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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 하나로 일왕 장인 저격'…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 운동가, 조명하 의사
Posted : 2019-11-17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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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0분

타이완 타이중시에서 벌어진 의거

"타이중에서 벌어진 불경한 사건"

23세 조선 청년 조명하가 일왕의 장인, 구니노미야 육군 대장의 목에 독이 묻은 칼을 던지다

현장에서 체포된 조명하는 그해 10월 10일 타이베이 교도소에서 순국

이듬해 1월, 구니노미야는 온몸에 퍼진 독으로 사망

그 누구의 지원도 받지 않은 '단독 의거'이자

유일하게 일본 왕족 처단에 성공했던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

[김상호 / 타이완 슈핑 과기대 교수 : (황해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집안도 어떤 강한 선비 집안이었고,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면서 (조명하 선생은) 조국이 없는 설움, 내 나라가 없는 설움, 일본 식민 통치를 받는 설움을 느끼시면서 사셨죠.]

군청 서기였던 청년 조명하

안정된 생활, 보장된 영광을 버리고 항일운동에 투신

'항일을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며 오사카에 가다

[김상호 / 타이완 슈핑 과기대 교수 : (안정된 삶을 버리고) 조명하 의사도 오사카를 가셔서 거기서 (항일 의거) 기회를 보시려고 상공전수학교, 지금은 대학이지만 야간부에 다니면서 또 러닝셔츠 공장에 가서 일도 하시고 이러면서 거기서 좀 계시다가 기회가 없으니까 그럼 타이완을 거쳐서 상하이로 가서 김구 선생을 만날 생각을 하신 거죠.]

타이완 총독을 척살하러 왔지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찻집 '부귀원'에서 신분을 숨긴 채 차 배달을 하던 조명하.

독 묻은 칼(단도)을 던지는 연습을 하며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다.

[김상호 / 타이완 슈핑 과기대 교수 : 독을 발라서 하는(던지는) 연습을 하고, 그 칼을 가지고 그런 연습을 하고 있는데 기회가 온 거예요. 타이완 총독부의 기관지인 타이완 1신문에 구니노미야, 당시 일왕의 장인이면서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가 특별 검열사 자격으로 타이완에 오는 거예요.]

'일본 왕족 척살은 상하이에서도 다시는 없을 기회다'

의거를 결심한 조명하, 찻집 직원 복장을 한 채 환영 인파 속에 섞여든다.

[김상호 / 타이완 슈핑 과기대 교수 : 커브를 돌다 보면 차가 속도를 줄이잖아요? 8대가 지나가는 데서 두 번째 차량에 구니노미야가 탔는데 거기에 뛰어올라서 칼을 던졌는데 처음에 실패했는데 얼른 집어서 다시 던졌는데 그게 구니노미야의 목덜미하고 어깨를 스쳐서 찰과상을 입혔죠. 8개월 후인 그게 독이 퍼져서 복막염으로 번져서 (구니노미야는) 사망했는데… 이 장소가 바로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5분에 조명하 의사께서 구니노미야를 척살한 바로 그 장소입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조명하는 그해 10월, 꽃다운 24세 나이에 타이베이에서 순국하다.

일제는 오래도록 배후를 찾았지만 '단독 의거'였음이 더 밝혀진다.

[김상호 / 타이완 슈핑 과기대 교수 : 1909년에 안중근 의사, 1932년에 윤봉길 의사, 32년에 또 같은 해니까 이봉창 의사 다 김구 선생의 지원을 받았어요. 아시겠지만 전부 다 김구 선생의 지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조명하 의사는 아무 지원도 없어요. 단독 거사예요. 조명하 의사는 혹시 자기가 거사를 일으키고 나서 다 이제 앞날까지도 생각하신 거죠. 가족들한테 피해가 갈까 봐 편지를 보내서 한 달에 한 번씩 황해도로. 근데 거기 뭐라 그랬냐면 맨 마지막에 읽어 보시고 태워버려라. 나는 잘 있으니까. 증거를 없애버리고 증거를 하나도 안 남긴 거죠. 그러니까.]

증거도 증언도 부족한 단독 의거.

그래서 더 널리 알려지지 못한 독립 운동가 조명하 의사.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1978년 타이완 동포들이 흉상을 세운 데 이어 독립기념관·서울대공원 등에 조명하를 기념하는 노력이 이어졌다.

타이완 동포들이 주최하는 '조명하 학술대회'

의거 90주년인 2018년 의거 장소에 '기념비' 설치

독립운동가 조명하의 업적은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김상호 / 타이완 슈핑 과기대 교수 : 중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에서 (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목을 못 받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당시 일본 식민 통치자들이 생각할 때 당시 조선의 어떤 항일 운동이 타이완까지 번졌구나 그래서 그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그런 계기도 있던 거예요. 거사 장소 기념비를 세웠다시피 타이베이 교도소, 순국하신 교도소 그 장소에도 기념비를 세우려고 제가 지금 노력하고 있고 또 그렇습니다. 모든 걸 버리고 나라를 위해서 전부 희생한 거예요. 24살, 정말 꽃다운 나이 아닙니까? 그런 정신을 단독으로 하신 거야. 아무런 지원도 없이. 이런 걸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이 지탱할 수 있는, 말하자면 버팀목이 된 거 아닙니까. 지지대가 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정신을 우리가 좀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런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 조명하 의사,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순국 직전 남긴 유언 -

단도 하나로 일왕의 장인을 척살한 독립 운동가 조명하 의사 (1905~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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