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2018.09.13. 오전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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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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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취재 · 분석 : 함형건 기자 [hkhahm@ytn.co.kr]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그의 모습은 한가롭고 평범해 보였습니다. 샌들에 짧은 바지 차림.
작년 5월 어느 날 새벽 2시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CCTV에 한 남성이 찍혔습니다. 그리고 기묘한 행동이 시작됐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7층에서 승강기를 탄 남성은 10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다시 13분 후 승강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그는 12분 후 9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잠시 사라졌다가 6분 뒤 돌연 10층에 나타난 남성은 승강기를 타고 13층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10층으로 돌아왔다가 7층으로 내려가서는 마침내 종적을 감췄습니다. 30분 남짓한 시간에 7층→10층→1층→9층→10층→13층→10층→7층의 순서로 배회하는 모습이 CCTV에 잡힌 겁니다. 그사이 재활용 폐기물을 쌓아놓은 아파트 6층 복도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건너편 아파트 주민이 치솟는 화염을 목격해 신고했고, 다행히 큰 피해 없이 불은 진화됐습니다. 당시 소방서가 작성한 화재조사보고서는 이 수상한 인물에 대한 의심스러운 사실을 기록해놓았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관할 소방서는 이 남성이 방화했다면, 9층에 내린 뒤 종적을 감췄던 6분 10초 동안이 불을 질렀을 만한 시간대라고 추정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에서는 해당 시간대에 남성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았다며 원인 미상의 화재라고 적었습니다. 소방기본법 제32조를 보면, 소방본부장이나 소방서장은 화재 조사 결과 방화(放火) 또는 실화(失火)의 혐의가 있다고 인정하면 바로 담당 경찰서장에게 그 사실을 알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경찰서 신고입니다. 하지만 화재 원인을 모르면 경찰에 통지할 의무가 없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관할 경찰서는 수사를 요청하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진정서가 접수되서야 화재 발생 며칠 뒤부터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CCTV에 잡힌 인물의 신원에 대해 아파트 거주자들을 상대로 탐문을 했지만, 끝내 남성의 정체와 화재 원인은 밝히지 못했습니다.

범죄심리분석관 출신인 배상훈 서울디지털대학 경찰학과 교수는 이 남성의 행동은 방화범들에서 자주 보는 패턴이라는 의견이었습니다. 작은 불을 질러 주변의 반응을 떠보려는 ‘간 보기식’ 방화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이 난 뒤에 현장 부근에 머문 것 역시, 불난 뒤 주변의 반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방화범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 2%까지 떨어진 방화 비율 >


이 화재는 기자가 전국 화재 데이터 중에서, 데이터 분석을 통해
추출한 미심쩍은 화재 사건 중 하나입니다. 소방서 조사 결과, 화재의 원인이 방화라고 분류되진 않은 화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재 내역을 보면 일부 방화 가능성이 엿보이는 ‘수상한 화재’를 골라낸 것입니다. 과연, 전국의 화재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기자는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소방청 국가화재정보시스템의 화재 데이터 (2007~2017년 화재) 488,912건을 입수하고 분석에 착수했습니다. 소방청 화재통계연감의 공식 통계와도 대조했습니다.

조사 결과, 전체 화재 중 방화나 방화의심(확증 단계는 아니나 방화가 의심되는 화재 사건)으로 판정된 화재의 비율(이하 '방화 비율')은 급격한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06년에 10%대를 기록하며 정점을 찍은 뒤 이후 꾸준히 줄어들어 2017년에는 2%까지 내려갔습니다. 약 10년 만에 5분의 1로 감소한 겁니다. 2%대의 낮은 방화 비율은 올해 들어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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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국의 방화 비율 2%는 어느 정도의 수준을 의미할까요? 이웃 일본과 비교해보겠습니다. 일본도 방화 비율이 하락세이긴 하지만, 10년 전에는 20%대, 최근에도 14~15%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보다 7배 높은 수준입니다. 아래 그래프는 한일 양국의 방화비율의 하락폭을 하나의 그래프에서 중첩해서 비교해 보여줍니다. 한국의 방화비율이 훨씬 가파르게 떨어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Y축이 좌우 2개인데, 왼쪽 Y축이 한국, 오른쪽 Y축이 일본에 해당한다는 점을 감안해보셔야 합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작년 한 해 일본의 총 화재는 39,198건, 한국은 44,178건.
하지만 전체 화재의 14.7%가 방화인 일본은, 한국보다 한해에 발생한 방화가 4,800여 건이나 더 많습니다.
총 화재 발생은 한국이 많은데, 방화 발생 건수와 방화 비율은 거꾸로 일본이 더 높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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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공식 방화 통계의 이 현격한 차이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과연 한국이 일본보다 치안이 훨씬 더 좋고 사회 불만도 적기 때문이라고 단순히 생각할 수 있을까요?

물론 국가마다 화재 통계의 세부적인 분류방법에 차이가 있을 수 있고 화재조사제도의 차이점도 존재합니다. 일본의 소방당국은 대체로 화재 조사에 주된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화재의 경우, 경찰이 화재 조사와 수사를 주도합니다. 방화나 실화가 의심되는 화재 현장조사에서 소방 당국의 역할은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이원화된 화재조사체계가
굳어진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10여 년 전에도 존재했던 이런 조사체계의 차이가 왜 최근 들어 방화의 커다란 차이를 낳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세밀한 관찰이 필요해 보입니다.

한국의 방화비율은 해마다 2006년과 2007년 사이에 낙폭이 컸고, 2011년과 2012년에도 눈에 띄게 감소했습니다. 이후에도 해마다 꾸준히 줄어들었습니다. 2007년은 화재 통계의 국가화재 분류체계가 이전보다 세분화된 시점입니다. 이전에는 화재 원인 분류가 전기, 유류, 가스, 담배, 방화 등 11개로 단순화되어 있었지만, 2007년부터는 11개의 발화요인 대분류와 45개의 소분류가 신설됐습니다. 특히 이때 방화로 단정할 수는 없어도 방화 가능성 있는 화재를 지칭하는 ’방화의심‘이라는 새로운 분류가 생겼습니다. 소방조사관 입장에선 방화로 단정하지 않고 그 가능성만 갖고도 방화 관점에서 화재를 볼 수 있도록 입지가 넓어진 셈이지만 역설적으로 방화 비율은 더 떨어졌습니다. 이 또한 수수께끼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한국의 방화 통계가 시기별로 또 지역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일단 소방 통계상으로 방화가 줄어든 것은 전국적인 현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위 그래프는 방화 비율의 변화 추이를 데이터로 시각화한 것입니다, 짙은 붉은색일수록 방화 비율이 높고, 옅을수록 낮아지는 구간입니다.

그래프를 보면, 특히 서울, 인천, 대전, 울산, 부산 등 대도시의 방화 비율이 2008년에서 2012년 사이에 급감한 사실이 확인됩니다. 파란색 상자로 표시한 구간입니다.

연도를 표시한 X축에서 2007~2017년의 절반쯤인 2011년과 2012년 사이에 수직선을 그어 살펴보면, 그래프의 좌측과 우측의 농담이 전반적으로 차이가 나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화재조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2007년에서 20010년 사이에는 크고 작은 화재의 원인을 놓고 소방과 경찰 간에 판단이 엇갈리면서 갈등이 표면화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기사의 후반부에서 좀 더 얘기하겠습니다.

기자는 방화통계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각 관할 구역의 실상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2007년, 2008년 2년과 2016년, 2017년 2년을 묶어서 양 기간 사이의 변화를 비교하고, 방화비율의 감소폭이 큰 순서로 소방서 간의 순위를 매겼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2007년과 2008년에는 19.6%에 달하던 인천 계양소방서의 방화비율은 2016년과 2017년에는 1.09%대로 급감했습니다. 1%대는 통계상으로 방화로 잡히는 화재가 거의 없다는 얘기입니다. 계양소방서는 2007년에 총 269건 화재 중 60건이 방화와 방화의심 화재(이하 ‘방화’로 통칭) 에 해당했지만 2016건에는 방화 판정이 한 건도 없었습니다. 2017년에는 3건에 불과했습니다. 서울 용산소방서도 2007년에는 총 화재 224건 중 47건이 ‘방화’로 판정됐지만, 2016에는 ‘방화‘가 1건, 2017년에는 한 건도 없었습니다.

기자는 순위표 20위 안에 들면서 방화 비율이 소수점 자리 한 자리 기준으로 1%대 이하인 소방서 6개 구역을 골라냈습니다. 인천 계양소방서, 서울 용산소방서와 강남소방서, 대전 서부소방서, 울산 동부소방서, 부산 해운대소방서가 해당합니다. 이들은 앞서 그래프에서 방화 비율이 유난히 급감한 지자체에 포함된 소방서이기도 합니다. 이들 소방서 관할 구역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더 특이한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들 6개 지역은 공통적으로 대도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전의 낡은 주거 환경과 건물이 대거 정비되면서, ‘묻지마 방화’와 같은 우발적인 범죄를 일으킬 요소가 줄어든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도시환경의 정비가 화재에 끼친 핵심 변수였다면, 총 화재 건수가 상당폭 줄면서 방화도 이에 연동해 감소했을 겁니다. 하지만 다음의 그래프는 좀 다른 흐름을 보여줍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6개 구역의 총 화재 수는 2007년에서 2017년 사이 11% 감소에 그쳤지만(파란색 그래프), 방화와 방화의심으로 분류된 화재는 94%가 줄어든 것입니다. (붉은색 그래프)

도시 환경적 요인이 부분적으로 작용했을망정, 전체를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이들 지역의 자료를 한 단계 더 미시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 분석을 통한 방화 의심 화재 추적>


이들 6개 소방서 관할구역에서 2년간 일어난 화재는 2,663건입니다. 기자 1인이 이들 화재의 발생 보고서를 전수 조사해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인 취재방법입니다. 대신 기자는 요즘 각광받는 데이터 처리 분석기법인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을 활용했습니다. 소방 화재 데이터에는 발생 시간대와 발화 열원, 최초 착화물, 인명 및 재산 피해액, 날씨, 화재 장소 유형 등 다양한 변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어떤 경우에 방화일 가능성이 높은지를 ‘랜덤 포레스트’(Random Forest)라는 방식의 머신러닝 알고리즘에 학습시켰습니다. 어떤 도구로 어떻게 불이 붙었나? 불이 붙은 재료는 무엇인가? 몇 시에 화재가 발생했나? 어느 정도의 피해가 났나? 등등의 다양한 질문을 던져 여러 개의 ‘사다리 타기’를 거친 뒤, 각각의 화재가 방화에서 비롯됐는지 아닌지 확률적으로 추정하는 분석 방법입니다. 마치 ‘스무고개’식 사다리를 타서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인데요. 이 같은 개별적인 과정을 ‘의사결정 나무’라고 부릅니다. 랜덤 포레스트는 이런 ‘의사결정 나무’를 수백 개 만들어 그중에서 투표로 답을 고르듯이 적합한 결론을 찾아갑니다.

앞서 언급한 6개 소방서 관할구역을 제외한 전국의 다른 소방서 구역 207곳의 2년 치 데이터로 컴퓨터를 학습시키고, 이렇게 만들어진 예측모델로 6개의 관심 구역에서 발생한 화재가 방화인지 여부를 추측하도록 했습니다. 컴퓨터는 이 방화 분류 알고리즘의 정확도가 85% 내외라고 추산했습니다.

분석 결과, 소방서는 ‘방화’로 판정하지 않았지만, 컴퓨터 알고리즘은 ‘방화‘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류한 화재가 324건에 달했습니다. (알고리즘은 ’방화‘일 확률을 수치로 계산하는데, 그 확률이 0.5 즉 50% 이상이면 방화의심으로 판정합니다.) 324건은 6개 소방서 관할 구역 내 총 발생 화재의 12% 정도인데, 일본의 방화율이 14~15%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보다는 약간 낮은 수준입니다. 다만, 이 기계학습 예측 모델은 입력 데이터에서 오는 한계와 오차가 명백히 존재한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화재 조사에는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의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학습 데이터로 삼은 소방 데이터에는, 방화 판정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인 화재에 대한 취재와 내용 확인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기자는 이 가운데 방화 확률이 80% 이상 넘는 것으로 분석된 화재를 중심으로 검토했습니다. 화재 데이터베이스로 컴퓨터 1차 분류 → 소방화재 현장조사서에 대한 전문가 문헌 검토 → 경찰 내사결과보고서 검토 등의 과정을 거쳐 의심스러운 화재를 선별했습니다. 개별 화재에 대한 화재현장조사서를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입수해 참고했고, 오랜 화재조사 경험을 가진 복수의 화재 전문가에게 의견을 구했습니다. (화재조사서 내용에 대한 검토를 맡은 화재 조사전문가들은 익명 보도를 조건으로 자문에 응했습니다.)
이렇게 선별된 화재 중에는 화재 전문가들이 자신이 조사관이라면 방화의심 사건으로 판정할만하다고 밝힌 화재이거나, 방화를 배제할 수 없지만 조사 내용이 불충분해 추가 조사가 필요해 보이는 화재 등이 포함됐습니다.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은 이들 화재 가운데, 1차로 24건의 화재의 개요와 당국의 조사 보고서 원문 내용을 인터넷에 스프레드시트 형태로 공개해 시민들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습니다.
(인터넷 주소창에 http://bit.ly/2oYMXSm 을 입력하면 해당 구글스프레드시트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동네 수상한 화재 보고서’라고 지칭한 이들 수상한 화재 목록은 사망자가 발생한 큰 화재부터 우리 주변에서 묻혀 지나가는 작은 화재까지를 망라합니다. 당국은 방화의심 사건이라고 규정하진 않았지만, 방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화재들입니다.


기자는 이 사례들을 통해 화재 사건을 처리하는 당국의 조사 관행과 그 문제점을 직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 화재의 내용을 재구성해봤습니다.

(사례1)
지난해 12월 자정을 넘은 한밤중에 서울 용산의 한 낡은 건물에서 불이 났습니다. 불이 난 3층은 주인 없이 방치됐던 빈 공간이었는데, 불이 나서 한 개 층이 소실됐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소방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깨진 창문 등을 통해 공기가 내부로 유입되면서, 불이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소방서 화재조사보고서는 전기적 요인으로 불이 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대신 방화에 의한 요인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현관문이 떨어져 출입이 가능한 상태였고, 계단에는 누군가 벗어놓고 간 슬리퍼가 있었습니다. 특히 바로 아래층에 홀로 기거하던 사람의 손에서는 불에 그을린 듯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사건을 조사한 소방 조사관과 관할 경찰서 형사는, “2층 거주자는 불안정하고, 술에 만취해,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소방서는 원인 미상 판정을 했습니다. 반면에, 경찰은 전기적 요인에 의한 화재로 결론 짓고, 조사를 마무리했습니다. 경찰서 측은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팀의 당일 육안 감식 결과 ‘단락흔’ (전선이 녹아 끊어진 흔적)이 확인된 점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경찰은 2층 거주자가 술에서 깬 상태에서의 추가 조사는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 전기 화재 판정의 함정 >

기자의 의뢰로 조사서 내용을 검토한 복수의 화재 조사전문가들은 화재 조사보고서 내용만으로도 방화가 의심되는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건물 관리상황과 새벽 시간대, 아래층 거주자의 불안정한 상황, 초기의 급격한 연소 속도 등을 종합적으로 볼 때 방화가 의심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경찰이 단락흔을 근거로 전기적 요인의 화재일 것이라고 본 대목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화재 현장의 전선이 끊어진 흔적만 분석해서는 전기적 문제로 불이 일어난 건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 화재조사 학계의 정설입니다. 정밀 기기 분석으로도 안 되는 것을 육안 감식으로 단정 짓는 것은 더더욱 위험한 일이겠죠.

흔히 “당국은 끊어진 전선을 발견…합선에 의한 화재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라는 화재 기사를 자주 보게 됩니다. 화재 수사에서 단락흔에만 의존해 판단하려 한다면, 화재 수사는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단락흔에 대한 오해와 과도한 의존은 국내 화재 수사의 고질적인 문제인데, 현장의 상당수 화재조사관도 인식하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합니다.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은 이 단락흔을 둘러싼 오랜 문제점에 대해서도 후속 보도에서 별도로 다룰 예정입니다.

(사례2)
2016년 8월 대전의 한 다가구 주택 1층 주차장에서 불이 나서 주차되어 있던 차량 4대를 태운 뒤, 2층과 3층의 창문과 외벽으로까지 불이 확산했습니다. 주차장 한구석에 쌓아놓았던 폐자재와 재활용 상자 더미에서 불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화재 현장을 직접 촬영한 CCTV 화면은 없었습니다. 다만 주차장 바닥의 타다 남은 잔해에서 인화성 물질인 톨루엔 성분이 검출됐습니다. 소방서는 방화와 전기 화재일 가능성이 모두 있다면서 원인 미상의 화재로 판정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인위적인 요인의 화재 즉 누군가 불을 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감정서에서 언급했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검출된 톨루엔이 방화에 사용된 것인지 여부는 경찰이 종합적으로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경찰은 인위적 요인의 화재라고 보면서도 이 사건을 방화 사건으로 간주하는 대신 누군가 실수로 저지른 화재, 즉 ‘실화 사건’이라고 분류했습니다. 미제 사건으로 남은 이 화재와 별도로 대부분 원인 미상의 화재는 내사종결(조사 결과 방화나 실화 혐의가 없어 종결 처리) 처리됩니다. 실화 미제사건이 되든 내사종결 처리되든 해당 화재는 공식적으론 방화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피해자가 존재하는 한, 살인은 살인, 강도는 강도, 성범죄는 성범죄로 규정되고, 범인을 잡지 못하면 미제 사건으로 남죠. 그런데 화재 사건은 방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하다가도, 방화에 대한 물증을 못찾으면 혐의점 없음으로 내사종결 처리되거나 실화로 규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해당 화재가 일반 화재나 가벼운 실화 사건이 되는 순간 당연히 담당 경찰도 부담을 덜게 될 것이고 일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싶은 유혹도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화재 조사관과 수사관의 엄격한 자기규율과 원칙이 더욱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례3)
방화 사건의 성격은 크게 원한에 의한 방화, 이른바 묻지마 방화, 보험사기를 노린 방화로 나뉩니다. 특히 갈등이 깊은 현대 사회에는 이유 없이 불을 지르는 ‘묻지마’식 방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화재는 공터나 공사장, 빈집, 빈 건물 등 누구나 접근하기 쉬운 공간이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문제는 인위적인 화재가 의심은 되더라도 현행범이거나 불이 난 장소를 직접 찍은 CCTV가 없다면, 범인을 잡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2016년 12월 새벽 1시에 대전의 한 건물과 담장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일어난 화재가 그런 경우입니다. 소방화재조사서를 보면 불이 난 곳은 출입문이 항상 열려 있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였다고 했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그러니 방화 가능성은 있는데 방화의 구체적인 단서는 없다면서 불장난 화재로 분류했습니다. 경찰의 내사 결과 보고서는 방화의 단서가 없고, 피해가 적으므로 조사의 실익이 없다고 언급했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또 같은 보고서에 실린 경찰 과학수사팀의 감식 내용을 보면, 담배꽁초를 버려서 화재가 날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인위적 요인으로 화재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결국 경찰은 이래 저래 누군가 새벽에 불을 내긴 한 것 같으나 이상 조사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사실 불장난이란 그 자체로 방화입니다. 새벽에 남의 건물 공터에 들어가 불을 지르는 행위, 비록 피해는 적었더라도, 불이 확산하면 인근 건물에도 피해가 번질 수 있는 화재를 ‘장난’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경찰이 검거하는 연쇄 방화범 중엔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이 같은 작은 불을 여러 차례 지른 경우가 많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듯이 작은 화재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동네 수상한 화재 목록’을 보면 소방 당국은 불장난으로 판정하고, 경찰서엔 아예 접수한 기록이 없는 의문의 ‘작은’ 화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 ‘우리 동네 수상한 화재 보고서’ 24건 화재 중 6건에 대해 관할 경찰서는 수사나 내사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사실상 화재 수사를 하지 않은 셈입니다. 16건은 내사했으나, 범죄 혐의점을 찾을 수 없다며 본격 수사에 들어가지 않고, 내사 종결 처리했습니다. 기자나 이들 화재 보고서를 검토한 제3의 화재 전문가는 이들 화재가 방화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화재 조사 과정에서 주변인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미흡해 보이거나, 화재 감식과 감정의 원칙과 절차를 제대로 거쳤는지 의심되는 사례들이 다수 포함됐습니다.

불이 나고 현장에 먼저 도착하는 소방대원은 화재 초기의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할 만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소방조사관은 외국과 달리, 방화 사건에 대한 수사권이 없어 그 조사에 명백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방화판정사례의 급격한 감소 추세는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소방당국의 화재 조사가 허술하다는 방증이라면, 그보다 현장에 늦게 도착하는 경찰도 정보 확보 차원에서 그만큼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기자는 각종 화재현장에 민간화재조사위원으로 활동해온 소방학과 교수들에게 소방 통계상으로 방화비율이 급감한 사실과 화재 조사와 수사의 문제점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한국의 방화 통계는 미스터리“>

기자가 만난 화재 전문가들은 열악한 근무 여건에서도 묵묵히 일하면서 전문성을 키워나가는 다수의 화재조사관이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조사관들이 이전보다 화재 원인 판정에 더 신중하게 접근하다 보니, 방화 판정이 줄어들었수도 있다는 의견입니다.

하지만 화재 통계에서 방화 비중이 10년 만에 5분의 1로 줄어든 현상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동시에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사회 갈등이 심화하거나 빈부 격차가 심한 사회에서는 예외 없이 사회 병리 현상의 일환으로 방화 사건이 일정 규모로 잇따르거나, 증가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당국이 화재범죄의 위험을 제대로 못 걸러내고 있다는 얘기라는 겁니다.

기자와 대화를 나눈 현직 조사관들과 화재 전문가 중엔 화재 조사 현장에서 소방과 경찰 간의 미묘한 갈등을 목격했거나 직접 겪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두 기관 간의 불편한 관계는 소방 당국이 방화를 판정하는데 제약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설명도 있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방과 경찰간의 협조가 상대적으로 원만하게 이뤄지기도 하지만 상당수 지역에선 공조가 미비한 편입니다. 특히 방화 등의 화재 사건 현장에서는 수사기관이 강한 통제권을 행사하기 마련이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앞서 그래프에서 본 대로 방화비율이 특히 많이 떨어지기 시작한 2007년에서 2012년에 이르는 시기엔 많은 인명 피해가 난 대형 화재를 합동 조사하는 과정에서 소방과 경찰 간에 화재 원인을 두고 크게 의견이 엇갈린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2008년 용인 고시원 화재처럼 소방당국은 방화의심 사건으로 판정했는데, 경찰은 다른 요인을 화재 원인으로 찾은 경우입니다.

한 소방 당국자는 경찰의 과학수사인력이 증가하고 소방과 경찰 간의 합동조사가 많아지면서, 경찰의 입장을 의식해 소방조사관이 방화 판정에 더 소극적으로 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합니다.

경찰은 경찰대로 할 말이 있었습니다. 확실한 물증이 있어야 범인을 검거하는 수사 당국 입장에서는 방화 사건을 규정하고 검거하는 데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방화가 일부 의심되는 화재 사건을 내사 종결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범인을 안 잡는 게 아니라, 못 잡는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소방이나 경찰이나, 화재 조사관과 수사 담당자의 역량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재조사관의 평균적인 능력이 과거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입니다. 조사자 입장에서 화재가 방화사건으로 규정되는 순간 사건이 마무리되지 않고 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부담스러워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①사라진 방화...화재 조사의 수수께끼

소방 통계상 2007년부터 2017년까지 국내에서 일어난 총 화재는 4십 8만 8천여 건.

이 중에서 소방 화재조사에서 방화나 방화의심 사건으로 분류된 화재는 2만3천여 건이며, 이로 인한 사망자는 803명, 2,36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기자의 취재와 분석 내용에 비춰보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방화 사건과 그 피해가 발생했지만, 화재의 실체가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화재 조사 체계에서 소방 당국의 역할은 전체 그림의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더 막강한 권한을 지닌 수사당국의 화재 수사 실태에 대한 구체적인 내역이 알려진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경찰의 세부적인 범죄 데이터가 외부엔 거의 공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은 방송 혹은 디지털 콘텐츠를 통한 후속 기사에서 국내 방화수사의 특징을 해부하고 그 개선점에 대해서도 다룰 예정입니다. ‘사라진 방화’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기자의 추적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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