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자, 정정화 지사 [대륙의 여성 독립투사들]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자, 정정화 지사 [대륙의 여성 독립투사들]

2020.02.03. 오후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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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2019년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서훈한 독립 유공자는 모두 만 5천여 명입니다. 그 가운데 여성 독립운동가의 수는 357명, 2.4%에 불과합니다. 수많은 독립 운동 자료에 등장하는 적지 않은 여성들의 흔적.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➂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자, 정정화 지사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중국 단둥.

중국과 북한의 우의를 뜻하는‘중조우의교'가 두 도시를 잇고 있습니다.

그 오른쪽에 있는 다리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폭격으로 끊어져 '압록강 단교'라고 불립니다.

일제 강점기, 자금난에 시달리던 임시정부를 위해 바로 이 다리를 통해 중국과 식민지 조선을 수시로 드나들었던 용감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정정화 지사.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목숨을 걸며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을 맡았던 분입니다.

[인터뷰: 김자동 / 정정화 지사 아들]
임시정부 어른들이 상의한 결과 그러지 마라. 네가 갈 용기가 있으면 친정도 감시받을 줄 모르고 시집은 더군다나 감시받고 있을 테니까 임시정부에서 지정한 데서 돈을 좀 걷어 가지고 와라, 그래서 임시정부의 돈 심부름을 하게 되어서 임시정부 일을 보기 시작하게 된 거죠.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 먼저 중국으로 망명한 시아버지를 따라 무작정 중국으로 간 정정화 지사.

생전에 쓴 회고록 ‘장강일기’에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이 길은 한 여인의 길이다. 이 길은 모진 풍파로부터의 도피도 아니며 안주도 아니다. 또 다른 비바람을 이번에는 스스로 맞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
정정화, 장강일기 중

그 말처럼, 정정화 지사는 임시정부를 위해 온갖 비바람을 맞았습니다.

백범 김구를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뒷바라지와 식사 수발을 했고, 김구 선생의 노모 곽낙원 여사를 보살피기도 했죠.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직후부터 임시정부의 상하이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급히 거처를 옮겨야 했고, 항저우를 거쳐 쩐장으로 이동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뒤에는 더욱 위험천만한 탈출이 이어졌습니다.

일본군의 폭격이 이어지는 와중에 때론 열차로, 때로는 배로, 때로는 버스를 타고 중일전쟁 당시 중국의 전시수도였던 충칭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8년 동안이나 피난 생활을 이어갔죠.

[인터뷰 : 김자동 / 정정화 지사 아들]
(광저우에서) 목선을 타고 기선이 끄는데, 끌던 배가 중간에 돈을 받고 도망을 쳐요. 배 위에서 아마 한 달 가까이 있었을 거예요. 어른들은 얼마나 고생스러웠겠어요. 배 위에서 밥해 먹고 장 보려면 배에서 내려 육지를 한참 걸어가서 사와야 하고…

그렇게 강인한 의지력으로 풍찬노숙의 세월을 버틴 정정화 지사.

주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배려심이 많은 성품이었다고 합니다.

[인터뷰 : 김자동 / 정정화 지사 아들]
어머니는 키도 작고 몸도 갸날프지만 굉장히 강해요. 겁이 없고 책임감이 강하고. 항상 자기보다 주변 사람 배려를 해요. 단체 생활을 하는데 옆에 사람들과 트러블이 없어요. 애들끼리 싸우면 무조건 나를 야단쳐요. 어떤 때는 매도 맞고 그랬는데 조금 지난 뒤에 내가 어머니한테 따졌거든. 왜 내가 잘못 안 했는데 나만 야단치냐 그러니까 여럿이 사는데 자기 자식이 제일 예쁘고 그럴 거 아냐. 서로 자식 편들면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고, 어른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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