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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추방된 가족…냉전과 분단의 비극
Posted : 2019-02-03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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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사할린 강제징용.

조국 해방에도 막힌 귀향길

이산(離散)·망향(望?)

역사의 아픔 이겨낸 사할린 동포 1세의 기록

[김정자 / 1942년생 : 엄마가 한국에 가야 한다고. 한국에 가야 어떻게든지 먼저 알 수 있다고. 누가 살아 있다는 소식만 들어도 좋겠습니다. 우리 집 아버지는 한국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시고. 3.1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 많이 하셨고 우리 시아버지들이 많이 라디오 듣고 편지 쓰고 (일기도) 많이 써놨습니다. 그런데 그거 다 빼앗고… (PD: 빼앗은 거예요? 누가?) 압수했지. (소련) 경찰이 와서 다 압수했지.]

한국과 소련 간 국교가 없던 시절 냉전과 분단은 더 큰 비극을 가져왔다.

[김정자 / 1942년생 : 소련 정부에서 '한국에는 절대로 못 간다. 근데 일본으로는 갈 수 있다'. 일본에서 누다 비자를 보내면 갈 수 있다 해서 (시아버지가) 비자를 받았습니다.]

일본을 거쳐 한국에 가려던 시아버지 도만상 씨.

소련이 출국을 허락하지 않자 시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김정자 / 1942년생 : 왜 소련 정부가 이렇게 우리한테 거짓말하는가, 비자를 받으면 일본으로 가서 일본을 통해서 한국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왜 안 된다고 하는가, 그렇게 해서 데모를 했죠. 데모하기 전에 우리 시집 식구들이 다 우리 집에 왔어요. 시동생, 시누, 시어머니, 시아버지, 그렇게 오셔서 '우리(김정자 씨 부부)도 (한국) 가자'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우리 아이들이 (한국) 가서 낯선 데 가서, 그리고 일본에 가서 그런 건 싫다'고 그랬죠. '지금은 안 가겠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하고 며칠 있으니 (시댁이) 데모했다고 들었어요.]

도만상 씨 가족 북한으로 추방.

[김정자 / 1942년생 : 내가 울면서 시아버지한테 그랬습니다. '지금도 안 늦었습니다. 식구들 위해서 좀 항복하고 나오시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그런데 안 된다고. '우리가 이렇게 희생당해야 (나중에) 한국에 갈 수 있는 문이 열리겠다'고. 소련 정부에 남기 위해 부모들이 잘 못했다는 편지를 쓰라고 (소련 정부가 말했어요). 그렇게 하는데 우리 시동생은 안 된다고.'자기는 죽어도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잘 못했다고 안 쓰겠다'고. 그래서 시동생이 가서 나홋카, 거기 북한 영사관 있었잖아요. 거기 가서 자기가 (북한) 가겠다고 자발적으로 써서 갔습니다. (시동생이) 나보고 '형수님, 내가 가서 직장만 주고 살 수 있고 (먼저 추방된 가족을) 만났으면 색깔 있는 카드 보내겠다고. 자기 잘 있다고. 만일 직장도 못 얻고 부모도 못 찾으면 검은 카드로, 색깔 없는 카드 보내겠대요. 그렇게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그런 것도 하나도 안 왔고.]

도만상 씨 장남 (김정자 씨 남편) 시위에 불참해 강제 추방을 면했다.

[김정자 / 1942년생 : 우리 남편은 말할 것 없었지… 말할 것 없었습니다. 말 못하고. 우리 남편은 딸들 다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딸들 미래를 위해서 자기가 (사할린에) 남을 거라고. 그런데 술을, 그때(아버지가 추방된 때)부터 술을 마시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돌아가셨죠.]

[도예리 / 김정자 씨 둘째 딸 : (한숨) 아버지가 적십자사(모국방문사업)를 통해서 처음 한국에 방문했을 때…]

[도몌리 / 김정자 씨 첫째 딸 : 1996년.]

[도예리 / 김정자 씨 둘째 딸 : 네. 그때 아버지가 많이 마음 아파하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도몌리 / 김정자 씨 첫째 딸 : 아주 잠깐 (한국에) 다녀오셨지.]

[도예리 / 김정자 씨 둘째 딸 : 만약 미리 알셨다면…. (한국과 소련이) 이렇게 관계가 회복되고 시대가 변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아셨다면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도몌리 / 김정자 씨 첫째 딸 : (사할린에서) 기다리셨겠죠.]

[도예리 / 김정자 씨 둘째 딸 : 그리고 가족을 지키셨을 것이라고…. 그렇게 되리라고 누가 알았겠어요. 시대가 그렇게….]

[도몌리 / 김정자 씨 첫째 딸 : 어려운 시기였죠.]

[김정자 / 1942년생 : 2000년도에 한국에 (영주귀국) 올 수도 있었어요, 우리가. 그랬는데우리 남편이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뭐라고 했냐면, '그럼 또 이산가족이 안 되는가','우리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도 못 보고 살았는데 (영주 귀국하면) 우리 손자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사는 것 못 보고. 그것을 볼 수 있는가. 그래서 자기는 (한국에) 못 가겠다'고.]

희망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 찾는 외침이 북한에도 닿았으면.

[김정자 / 1942년생 :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에 갔다 오셨다길래 큰 애가 또 전화하잖아요. 그럼 이제 문이 안 열리겠느냐고. 좀 알아봐 달라고. 우리 친구의 남편도 알아보셨는데 아직은 (상봉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

[도몌리 / 김정자 씨 첫째 딸 : 우리는 어떤 흔적이든 정보든 뭐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사라질 수가 없잖아요.]

[도예리 / 김정자 씨 둘째 딸 : 그렇게 대가족이….]

[도몌리 / 김정자 씨 첫째 딸 : 아무 흔적도 없이 그렇게 대가족이요.]

[김정자 / 1942년생 : 무엇보다도 평화로운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바랍니다…. 통일을 통해서 우리 친척들, 가족들이 만났으면 좋겠고. 누가 누가 살아 있다는 소식만 들어도 좋겠습니다.]

"북한으로 추방된 가족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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