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남 별세...70년대 풍미 희극인은?

남성남 별세...70년대 풍미 희극인은?

2015.09.01. 오후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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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무, 원로 코미디언

[앵커]
1970년대 대한민국이 급성장 했었던 시대였고 애환이 참 많았던. 그래서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또 즐겁게 만들었었던 희극인들을 저희들이 오늘 추억해 보기 위해서 한무 선생님을 초대했습니다. 만나보고 얘기 들어보겠습니다. 남성남 선생님이 가셨다는 그 소식 듣고 심경이 착잡하셨죠?

[인터뷰]
남달리 나하고 친했거든요. 며칠 전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내가 문안 전화를 해요. 전화를 하니까 강원도를 간다고 그래요. 그래서 뭐 타고 가냐고 했더니 그 나이에도 본인이 꼭 운전을 해요.

조심하라고 그랬더니 야, 너나 조심해라, 그렇게 했는데 어제 그냥 가까우니까 제일 먼저 전화가 왔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나. 그래서 전화 받고 다른 사람들, 선배들도 다 세상을 떠났을 때는 내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삭제하잖아요.

그런데 이 형은 남달리 가까워서 삭제하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볼 수도 없고 또 통화도 할 수 없고 그래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냥 어제 삭제를 하는데도 굉장히 내가 가슴이 아팠어요.

[앵커]
그러니까 한 선생님보다는 10년 정도 연배가 더 위고 윗세대인 선배님들인 거죠. 선생님이 기억하시는 남성남 선생님, 남철 선생님이 콤비였지 않습니까?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선생님 기억 속에?

[인터뷰]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거든요. 아는데 남성남, 남철 두 콤비는, 남철 형이 좀더 성격이 까다로워요.

[앵커]
그렇게 생기셨습니다.

[인터뷰]
그렇죠? 남 줄 줄도 모르고 받는 것도 싫어하고 식사하러 가라고 하면 나는 괜찮아, 나는 다른 거 먹을래 그러고 성남이 형은 조금 유해요. 술, 담배도 안 하는데 잘 어울리거든요.

그런데 성남이 형은 그런대로 넘어가는데 남철이 형은 성격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후배들이 나는 내가 소개하면 남성남, 남철 콤비라고 소개하거든요. 후배들이 소개하면 남철이 형이 불러요.

야, 왜 남성남, 남철이라고 그래? 남철, 남성남이라고 앞으로는 그렇게 소개해. 이 정도로 까다로워요. 그리고 성남이 형은 식사도 잘 사고 잘 어울리는데 남철이 형은 절대 그런 것 없어요.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두 분이 호흡은 잘 맞아요, 기가 막혀요. 그런데 성격은 안 맞아요. 트러블도 많이 있었어요.

[앵커]
그러셨군요. 평탄했던 게 아니었군요?

[인터뷰]
그리고 싸워서 헤어졌더라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한 사람은 안 불러주잖아요. 꼭 두 사람을 불러야지 쇼가 되니까 그래서 지방 공연을 가더라도 식사를 따로따로 해요.

[앵커]
그럴 때도 있었군요?

[인터뷰]
그럴 때가 아니고 대부분 그래요. 그리고 호텔 방을 하나 주잖아요, 온돌방을. 하나 주면 이렇게 마주보고 자는 법이 없어요. 한무야, 너 가운데서 자라고 하고 꼭 등을 지고 자요. 그렇게 성격이 안 맞았어요. 무대나 방송에서는 호흡이 잘 맞았죠.

[앵커]
남철 선생님이 먼저 가신 다음에 남성남 선생님이 그래도 그때는 싸웠지만 그리워하시고 그러시던가요?

[인터뷰]
그럼요. 눈물도 많이 흘렸고, 성남이 형이 눈물이 많고 인정이 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집안에도 나쁜 일이 있었고 본인한테도 나쁜 일이 왔고 그래서 건강하시고 오래 살 줄 알았는데 느닷 없이 세상을 떠났다고 그러니까 안됐죠.

[앵커]
그리고 5월달에 같이 남성남 선생님하고 콘서트해서 같이 공연을 하셨었다면서요?

[인터뷰]
네, 같이 했는데 그때는 콤비가 없으니까 노래를 또 곧잘해요. 그런데 코미디언들이 다 노래를 잘하더라고요. 그런데 노래만 한 서너 곡 하더라고요. 그리고 혼자서 우스운 얘기도 하고.

우리가 공연 다녀보면 웃음을 주는 편인데 나는 그렇게 얘기를 해요, 구경오신 분들한테. 웃기는 사람보다 웃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나는 그래요. 왜냐하면 지금 코미디언들 지금은 덜하지만 옛날 분들은 뒤를 돌아서면 자식 생각, 가족 생각 모든 게 다 고민이 많았어요.

[앵커]
국민들을 즐겁게 해 주고 웃게 해 주지만 어떻게 보면 즐거워 하는 국민들의 애환, 슬픔까지도 다 짊어지고 본인 가족들의 사정까지도 짊어지고 그렇게 살아가신 거군요, 희극인들이.

[인터뷰]
그럼요.

[앵커]
저도 어릴 때 코미디프로그램, TV에서 보던 여기에도 있는 배삼룡 선생님, 구봉서 선생님, 이기동 선생님. 이분들이 다 저도 기억이 나거든요. 70년대에 선생님이 기억하시는, 지금 말씀하신 두 분 말고 대표적인 분들이 어떤 분들이었나요.

희극인들이요? 70년대를 대표하는 분들이.

[인터뷰]
그때는 배삼룡 선배하고 구봉서 선배가 나이가 한 살 차이인데 친구로 지냈어요. 구봉서 선배하고 그리고 제일 위시고. 그때는 왔다 갔다 겹치기 출연 못 했잖아요. MBC면 MBC, KBS, TBC면 TBC. 전속이 돼서 그 방송에만 출연을 했어야 돼요.

그래서 구봉서 선배, 배삼룡 선배, 서영춘 선배, 남성남, 남철 선배, 이대성 선배. 그런 사람들이 다 MBC 출신들이잖아요.

[앵커]
배삼룡 선생님 모습인데 특이한 춤 있지 않습니까? 뭐라고 하나요, 저 춤을?

[인터뷰]
배삼룡 선배가 추던 이런 게 있어요. 게다리춤이라고 하는데 남성남, 남철 두 선배가 추는 것은 왔다리 갔다리 춤이라고 그러죠. 무대 뒤에서 말다툼이 있었어요. 그런데 왔다리 갔다리를 하면서 몇 번 왔다갔다하다가 남철 형이 안 돌아서는 장면이 있어요.

그러면 따귀 때리는 거예요. 따귀를 딱 때리면 헛 때리는 거예요. 때리는 척하는데 밑에서 남철 형이 맞는 소리를 내요. 트러블이 있고, 말다툼이 있을 때는 그냥 때려버려요.

[앵커]
그렇군요, 배삼룡 선생님은 어떠셨습니까? 성격이나 성품이 어떠셨습니까.

[인터뷰]
남들하고 어울리지 않더라고요, 잘. 잘 어울리지 않고.

[앵커]
외로우셨겠군요, 저분도.

[인터뷰]
그렇죠. 외롭게 세상을 떠났잖아요. 병원도 우리 후배 코미디언들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예요. 많이 모금운동도 했어요.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특실에 있다가 2인실에 있다가 6인실에 있다가 점점점점 내려갔죠.

내려갔는데 방송에서 얘기하고 그럴 문제는 아닌데 어떤 분이 치료비를 잘 대주셔서 병원에서는 배삼룡 씨 시체를 안 내준다고 그랬죠. 병원비 때문에. 그런데 잘 해결됐어요.

[앵커]
제 기억에는 배삼룡 선생님하고 이기동 선생님하고 라이벌 같은 경쟁관계이기도 하고 두 분이 유명하기도 했는데 이기동 씨는 어땠습니까?

[인터뷰]
이기동 씨도 명랑하고 쾌활하고 좋았어요. 그런데 가수들이나 탤런트도 마찬가지고 코미디언도 서로가 밀어준다, 키운다, 이런 건 없어요. 전부 다 라이벌이에요.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또 크잖아요, 발전이 되고. 그런데 이기동 씨도 한때는 좋았죠.

내가 알기로는 공군 출신인데 사병은 아니고, 장교인데 땅딸이 이기동이라하고 그래서.

[앵커]
땅딸이 이기동, 비실이 배삼룡 그랬었죠?

[인터뷰]
참 아까운 사람들이에요. 유행어도 많이 만들어냈잖아요. 이기동 씨는 닭다리 잡고 삐약삐약,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앵커]
저도 기억이 납니다.

[인터뷰]
그래요? 이기동 씨가 했던 건 괴롭고 싶구나 그런 거였고 또 서영춘 씨는 인천 앞바다 사이다, 이런 게 있었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이런 것도 있었고. 우리 서영춘 선배도 참 외롭게 돌아가셨죠.

[앵커]
지금 아마 젊은 시청자분들께서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시겠지만 아마 그 시대를 겪어온 분들은 들으면서 하나하나 향수에 젖으실 것 같습니다. 지금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이분들이 국민들 참 웃겨주셨는데 본인들은 그런 쓸쓸함들이 있었고, 외로움이 있었고.

[인터뷰]
무대를 떠나면 쓸쓸하고 고민들이 많은 사람들이 코미디언들이 많아요. 젊은 애들은 개그맨, 나이 든 사람은 코미디언. 사실 개념은 다 똑같거든요. 옛날에는 다 고생들하고 그랬잖아요.

[앵커]
알겠습니다. 그래서 구봉서 선생님이 계시고 한분한분 떠나시는데 선생님도 오래 건강하시고요. 저희들 아랫세대들한테 즐거움을 주시고 교훈도 주시고 그렇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쁘신데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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