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알아보라고 화려한 중절모 썼어"

"나 알아보라고 화려한 중절모 썼어"

2018.08.21. 오후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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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묵 /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 김석향 /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김주환 /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

[앵커]
어제 60여 년 만에 만난 이산가족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오늘 이산가족 상봉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세 분과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문성묵 한국 국가전략 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 김석향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김주환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와 함께하겠습니다. 세 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희가 이렇게 세 분을 모셨는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세 분 모두 실향민 2세시라고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교수님도 이번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 보니까 소감이 남다르실 것 같아요.

[인터뷰]
부럽죠, 일단. 첫 번째는 굉장히 부럽고 우리 아버지한테도 저런 기회가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여전히 있고요. 또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100명씩. 100명을 선정을 했는데도 100명이 다 못 갔잖아요.

우리 쪽에서 89명이 가고 북쪽에서는 지금 83명인가가 내려오는 거로 알고 있거든요. 그 빈자리가 너무 아까운 거예요, 저는. 그러니까 89명이, 원래 93명이 가시기로 했는데 그나마 네 분이 건강이 좋지 않아서 특히 그중에 80대 할아버지 한 분은 맹인이신데 같이 동행할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고 그러니까 너무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누구라도 가지, 누구라도 모시고 가지, 그런 생각이 있어서 일단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굉장히 답답해하면서 계속 보고 있습니다.

[앵커]
여러 감정이 교차하실 것 같은데 센터장님께서도 그러면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할 때마다 보시면서 좀 감정이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인터뷰]
그럼요. 저는 제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는데 제가 생전에 계실 때 아버지도 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시죠, 그랬더니 나는 안 한다. 신청을 해도 만날지 안 만날지도 모르고 한번 만나면 그만인데 안 하겠다, 차라리.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데 사실 저도 남북군사회담 대표로 북한에 많이 방문을 했지만 아버님 고향은 가보지 못했거든요, 평안북도 철산이신데 가보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아마 아버님 형제분이 9남매인데 그중에 4형제분만 넘어오고 5남매는 이북에 남아 계시는데 제 삼촌이나 고모들이 있을 것이고 사촌들이 아마 살고 있지만 어디에 누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제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산가족 상봉 문제 이런 것들이 나올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고 정말 가슴이 찡하고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앵커]
지금 금강산 호텔에서 오늘 또 단체상봉이 진행되지 않습니까? 오후 3시부터 진행이 됐는데 그 현장 화면이 지금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5시까지 하고 있죠. 단체 상봉인데 오늘만 지나면 17시가 5시가 되면 이제 오늘은 더 만남이 없어요. 그리고 내일 오전 아침과 같이 작별상봉이 있어서 기약 없는 헤어짐인데. 지금 이금섬 할머니 아들을 만난 거죠. 바로 알아봤다고 그러죠. 그런데 아들이 일흔이 넘었고요.

그리고 다른 몇 달만 갔다 오겠다라고 했죠. 피난을 몇 달만 갔다 오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사실은 저런 분들이 오늘 탈북자 외에 상봉을 못 했던 분들도 저보다 더 한 사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접경지역이 고향인데 일주일만 20살 된 시동생이 18살된 형수를 데리고 전쟁 나던 해에 겨울에 형이 결혼을 해서 속초에 내려와서 사는데 18살 된 형수가 평생 재가를 안 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20살 된 시동생은 큰엄마라고 그래서 평생 모시고 살았어요.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이 굉장히 많죠.

[앵커]
지금 현장에서 이금섬 할머니 가족들의 상봉 모습을 보고 계신데 아들과 손자며느리를 만났습니다. 전쟁 때 피난길에 올랐다가 헤어지게 된 그런 사연을 안고 있는 가족이었습니다.

사실 표정을 보면 어제에 비해서 조금 더 편해 보이기도 하고요. 약간 분위기도 좀 더 부드러워진 것 같은데요.

[인터뷰]
그렇죠. 어제는 눈물바다가 많이 이루어졌죠. 처음으로 정말 6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피붙이를 만나고. 이번에 만난 이 인원들 중에 실제 부모, 자녀 관계는 7가족밖에 없다고 하죠. 그만큼 고령이기 때문에 그런 관계가 앞으로 또 있다면 아마 훨씬 더 줄어들 가능성이 많은데.

어쨌든 어제 분위기는 이제 첫 만남으로서 정말 눈물바다를 이루고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고 그런 시간으로 주로 보냈다면 오늘은 사실 비교적 만남의 시간도 길었고 아마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특히 개별 상봉, 방에서 만났을 때는 누가 보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이제 속에 있는 이야기들, 남 앞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들, 그런 것들을 나누고 그리고 오늘 다시 이 자리로 나왔기 때문에 어제보다는 한결 차분한 그런 모습이고 한편으로는 저분들은 이제 시간이 안 갔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생각이 있으실 거예요.

[앵커]
지금 현장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뷰]
이렇게 넓은 자리에서 만나면 시끄럽고 정신이 없으니까 물어보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물어보고 그냥 서로 흥분기가 있어서 차분하지 않은데 집 안에서 조용하게 만나니까 차분하게 물어볼 것 물어보고 이렇게 서로 차분하게 소통이 되더라고요.

[기자]
안 그래도 저 깜짝 놀랐던 게 어머님이 오늘 펄펄 걸어다니시더라고요. 어떠셨어요?

[인터뷰]
아니, 갑자기 사람이 기분에 따라서 몸이 좋아지고 나빠지고 하나 봐요. 아들을 만나고 나니까 피곤한 것도 모르시고 지금 계속 저도 피곤하거든요. 피곤해서 저도 버스에서 졸았는데 그런 것도 모르시고 활력이 나는 것 같아요.

[기자]
어떠세요, 이모님은 이번에 오빠를 만난 건데. 어떠세요? 또 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아요, 어머님이랑.

[인터뷰]
이제 오빠랑 얘기를 해 보니까 오빠가 참 순진하고 착해요. 그런데 오빠네 아빠의 식구들이 순진하고 착하대요. 부인이. 엄마도 엄청나게 사랑하셨었대요.

그래서 오빠도 그런 성품을 타고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성품을 보니까 인간적으로 참 좋아 보이더라고요.

[앵커]
이금섬 할머니 가족입니다. 아들을 만난 그런 사연이죠.

[기자]
이금섬 할머니가 갓난아이를 딸아이를 업고 혼자 피난을 하러 다닐 때 그 갓난 여자아이가 지금 저렇게 노인이 됐죠.

[앵커]
그러니까 북에 오빠와 남한의 동생이 만난 그런 상황이었네요. 지금 이제 따님 되시는 분의 인터뷰를 봤던 상황이고요. 개별 상봉이라는 게 사실 호텔방에서 가족들끼리 만나는 그런 순서인 거죠?

[인터뷰]
그럼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른 것이 개별상봉을 하고 점심을 그 자리에서 같이 도시락으로 했다는 거예요.

그것이 이번에 추가되고 새롭게 시작된 것인데 그러니까 그만큼 개별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늘려줌으로써 보다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줬다고 하는 점, 그것이 이번에 돋보이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
또 하나 이번에 차이가 뭐냐 하면 출입할 때 출입 신원확인을 과거에는 다 일일이 내려서 다 한 명, 한 명 확인했는데 그래서 한 2시간 반이 걸렸는데 이번에 1시간 반.

그래서 박경서 대학적십자사총재가 이 부분으로 높게 평가했고 실제 고령이니까 버스 탑승한 채로 이 차에 누구누구 탔다 이렇게 하면 북측에서 그냥 그걸 믿고 통과시켜주는 그런 굉장히 간소화되고 빠른 절차들이 이루어졌다고 그럽니다.

[앵커]
저희가 송출된 화면을 바로 바로 전해드리기 때문에 화면상 고르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점 시청자 여러분들의 넓은 이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서 인터뷰를 잠깐 보셨는데 단체상봉을 할 때는 아무래도 좀 많은 분들이 모여 계시고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데 개별 상봉은 방 안에서 가족들끼리만 딱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았습니까?

[인터뷰]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그 순간을. 이게 생각해 보니까 이게 21번째 행사더라고요. 이산가족 상봉.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그 두 가지가 새롭게 21번째부터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어서 요구하거나 타협을 하면 되는구나.

그러니까 안 될 거라고 생각해서 우리가 그런 일이 되겠어라고 생각해서 엄두를 못 냈던 일들이 이번에 된 것이 휠체어 타신 분들이 일일이 다 내려야 된다고 저쪽에서 요구를 하고 신원을 다 일일이 확인을 하고 그렇게 했는데 이번에는 그냥 버스에 탄 채로 누가 탔다고 하면 그걸 받아들인 거잖아요.

이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있구나. 그러니까 저희가 너무 안 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아예 요구도 안 해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게 21번째 행사인 만큼 이 횟수가 좀 더 앞으로 잦아지면서 예전과 달리 가족들한테 조금 더 시간을 많이 주고 조금 더 어르신들을 편하게 모실 수 있는 방법을 우리가 생각해보고 요구도 해 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앵커]
지금 민병현 할아버지 가족도 상봉하는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기자]
여동생이죠. 북에 있는 여동생 그리고 조카.

[앵커]
지금 황해도 연안읍 시가전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고요. 당시에 17세여서 북한 당국이 군에 데려가려고 했다. 다시 피난 나왔다가 동생들과 영영 헤어지게 됐다는 사연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자]
사실은 이제 우리 서해 NLL 북쪽에 혜주 그쪽인 이번에 이산가족 상봉자의 전언에 따르면 두 달 간격으로 국군이 들어오고 인민군이 들어왔다라고 굉장히 격전이었죠. 그 와중에서 헤어졌고 용매도라는 섬에 산 사람들은 북한 전쟁 전에는 그냥 대한민국 땅이었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헤어졌다라는 그런 사연도 있었습니다.

[앵커]
지금 김병오 할아버지 가족인데요. 여동생과 조카손자를 만난 가족입니다. 들어볼까요?

[인터뷰 : 예쁘지? 예쁘대.]
[인터뷰 : 우리 여동생. 70년 된.]

[기자]
닮으셨어요.

[앵커]
우리 여동생 만나는 데 70년 걸렸다고.

[기자]
70년 걸렸다라고 하면 김병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이전에 월남했을 가능성이 햇수로만 따지면 그렇게 했는데 좀 안타깝죠, 여동생 외모상 더 연로해 보이시는데.

[앵커]
가족과 헤어져서 보냈던 그 어려운 시절이 남아있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개별상봉을 오늘 이제 점심 때 마치고 이제 다시 전체상봉, 단체 상봉을 하는 그런 상황인데요.

개별 상봉이 이전에는 언론에도 다 공개가 되고 그런 상황이지 않았습니까? 이전과 이번이 다른 점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인터뷰]
그러니까 개별상봉 이번 같은 경우는 아마 일체 취재를 허용하지 않고요. 정말 아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가족들만의 오붓한 시간이 보장될 수 있는 그런 상봉이 될 수 있도록 배려가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여건도 보장해 주고 시간도 늘려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산가족들이 전체적으로 환영만찬이라든지 단체상봉 이런 것들은 주위가 어수선하고 또 보는 눈들도 있고 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얘기를 충분히 하기도 어렵고 또 대개 연로하신 분들이니까 보청기를 끼고 계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여러 사람 있을 때는 이야기들을 소통하기 어려운데 개별적으로 있으면 큰 소리로 얘기할 수 있고 정확히 들을 수 있고 아마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남북 간의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된 협의과정에서 과거에 있었던 그런 부분들을 좀 개선하고 이산가족들의 편의를 보장하고 실제 의미를 높일 수 있는 그런 방안들이 이번에 강구가 된 것 같은데 아까 김석향 교수님 말씀대로 앞으로 또 이런 일들이 물론 자주 있어야 되고 수시로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대통령께서도 말씀하셨고 통일부 장관도 정말 정례화, 상시화 이런 것들을 협상해 나가겠다고 그랬는데 이번 경우를 보면 이번에도 북측이 자랑하는 거는 김정은 위원장이 정말 신경을 써서 이번에 배려한 것이다라고 했다면 앞으로도 김정은 위원장이 결단한다면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란 말이죠. 그런 차원에서 이것이 잘 좀 앞으로 더 발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저희가 단체상봉 시작할 때 장면을 계속 들어오는 대로 실시간으로 보여드리고 있는데 지금 손에 다들 봉지를 하아나씩 들고 있네요.

[기자]
그렇죠. 다과인데 음료수도 있고 물도 있고 젤리도 있고 그런데 봉투가 다 동일하죠. 북측 당국에서 북한 당국에서 준비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외금강호텔로 갈 때 북측 가족들 손 안에 하나씩 들려줘서 다과를 나눌 수 있도록 그렇게 준비하는 거죠.

[앵커]
오늘 이 단체상봉이 끝나고 나면 일단 오늘 일정은 끝입니다. 일단 저녁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 걸로 되어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기자]
사실은 특별한 게 지금까지 21번의 프로그램이 거의 같은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24일부터 21번째 만남 중에 1차, 2차 하는데 24일부터는 남측이 고향이었다가 북으로 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북으로 간 사람들이 만나죠.

그러니까 이번에는 지금 경우는 북측이 고향이 사람들이 만나는 거고.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그대로 24일부터는 우리 측이 제공하는 형식. 도시락도 하되 메뉴는 우리 측이 정하고 지금 오늘까지의 과정은 메뉴고 이런 거는 다 북측이 제공하는 거고 그런 형태로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남북이 접촉을 하다 보니까 가장 저것이 용이했고 편리하다라고 해서 지금까지 이런 프로그램으로 한 거지 이번 경우만 특별히 했다라는 건 아니라는 거죠.

[앵커]
지금 저희가 단체상봉 그 장면을 계속 보여드리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을까, 저녁도 같이 하고 싶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인터뷰]
맞아요. 저는 오전에 같이 만나서 개별상봉을 하고 따로 점심을 하러 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호텔 방 안에서 도시락으로 같이 점심을 하느라고 만나는 시간을 한 시간을 연장을 해줬다 하는 얘기를 듣고 일면 반가운데 왜냐하면 그건 만나는 시간이 늘었고 그래도 조용한 환경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늘었으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또 이게 왜 이렇게 찔끔찔끔.

1시간이 늘었다는 게 물론 안 는 것보다는 훨씬 반갑기는 하지만 왜 1시간이야, 이런 생각이 또 들기도 하고. 저는 사실은 벌써부터 내일 헤어지는 게 걱정이거든요.

어떻게 헤어지실까. 그리고 버스 떠날 때 그렇게 뛰어가면서, 그러니까 손 안 놓으려고 하는 그런 장면들이 내일도 또 있을 것 같아서 벌써부터 좀 걱정이긴 합니다.

[기자]
그래서 이버에 버스가 14대가 금강산으로 향했지만 워낙 고령인 분들이 많다 보니까 저희가 응급차도 5대가 같이 가서 상주해 있고 의료진도 많이 확충됐다 그럽니다.

[앵커]
지금 현장에서 계속 만나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 보고 계신데 어떤 얘기를 나눌지 들어보겠습니다.

[기자 : 그러면 어렸을 때 큰누나에 대한 기억이 좀 있으셨어요? 첫째세요?]
[인터뷰 : 큰누나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고 딱 예전부터 아주 미인이었어요. 아주 온화하고 미인인 것으로 기억을 했는데 나이가 들고 또 90대가 넘어가니까 골격만 남으신 것 같아요. 골격만 남아서 이렇게... 우리 어머님 돌아가실 때처럼 아주 모습이 그래요.]
[기자 : 그때 화롯가에서 보시던 모습이 몇 살 때세요?]
[인터뷰 : 5살 때. 나는 부모를 따라서 내려온 거야, 전쟁 날 때. 6.25전쟁 2년 전, 6.25 나기 2년 전에 내려왔어.]
[기자 : 형제가 몇 남 몇 녀세요?]
[인터뷰 : 6녀 2남인데 내가 마지막이지.]
[기자 : 막내시고. 그러면 어머니, 누나. 첫 번째 큰누나시고?]
[인터뷰 : 둘째누나예요. 그다음에 이제 셋째가 돌아가셨고 그다음에 넷째...]
[기자 : 넷째, 형제 중에는 둘째시고 넷째시고.]
[인터뷰 :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저 누님하고 형제 세 사람만 넘어왔어.]
[기자 : 6녀 2남이니까 8명 중에 다섯은 북측에 남고?]
[인터뷰 : 그러니까 그분들이 다 돌아가셨대.]
[기자 : 일곱째 형제분도 돌아가신 거예요?]
[인터뷰 : 다 돌아가셨어. 내가 제일 마지막에. 그래서 세상에나. 이럴 수가 있나. 다 만나보고 싶어 했는데 다 돌아가셨어.]
[기자 : 안타까우셨겠어요. 오늘고 북측 음식은 입에 맞으셨어요?]
[인터뷰 : 다 먹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도시락이 아주 양이 많더라고요.]
[기자 : 그래서 음식에 대한 북한 이야기도 좀 들으셨어요?]
[인터뷰 : 음식 이야기? 음식 이야기는 별로 안 했어요.]
[기자 : 별로 안 하고. 어릴 적의 기억을 좀 맞춰보시니까.]
[인터뷰 : 세상에. 나는 처음 듣는 얘기를 다 아시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기자 : 그래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우셨죠?]
[인터뷰 : 보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세상이 바빠가지고 그런 옛말 듣기 참 어려웠는데 그런 시간...]

[앵커]
6녀 2남인데 막내가 둘째 누나를 만났습니다. 어릴 때 기억을 더듬으면서 지금 인터뷰를 하셨거든요.

[기자]
이산가족 상봉 취재 경험이 몇 차례 있는데 기자로서 아쉬운 게 뭐냐하면 지금까지 인터뷰가 북쪽 가족들이 인터뷰를 단 한 분도 응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런 부분이 조금 속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이 부분이 기자로서는 좀 아쉽고 그러니까 육성으로 지금 북측 가족들이 남측 가족들을 만났던 그런 구구절절한 이야기 좀 듣고 싶었는데.

[앵커]
지금 화면으로 보고 계신 분이 김종삼 할아버지십니다. 김종태 할아버지와 김종삼 할아버지가 형제신데 북측에 있는 큰형을 찾다가 이번에 형수와 조카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런데 모자가 참 눈에 띄지 않습니까? 멀리서도 가족들이 알아보라고 저런 모자를...

[기자]
그렇게 했다 그러죠. 일부러 화려한 걸 썼다고 합니다.

[앵커]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앞서 인터뷰에서도 나왔는데 어릴적 큰누나에 대한 기억에 대한 답변을 하셨고요. 그게 5살 때 기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백발이 되어서야 얼굴을 마주하게 됐어요.

[인터뷰]
그렇죠. 68년 혹은 65년 만이니까 저런 그림이 나오는 게, 그러니까 이 젊은 사람들 중에 이산가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러면 맨날 울기만 해요,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학생들한테 제가 가끔 물어보는 게 오늘부터 65년 만에 만났다고 생각해 봐 그래요.

[앵커]
김종삼 할아버지, 김종태 할아버지 형제가 북한에 있는 형수를 만났습니다. 얘기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뷰 : 이렇게 만나니까 얼마나 반갑습니까?]
[인터뷰 : 하여간 또 만나야 돼요, 오래 사셔서.]

[앵커]
경기도 파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17살이던 큰형 김영태 씨가 인민군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이후에 부모님과 8남매가 월남을 했고요. 연락이 끊겼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형수와 조카를 만나고 있습니다.

[인터뷰 : 그러니까 모든 게 다 맞아. 우리가 생각했던 생일이 우리 형이 6월 11일인데 그런데 우리 조카더러 또 물어봤어. 아버지 생일이 언제나 그랬더니 6월 11일이래. 그러니까 더 맞을 수가 없지. 그리고 우리 형이 인민군을 나갔거든요, 인민군. 인민군 나갔는데 그러니까 우리 형이 내가 병과를 알아. 통신병과를 받아가지고 중국으로 통신교육을 받으러 간다고 연락을 받았어요. 받았는데 받고서는 얼마 안 있다가 우리는 피난 나왔지. 그랬는데 아버지 병과가 뭐냐 그랬는데 통신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안 맞을 수가 없지. 그러니까 아니라고 그래도 우리 조카야.]

[앵커]
지금 말씀하시는 분은 김종삼 할아버지신데 김종태 할아버지와 같이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하셨습니다.

[인터뷰 : 모습이 똑같아.]
[기자 : 조카분하고?]
[인터뷰 : 네, 그냥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 그런데 속초에서도 얘기했잖아요. 우리 진짜 우리 조카인가, 아니면 어떡하나. 그걸 걱정을 했는데 와서 보니까 우리 형 만난 것보다 더 반가워요.]
[기자 : 이산가족을 영어로 표현할 때 세퍼레이티드 패밀리라고 그래요. 이게 나눠져 있는 가족이라는 뜻이거든요. 굉장히 집산의 반대말이 이산인데 안타깝죠.]
[인터뷰 : 우리 삼촌이 물어보는 말이 우리 아버지가 여기 혹 있어.]

[앵커]
머리에 혹 있는 걸 가지고 알아봤다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요.

[기자]
그랬죠. 그래서 과거에는 다리 어느 쪽에 점이 있지 않느냐. 그래서 2015년도에는 그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내 자식이 맞다. 이런 절절한 사연도 있었죠.

[앵커]
조금 전에 김종찬 할아버지 같은 경우에도 조카와 큰형에 대한 얘기를 나눴는데 큰형의 병과가 통신이었던 거를 조카도 알고 있더라, 그러면서 조카가 맞다, 이런 얘기를 한 거였거든요.

[인터뷰]
그렇죠. 아버지의 생일, 형님의 생일을 조카가 정확하게 일치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카를 만났고 형님 만난 거 이상으로 반갑다 이런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그나마 다행입니다. 저분이 계속 그러니까 부모와 자녀 간에 얘기를 많이 하셨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병과도 알고 이런 거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 다행인데 모든 부모와 자녀가 저렇게 다 얘기를 다 나눈 것도 아닐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안타깝기는 합니다.

저런 걸 만약에 몰랐으면 어떻게 되지 하는 생각이, 그런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기자]
지금 더더욱 아쉬운 거는 우리 적십자사 이산가족 등록해서 살아계신 분이 한 5만여 분밖에. 그러니까 지금 이 시스템을 바꿔야 된다라는 것이 지금 앞서 문성묵 박사께서도 북에 사촌이 있을 건데 누군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실향민 2세들도 등록을 하게끔 해서 하고 북측에서도 그런 노력을 해서 나중에 언젠가는 통일이 돼서 내 가족이 있구나라는 걸 알아야지. 지금 1세대들이 이런 시스템으로 하면 다 돌아가시면 이런 이산가족 상봉 행사 흔적이 없어지는 것이죠. 실제 그런 부분도 남과 북 당국이 병행해야 된다고 봅니다.

[앵커]
너무나도 인원은 많은데 기회의 폭은 좁다 보니까 안타까움을 더할 수밖에 없는데. 좀더 빨리 좀더 많은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까?

[인터뷰]
그럼요. 그러니까 지난번에 4.27 판문점 선언에서 이산가족 상봉 합의를 했고 그 합의의 이행이란 말이죠. 그런데 적십자회담이 열려서 이제 본격적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나간다는 것도 합의를 했어요.

그러니까 근본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서로 살아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확인을 하고 서신도 좀 교환할 수 있고 말하자면 오늘 만나고 헤어지면 그다음에 기약이 없단 말이죠. 그러면 헤어지고 나서도 서로 뭔가 연락할 수 있는 서신도 교환하고 요즘은 얼마나 인터넷 수단들이 있는데 북한의 내부에 어려움이 있어서 그럴 거예요.

[앵커]
지금 현장 화면을 보고 계신데요. 얘기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뷰 : 이거 받은 거야. 여기서 주는 거예요, 여기서.]
[기자 : 보니까 뭐가 있어요? 설명 좀 해 주세요.]
[인터뷰 : 2살 때 헤어진 누나와 남동생이죠.]
[인터뷰 : 케이크 같은데. 이거는 뭐지?]

[앵커]
하나뿐인 남동생과 만난 누나입니다. 김혜자 할머니고요. 동생과 조카를 만났습니다.

[인터뷰 : 사탕하고 그런 것들이네요. 이거는 뭐지? 이거는 뭐지? 나 안 보던 거라 잘 모르겠네. 커피.]

[앵커]
저희가 얘기했던 봉지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기자]
일괄적으로 당국에서 줘서 남측 가족들한테 이야기를 나눌 때.

[기자 : 거의 절반의 시간을 같이 보내셨어요. 소감이 어떠시고 남은 하루는 좀 어떻게 보내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인터뷰 : 정말 좀 아쉬워요. 이게 잠깐잠깐 만나는 것보다 그냥 2박 3일 동안에 같이 함께 있게끔 앞으로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기자 : 동생한테 사랑한다고 표현 좀 해 주세요.]
[인터뷰 : 사랑해.]

[앵커]
해방 당시에 만주에 살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쫓아올까 봐 가족들과 이남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남동생을 업고 먼 외가집으로 갔다가 헤어지게 됐다는 얘기였습니다. 배순희 할머니 가족인데요. 언니와 여동생을 만났습니다.

[기자 : 우리 쪽에 있는 음식이랑 비슷한 게 있을까요? 무슨 맛일지 제가 상상이 안 가서.]
[인터뷰 : 이쪽 맛하고 저쪽 맛하고?]
[기자 : 우리 쪽에 쌀과자 있는 거?]
[인터뷰 : 비슷해.]

[앵커]
드시고 있는 과자 맛이 어떤지 물어봤네요.

[기자 : 다른 것도 좀 드셔보셨어요, 이거 말고?]
[인터뷰 : 다른 거 어떤 거?]
[기자 : 다른 거. 여기 뭐 마실 것도 있고 한데.]
[인터뷰 : 사이다 맛도 그렇고 다 비슷한 것 같아요.]
[기자 : 좀 뭐지, 아까 개별상봉도 하시고 도시락도 같이 먹고 하셨는데 여기 또 와서 혹시 말씀 나누신 거 있으세요?]
[인터뷰 : 그래도 못다 한 얘기도 더 나눌 수가 있고 또 이렇게 생각하면 새록새록 생각이 나잖아요. 73년 동안을 못다 한 얘기들이 많으니까 못다 한 얘기 이제 나누고 한 얘기도 또 하고 싶고 그렇죠, 뭐.]

[앵커]
얘기가 끝이 없을 것 같아요.

[기자]
과거 1960년도 중반에 북한의 계관시인이죠, 오영재 시인이 어머니 늙지 마시라. 어머니 몫까지 내 한 해에 두살씩 먹으리 해서 서울에 와서 눈물바다로 만들었죠. 오영재 시인의 통일의 그날까지 그 시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1절 경축사에서 인용하기도 했었습니다.

[앵커]
오늘 개별상봉할 때 어떤 선물을 주고받는지 이것도 참 궁금했는데 백두산 들쭉술, 평양술 이런 술들을 북쪽에서 준비했던 것으로 보이더라고요.

[인터뷰]
북한에 가면 받아오는 게 술하고 담배예요. 북한 술하고 북한 담배. 저게 딱히 이산가족 만날 때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대표단으로 가거나 아니면 협상을 하러 가거나 남쪽에서 일꾼들이 가면 북한에 가서 받아오는 게 다 술하고 담배.

그런데 또 우리 쪽에서도 주로 남자분들이 가셨잖아요. 그래서 남쪽에서도 가져갈 때 술하고 담배를 가져가서 북쪽 술하고 담배하고 바꿔오는 거를 주로 했던 것 같고요. 여자들이 조금 보장성원들한테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조금 선물이, 그러니까 남쪽에서 가져가는 선물이 좀 다양해졌어요.

[앵커]
식탁보를 북측에서 준비했다고 하던데.

[기자]
우리가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이 수예라고 하죠. 만경대 창작사라든가 평양에 가면 그런 데 수예 놓는 일종의 작품이죠. 인쇄를 한 것이 아니고 수를 뜬 비단 보자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앵커]
지금 보시는 화면은 민병현 할아버지께서 여동생을 만나고 계신 모습을 함께 보고 계십니다. 여동생과 조카가 함께 왔다고 하는데요. 황해도 연안읍 시가전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당시에 17살이었는데 북한 당국이 군에 데려가려고 했다. 피난 나왔다가 동생들과 영영 헤어지게 됐다는 사연도 안고 있었습니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서 북측이 이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더라, 이런 얘기들을 저희가 좀 전해드렸는데 이번에 얘기를 보면 보장성원들과의 대화 내용도, 기자들과의 대화내용도 언론에 소개가 되더라고요.

[기자]
소개된 것 중에 가장 관심 있었던 것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북한이 매체를 통해서 북한 식당 여종업원들 탈북문제로 이산가족과 연계시키지 않겠느냐라는 우려가 있었는데 보장성원 얘기 중에 그거 조용히 지나가지, 그런 얘기 하지 말자. 오히려, 그랬다는 대화록이 눈에 띄죠.

[앵커]
김병오 할아버지 가족인데요.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뷰 : 우리 여동생. 70년 됐어.]
[기자 : 닮으셨어요.]

[앵커]
오빠가 동생에게 70년 만에 과자를 입 안에.

[기자]
아마 연세로 봐서는 10대 중반대까지 기억이 있었던 거겠죠.

[앵커]
함께한 날보다 함께하지 못한 날들이 월등히 많은 거잖아요.

[인터뷰]
그럼요.

[앵커]
얼마나 반갑고 슬펐을까요. 보장성원들과 나눴던 대화 내용에 대해서 저희가 잠깐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금강산 관광은 언제쯤 재개될 것 같냐, 이런 질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논의할 그런 단계는 아닌 상황인가요? 어떻습니까?

[인터뷰]
갈 길이 멀죠. 금강산 관광을 다시 재개를 하려면 거쳐야 될 단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금강산 관광을 그냥 다시 하기로 하자, 이렇게 한다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일단 무엇보다 북핵 문제에 대해서 북한이 어떤 입장을 명확하게 내놓지 않는 한 금강산관광 재개하자라는 얘기를 불쑥 꺼내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해서 지금 이 문제를 단계를 거치지 않고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거죠. 만약에 그냥 그런 식으로 하겠다고 하면 지금 세계적으로 사실은 북핵 문제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게 돼버렸거든요.

그전에는 확실히 북한 핵이 우리 머리 위에 있다고 생각해서 한국의 문제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북한이 투발수단이죠. 미사일 개발을 굉장히 노력을 했고 북한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의 위력이 달라졌잖아요.

그러니까 2017년부터는 확실히 이게 국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단계를 거치지 않고 그냥 바로 재개할 수는 없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인터뷰]
결국 지금 보장성원들이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사실 이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없거든요. 결국 북한 당국의 어떤 지침이라는 게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과거와 달라진 분위기라는 거거든요.

과거에는 이런 대화를 서로 하지 못하도록 당국에서 통제를 하면 그런 대화, 질문이나. 질문을 하지도 못할 것이고 우리가 질문을 해도 답변하지 않을 텐데 이번 같은 경우는 북측이 다가와서 날씨 얘기도 하고 심지어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도 물어보고.

말씀하시 대로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라든지 기타 이런 문제를 얘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북한당국에서 어떤 대화의 여건,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주었다는 점. 그리고 필요하다면 이러이러한 것들을 한번 확인해봐라라고 하는 그런 지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있다고 보는데 말씀하신 대로 북한의 관심은 최근에 일련 북한 매체에서 얘기했듯이 지금 북측은 이렇게 이산가족 상봉이라든지 남북관계에 있어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는데 남측은 돈 안 드는 일만 하려고 그런다.

그리고 미국이라고 대국, 상전 눈치만 보면서 실제 제대로 된 일을 안 하고 있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거든요. 아마 문재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개성공단 얘기도 하고 금강산 관광 얘기도 했습니다. 이건 아마 북한의 입장을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리고 북한의 비핵화를 강조했습니다.

[앵커]
이제 5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금강산호텔에서 단체상봉이 마무리될 시간인데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현장에서 화면 또 추가로 들어오는 대로 저희가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 나누겠습니다. 세 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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