 다시 만나, 가장 슬펐던 취재는 세월호”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로이터 통신의 한국인 사진기자 김경훈 씨가 미국 국경지대에서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는 온두라스 모녀의 사진을 찍어 퓰리처상을 수상했습니다. 일본 현지에 있는 로이터 통신 김경훈 사진기자 직접 연결해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기자님?

◆ 김경훈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이하 김경훈)> 네, 안녕하세요.

◇ 이동형> 우선 퓰리처 상 받으신 것 축하드리고요.

◆ 김경훈> 아휴 감사합니다.

◇ 이동형> 소감 먼저 여쭐까요?

◆ 김경훈> 소감이라면, 일단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받게 되어서 기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에 상은 저 혼자 받게 된 게 아니고, 저와 함께 장기간에 걸쳐서 미국의 중남미 이민자 문제를 취재했던 동료들과 받게 된 상인데요. 저희들이 아무래도 오랜 기간에 걸쳐서 심도 있게 취재한 사진 리포트가 큰 반향을 얻고, 그리고 인정받게 되어서 그게 가장 기쁩니다.

◇ 이동형>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난민들과 계속해서 동행 취재를 하셨죠?

◆ 김경훈> 네, 2주 반 정도 난민들과 동행하면서 멕시코시티에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지역인 티후아나까지 같이 이동하면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 이동형> 그렇게 찍은 사진인데, 많은 분들이 사진을 보셨겠습니다만, 사진을 보면 일단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그게 아마 최루탄일 것 같고요.

◆ 김경훈> 네, 맞습니다.

◇ 이동형> 그리고 아이들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아이 둘을 데리고 피하는 장면인데, 설명을 해주세요.

◆ 김경훈> 상황이 벌어진 곳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인 티후아나라는 곳이고요. 당시 제가 취재했던 수천 명의 중남미 카라반들이 도시에 있는 난민수용소에 있다가 그날은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던 날이고요. 그런데 시위 도중에 우발적인 사태가 벌어지면서 수천 명의 난민들이 국경지대 바로 앞에 있는 국경 장벽까지 뛰어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수천 명의 난민들이 거기에 모여 있게 되니까 장벽 건너편에 있는 국경수비대가 최루탄을 쏴서 그들을 해산시키는 일이 벌어졌고요. 그래서 그날은 제가 서너 시간 정도 계속 그쪽에서 취재를 했는데, 서너 시간 동안 네 번에서 다섯 번에 걸쳐 최루탄으로 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한 것이 있었고요. 그 사진 속 장면은 가장 첫 번째 최루탄이 난민들에게 발사되었을 때의 사진입니다.

◇ 이동형> 사진을 보면,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기저귀 차림에 맨발입니다. 신발도 못 신고. 굉장히 급박하고, 또 절박함이 느껴지는 사진인데, 기자님은 혹시 사진 찍으실 때 위험하지 않으셨어요?

◆ 김경훈> 그때는 저도 일단 대규모 시위가 있기 때문에 혹시 만일에 대비해서 저도 안전 헬멧과 방독면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었는데요. 그 당시 사진을 취재했을 때의 상황은 급박하게 최루탄이 발사되는 상황이라 제가 방독면이나 안전 헬맷을 쓸 여유가 없었고요. 저도 최루탄에 맞서가면서 취재를 했었는데, 사진기자로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위험을 감지해서 피해간다든가, 그러기보다 아 이게 그날의 스토리가 되겠구나, 그날의 중요한 장면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런 것을 저희가 쫓아가게 되죠. 취재 당시에는 그렇게 위험을 제가 감지한다든가, 그럴 겨를은 별로 없었습니다.

◇ 이동형> 다시 말씀을 드려도 그 사진은 굉장히 절박한 모습이 보이는데, 그전에 계속 이민자들과 생활하면서 취재를 하셨잖아요?

◆ 김경훈> 네.

◇ 이동형> 그분들 실제로 그렇게 같이 함께 있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 김경훈> 일단 제가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이랑 같이 잠을 자고 밥을 먹어가면서 동고동락을 했던 것은 아니고요. 어디까지나 저는 취재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관찰자의 입장에서 같이 따라다니면서 취재를 했는데요. 일단 제가 느꼈던 것은 중남미 난민 문제가 그들의 절박한 이유에서부터 시작된 거거든요. 대부분이 상당히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황이었고, 경제적인 빈곤 문제뿐만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온두라스라든가, 과테말라라든가, 그런 곳에서 갱 폭력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에요. 일가친척이나 이런 사람들이 갱에 의해서 목숨을 잃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안전과 경제적인 이유로 조금 더 나은 환경을 위해서 미국으로 향하고 있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상당히 정교하게 잘 짜인 계획을 가지고 무리에 참여했던 것도 아니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카라반 행렬에 참여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 이동형> 이 사진 한 장이 세계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다고 할까요, 여론을 들끓게 했다고 할까요. 트럼프 반 이민 정책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을 다시 한 번 불러일으키는 사진이었다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본인이 찍은 한 장이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을 하셨습니까?

◆ 김경훈> 글쎄요, 일단 그 사진을 취재했을 당시는 그 사진이 그날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사진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고요. 그래서 최루탄이 터지는 와중에도 현장 한 구석에서 바로 제 노트북을 펼치고 사진을 바로 전송해서 저희 회사로 보냈었는데요. 그래도 저희 일이, 사진기자라는 일이, 사진 한 장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또 그것이 매일의 일이기 때문에 그날의 중요한 사진이라는 생각은 들었었는데, 그렇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줄은 그날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 이동형> 사진 보도된 이후 혹시 모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습니까?

◆ 김경훈> 사진을 취재하고 그 다음 날 난민수용소에서 가족을 다시 찾았고요. 그리고 저 역시 그 가족과 함께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사진 속에 그 가족은 엄마가 두 딸만 나오는데요. 실은 다섯 명의 아이를 데리고 함께 카라반 행렬에 참가했었고요. 남편과 큰 아들이 몇 년 전에 미국으로 미리 건너가 있어서 그쪽에서 자리를 잡은 상황입니다. 가족들의 꿈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가족이 다시 재결합하는 것이 꿈이었고요. 그때는 난민수용소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나누면서 후속 취재도 했었는데, 아이들이 닭고기를 먹고 싶어 해서 제가 티후아나에서 가장 좋은 식당이라고 할 수 있는 KFC에 가서 같이 닭도 먹고, 슈퍼마켓에 가서 여러 가지 필요한 것도 사주고 했었고요. 그 이후에는 그 아들이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생인데요. 휴대폰으로 SNS가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서로 연락처를 교환해서 가끔씩 안부를 묻는 정도고요. 그리고 저희 로이터에서도 계속 그 가족을 후속보도해서 작년 말에 사진을 보고 많은 미국의 인권단체들이 그 가족을 도와주어서 현재 미국에 난민 신청까지는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난민 신청이 되어도 이게 프로세스가 상당히 오래 걸리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난민 신청에 대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이동형> 그래요. 퓰리처 상이라고 하는 게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꿈꾸는 상인데, 한국인 최초로 받으셨잖아요?

◆ 김경훈> 그런데 잠깐만요. 제가 한국인 최초는 아니고요. 저는 한국인 사진기자로서는 최초라고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 AP에 계셨고, 지금은 뉴욕타임즈에 계시는 최상훈 기자께서 노근리 사건에 대한 것으로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 이동형> 그러면 사진기자로서는 처음인데, 소식 들으셨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 김경훈> 일단은 그게 우리나라 시간으로 새벽 4시에 발표가 됐고요. 그리고 미국에 있는 저희 사진부의 사진부장이 4시 반쯤에 저에게 전화를 해줬어요. 상 받았는데, 알고 있느냐고. 일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상당히 기뻤고요. 말씀하신 대로 퓰리처상이라는 게 저희 언론계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니까요. 기뻤고, 저희가 열심히 취재했던 게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보다 기뻤습니다.

◇ 이동형> 보니까 어쨌든 16일에 발표가 났던 것 같은데, 4월 16일이면 또 우리 사회에서는 아픈 기억으로 기억되는 날이거든요. 세월호 참사 있었을 당시에도 기자님 취재하셨죠?

◆ 김경훈> 네, 그랬습니다.

◇ 이동형> 그때 어떤 심경으로 취재를 하셨습니까?

◆ 김경훈> 저는 그때 그 사건이 터졌을 때 뉴스 속보를 통해서 사실을 접하고 한국에서 커다란 이슈가 있으면 제가 맨 처음 지원을 나갔기 때문에, 오전에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긴급 뉴스를 듣고 저도 한국 갈 준비를 했었어요. 그런데 많은 한국에 계셨던 분들도 마찬가지지만, 중간에 다 구조되었다는 식으로 발표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저도 비행기 표를 다 캔슬하고 다행이다, 큰일은 아니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결국, 그날 자정에 서울에 도착했고요. 김포공항에서부터 차로 달려서 다음 날 새벽에 진도에 도착해서 그때부터 취재를 했는데. 제가 여러 가지 취재를 해오면서 개인적으로 사진을 취재할 때 눈물을 글썽거렸던 적이 딱 두 번 있습니다. 한 번은 세월호를 취재할 때였고요. 다른 한 번은 중국에 살아계신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분들을 취재할 때였는데요. 특히나 세월호를 취재할 때는 저도 아이를 가진 부모의 입장이었기 때문에요. 상당히 저도 감정이입이 많이 됐고, 개인적으로 가장 취재하면서 슬펐던 기억이 있는 취재이기도 했습니다.

◇ 이동형> 당시 김경훈 기자가 찍은 사진을 보면, 이 사진도 우리 사회도 반향을 일으켰던 것 같은데, 아이를 잃었을 것 같은 아버지가 바닷가에 앉아서 기도하는 모습이거든요? 많은 분들이 많이 슬퍼했던 사진 같습니다.

◆ 김경훈> 고맙습니다.

◇ 이동형> 앞으로 보도사진 기자로서 또 다른 목표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김경훈> 일단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가지고 사실을 보도하는 게 저의 직업적인 목표니까요. 계속 그 일을 열심히 하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제가 북한 취재를 예전 10년도 넘은 오래 전에 평양을 갔던 적이 있는데요. 그 이후에는 저희 로이터 통신이 북한 관련 취재를 계속 해왔지만, 한국인이라는 국적 때문에 평양에 갈 기회가 그동안 없었습니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계속 변하고 있으니까요. 언젠가는 북한 취재를 조금 더 많이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저는 사진기자라는 일을 하면서 나름 느끼고 있는 점이 사진은 결국, 언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요즘 몇 년 사이에 디지털 사진과 스마트폰이 일상화되면서 사진이 정말 많은 분들에게 언어처럼 쓰이고 있고, 생활의 도구처럼 쓰이고 있는데요. 그러한 시대에 있어서 사진을 조금 더 올바르고, 교양 있게 사용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얼마 전에 그런 생각을 모아서 책을 낸 적도 있는데요. 앞으로 제가 일을 하면서 느꼈던 사진에 대한 언어로서의, 도구로서의 생각들을 많은 분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그런 생각도 있습니다.

◇ 이동형> 알겠습니다. 남북관계가 지금보다 더 좋아져서 우리 김 기자님이 원하시는 북한 취재 마음껏 했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 김경훈> 감사합니다.

◇ 이동형>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김경훈> 네, 감사합니다.

◇ 이동형> 지금까지 로이터 통신 김경훈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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