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 주세요" 한국 찾은 사할린 1세 김윤덕 씨

"기억해 주세요" 한국 찾은 사할린 1세 김윤덕 씨

2017.07.06. 오후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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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일제 강점기 강제 노역을 당한 사할린 동포 중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이제 아흔이 넘은 사할린 1세대 동포들, 노환을 치료하기 위해 어렵게 고국을 찾았습니다.

고국을 찾은 사할린 동포의 목소리를 김수영 PD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전숙하 / 진료부장 : 안녕하세요. 검사 며칠 받느라 힘드셨죠?]

[김윤덕 (94) / 사할린 징용 한인 1세 : 아이고, 일 없습니다. 좋습니다.]

사할린 잔류 1세대 동포들을 위한 초청진료 사업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진행됐습니다.

사할린 1세대 동포 스물다섯 명이 한국을 찾았습니다.

한 달간 정밀검사와 진료를 받은 뒤 가족이 있는 사할린으로 다시 돌아갈 예정입니다.

[박춘자 (87) / 사할린 동포 1세 : 늙으니까 아파서, 여기서 치료받으면 좋은가 싶어 왔습니다. 오니까 참말 잘해주네요. 몸이 아픈 거 다 알려주지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난 1938년 일제의 국가총동원법으로 사할린 강제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은 3만여 명.

징용 1세대 김윤덕 씨는 1943년,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사할린으로 끌려갔습니다.

[김윤덕 (94) / 사할린 징용 한인 1세 : 아버님이 가시려는 걸 내가 가겠다고 해서, 아버님은 집에 동생들과 어머님과 있으라 하고 내가 간다고. (사할린) 온 날 저녁엔 일본사람 책임자 나와서 연설하데요. 여기는 오면, 어디 가지 못한다고. 어디 갈 생각하지 말고 여기서 일하라고.]

탄광과 벌목장에서 혹독하게 일하며 버텼지만, 해방의 기쁨은 사할린까지 닿지 않았습니다.

일본 패망 후에는, 일본군 대신 러시아 군대가 고국으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손이 끊어지는 강제 노역의 고통은 70년이 지나도 생생합니다.

[김윤덕 (94) / 사할린 징용 한인 1세 : 손이 떨어졌는데, 온통 피가 났는데, 제가 사할린 와서 고생한 얘기 하면, 눈에 피 나와요.]

1990년 한국과 구 소련의 수교 후, 정부는 사할린 동포 영구 귀국의 길을 열어줬습니다.

하지만 광복 이전에 태어난 1세만 귀국 대상자로 한정한 까닭에, 사할린에 남아있는 가족들과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박춘자 할머니를 비롯한 사할린 1세는 영구귀국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박춘자 (87) / 사할린 동포 1세 : 난 안 했어요. (왜요?) 자식들 놔두고 어떻게 오겠습니까? 함께 살아야지. 마음이 편한 사람은 왔었지만, 나는 어린 아들이라 두고 잘 살지 못하니까 함께 살아야지요.]

[김윤덕 (94) / 사할린 징용 한인 1세 : 다 지나갔습니다. 사할린에 남아있는 사람들, 아는 사람 있으면 죽으면 장사나 지내지만, 없는 사람들은 아무 데나 묻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거 말씀 좀 해주시오.]

차디찬 사할린에서 평생 망향가를 부르던 동포들의 남은 소망은 고국이 자신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김윤덕 (94) / 사할린 징용 한인 1세 : 제 고향은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 남하동 1구입니다. 제 이름은 김윤덕이. 기억하시고. 우리 이래 왔으니, 말해드리지요. 우리 걱정 많이 해주셔서 치료도 잘 받고 사할린에 잘 가게 됩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YTN 월드 김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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