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스토리 8화. 모국 품고 사는 한인 입양인 시몬…"한식은 내 운명"

글로벌 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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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1. 오전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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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서덜랜드 / 미국 한인 입양인 : 안녕하세요. 저는 시몬 서덜랜드입니다. 한국 이름은 최미련입니다. 한인 입양인입니다.]

모국을 품고 사는 어느 입양인의 '한국 사랑'

[시몬 서덜랜드 / 미국 한인 입양인 : 많은 입양아처럼 저는 버려졌어요. 서울이 아니라 익산 출생이었죠. 1970년 당시 그곳은 가난한 시골이었다고 해요. 기록을 보면 저는 많이 아픈 아이였대요. 아마도 몸이 약해서 버려졌던 것 같아요. 저는 1975년에 (미국으로) 입양됐어요. 당시 나이는 6살이었고 위스콘신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로 보내졌죠. 미국 가족과는 많은 갈등이 있었고 지금도 그 갈등은 여전해요. 15살이 되던 해까지 동네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어요. (한국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 양부모는 제가 미국에서의 삶에 감사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한국에 대해서 더 말하면 벌 받을 것 같아서 이야기하지 않게 됐던 것 같아요. 성장기를 떠올리면 마냥 행복하지 않았고 어려운 순간이 많았죠. 그런 환경 속에서 인내하는 법도 배웠지만, 그냥 입양기관에 있는 편이 더 나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결국 29살에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겪고 저 자신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죠.]

'나는 누구일까?' 답을 찾기 위해 선택한 한국살이

[시몬 서덜랜드 / 미국 한인 입양인 : (한국에서) 가족을 찾기 위해 혼자서 수소문하기도 했어요. 제가 발견된 동네를 찾아 전단지를 붙였죠. 하지만 가지고 있는 정보가 너무 모호했어요. 정확히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 수 없었고 익산에 있다던 고아원은 교회로 바뀌었더라고요. DNA 테스트도 해봤지만 일치하는 DNA를 찾지 못했죠.

지금은 친부모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고 있어요. 양부모와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했기 때문에 친부모와의 관계도 어떻게 될지 몰라 망설여지게 되더라고요. 한국에 있을 때 서울에서 살았는데, 서울은 정말 잠들지 않는 도시였어요. 에너지 넘치고 항상 할 무언가가 있었죠. 특히 한국 음식이 정말 그리워요. 똑같이 흉내 낼 수 없는 한국의 맛이 있거든요. 미국에서 먹는 한식도 비슷한 맛을 내긴 하지만 한국에서 먹는 맛과 같지 않아요. 정말 그리워요. 저는 한국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해요. 요리할 때 한국에서 먹었던 그 맛이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해내려고 노력하죠.]

고향에 대한 그리움 달래준 한국 음식 "한식은 내 운명♡"

[시몬 서덜랜드 / 미국 한인 입양인 : 향수병이 왔을 때 한국 음식을 먹으면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돼요. 그리고 한식은 미국 음식보다 더 건강한 기분이죠. 오늘은 제육볶음을 만들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육볶음이 너무 좋아요. 육개장도 좋아하는데 육수 만들기가 어렵더라고요. 따라 하기 너무 어려워요. 새로운 한식당을 찾으면 식당에 가서 먼저 육개장을 먹어보게 돼요. 육개장이 맛있고 육수가 제대로면 그곳은 맛집인 거죠.]

한국을 가슴에 품는 입양인들 "한국사회가 따스하게 맞아줬으면….

[시몬 서덜랜드 / 미국 한인 입양인 : 베이지역 한인 입양인들을 위한 모임이 있어요. 한인 입양인 중엔 아직 한국에 가본 적이 없거나 어린 사람들이 많아요. 한국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모국을 더 알고 싶어 하죠. 하지만 백인 가족과 살면서 다른 입양아나 동양인과의 접촉이 없다 보니 고립되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 사회가 한국에 돌아가는 한인 입양인들을 포용해 주길 바라요. 한국에 한인 입양인들을 도와주는 사회기반시설도 더 있으면 좋겠어요. 저도 한국에서 은퇴하고 싶고 지금이라도 바로 한국에 가서 살고 싶은 마음인데요. 한국인들이 좀 더 마음을 열고 이렇게 힘든 여정을 거쳐 한국에 돌아가는 입양인들을 받아들인다면 좋겠습니다. 축하해주고 잘하고 있다고…. 힘든 날도 있을 테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겠지만, 계속 나아가라고 격려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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