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걸작선] '301 302'

[한국영화 걸작선] '301 302'

2019.01.18. 오후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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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걸작선] '301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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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른바 '먹방'이 대세죠.

일반인들은 SNS를 통해서, 방송 프로그램들은 맛난 음식을 찾아 먹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느라 바쁩니다.

그런데 음식이라는 게 단순히 미각을 충족시켜 주는 것에만 그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음식을 매개로 여성의 결핍과 욕망이라는 묵직한 주제 의식을 담아낸 영화가 있었는데요.

고 박철수 감독이 연출하고, 황신혜와 방은진이 주연했던 '301 302'라는 작품입니다.


한 아파트의 301호 여자에게 어느 날 형사가 찾아옵니다.

형사는 맞은편 302호 여자가 실종된 사건을 놓고 탐문 수사중이었죠.

형사: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거나 그냥 가출할 만한 가능성은 없을까요?
301: 글쎄요. 지난주에 우리 집에 와서 저녁을 함께 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이 그냥 웃기만 했어요.

302호 여자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영화는 이제 301호와 302호 여자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자유 기고가로 활동하며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302호 여자에게 얼마 전 막 이사 온 301호 여자가 찾아옵니다.

301: 이거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 레몬 하고 크림 소스를 곁들인 광어 구이에요. 여기로 이사 와서 새 오븐에 처음 해본 거거든요.
302: 고맙지만 전 이미 저녁을 했는데...

301호 여자는 요리를 집착적으로 좋아하고 자신의 음식을 맛보는 걸 삶의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는 인물이죠.

게다가 틈만 나면 302호 여자에게 자신의 요리를 맛보게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정작 302호 여자는 음식을 먹으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거식증에 시달리는 중이었죠.

그래서 301호 여자가 가져다 준 모든 음식을 그냥 버립니다.

이런 와중에 301호 여자는 302호 여자가 자신의 음식을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호의가 무시당했다는 모멸감을 느낀 301호 여자.

이때부터 그녀는 음식을 만들어 302호 여자에게 강제로 먹이는, 학대에 가까운 행동을 하기 시작하죠.

301: 먹어, 어서 먹어! 이렇게 이렇게 먹어. 나 내 요리 때문에 이혼까지 했어. 너 처음부터 나를 경멸했어. 네가 뭔데 내 음식 버려. 어서 먹어!
302: 난 먹을 수가 없어요. 내 몸이 거부해요.
301: 안돼, 다 먹어야 돼.
302: 음식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날 받아들이지 않아. 제발!

302호 여자에게 거식증이 생긴 건 어릴 적 의붓 아버지로부터 당한 성적 학대 때문이었는데요.

그래서 그녀는 음식까지 거부하게 되었고, 반대로 301호 여자는 자신을 무시한 전 남편 때문에 음식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가지게 된 것이죠.

영화 '301, 302'는 남성 중심 사회의 폭력성에 의해 상처받은, 어쩌면 똑같은 처지의 두 여성이 음식을 매개로 충돌하는 설정을 통해 훼손되거나 왜곡된 인간 본성의 단면을 드러내 보입니다.

인간이 누리는 가장 보편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인 식욕.

어쩌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수많은 먹방도 억압되거나 뒤틀린 욕구의 표출이 아닐까요?

영화 '301 302'였습니다.

글/구성/출연: 최광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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