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걸작선] '우묵배미의 사랑'

[한국영화 걸작선] '우묵배미의 사랑'

2018.11.02. 오후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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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걸작선] '우묵배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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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한국영화계는 기존과는 다른 재능과 문제 의식을 가진 감독들이 잇따라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한국영화의 흐름을 일컬어 '코리안 뉴웨이브'라고 하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영화는 코리안 뉴웨이브의 서막을 알린 작품입니다.

90년대 논쟁적인 작품을 많이 내놓은 장선우 감독이 연출하고, 박중훈과 최명길이 주연한 '우묵배미의 사랑'입니다.

일도와 그의 가족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을 떠나 경기도의 우묵배미라는 곳에 새로 터를 잡습니다.

이사 온 첫날 동네 사람들과 흥건한 막걸리 잔치를 여는데요.

다음날, 곧바로 인근의 치마공장으로 출근한 일도.

사장: 양복 재단은 일류야. 미싱도 잘 하고. 사람이 좀 싱거워 보여서 탈이지만 말이야.
일도: 아이, 사장님. 사람이 싱겁다고 물건도 싱거운 게 아닙니다요. 뭘 잘 모르셔.
사장: 거봐, 미스 민. 이 친구 조심하라고. 괜히 옆에 앉았잖아. 젊은 여자 바람 내는 거 아냐?
일도: 잘해 봅시다. 아가씨!

일도는 바로 옆에 앉아 일하는 공례에게 은근한 호감이 생기는 눈치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공례는 아이 엄마였던 것.

일도: 여기 있다, 100원. 얼른 가서 라면땅 사 먹고 한참 동안 놀고 와야 돼. 옳지.
일도: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공례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도.

공례도 그런 일도가 왠지 마음에 들어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술 한 잔 걸치며 데이트에 나서는데요.

그리고 충동적으로 두 사람은 같은 열차에 올라타죠.

일도: 우린 계속해서 이렇게 샛길로 가야 할 거예요.
공례: 멀고 험한 길은 재미가 없잖아요.

공례가 말한 멀고 험한 길이란 이들이 처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겠죠.

일도가 말한 샛길은 바로 그 현실로부터 탈출하는 비상구를 뜻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서히, 그러나 격정적으로 사랑이라는 비상구를 향해 달려갑니다 .

그렇게 둘은 어느 낯선 땅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죠.

하지만 현실은 이들의 자유로운 사랑을 허락하지 않겠죠.

일도는 억척스러운 아내의 성화에, 공례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립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한밤의 비닐하우스에서나마 둘만의 비밀스러운 사랑을 이어갑니다.

일도: 아이, 집에 가기 싫다.
공례: 만약 오늘 밤 함께 지내면 우리 더 못 만나요.

대부분의 불륜 드라마가 그렇듯, 이 둘의 사랑도 결국 파국으로 치달아 가고 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을 바라보는 장선우 감독의 시선은, 대단히 따뜻하고 애처롭습니다.

척박한 삶 속에서 환상으로나마 탈출을 꿈꾸는 이들의 사랑을, 가부장제적 윤리의 잣대로 재단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둡고 메마른 들판에 피어났다 져버린 야생화 같은 사랑의 비가!

일도: 다시 연락해, 꼭!
공례: 아니오, 기다릴 필요 없어요.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이었습니다.

글/구성/출연 최광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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