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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1세의 기록] 이중징용, 더욱 깊어진 이산(離散)의 아픔
Posted : 2019-01-20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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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사할린 강제징용

조국 해방에도 막힌 귀향길

이산(離散)·망향(望鄕)

역사의 아픔 이겨낸 사할린 동포 1세의 기록

[서진길 : (사할린에는) 아버지 없는 사람 많았어요. 여자들은 살기 더 힘들었지 (남자는) 돌아가시고 강제 징용 가고.]

1944년 8월 아버지 서자근 씨 일본 이중징용

1944년 10월 사할린 출생

2002년 이중징용 광부 유가족회 결성

[서진길 / 1944년생 : 아버지는 42년도에 한국에서 일본인들이 강제 징용으로 데려왔습니다, 사할린으로/(아버지는) 우글레고르스크에 있는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일하다가 44년도 8월 말에 일본 규슈 후쿠오카로 (다시) 징용 끌려갔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끌려간 후) 10월에 태어났습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4년.

수세에 몰린 일본은 해상 석탄 운반로를 상실한다.

사할린에 간신히 삶의 터전을 마련한 한인들은 다시 가족과 생이별해야 했다.

일본, 한인 3천여 명

본토 탄광으로 다시 동원…이중징용

[서진길 / 1944년생 : (몇 살 때 (아버지의 이중징용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15살, 14살 인가 그때였죠. 어릴 때 마음이 아팠지. 친아버지를 못 보고 사진도 없고 하니 그때 (어머니에게) 물어보려 했는데 못 물어보고 (아내: 상처가 너무 컸었지) 힘들었어요. 다른 사람들 보면 아버지도 있고 어머니도 있고 다 있는데 나는 아버지 사진도 없고 한 번도 못 봤지. '호래자식'이라는 소리도 한번 들어보니까 눈물도 많이 나고.]

[이수진 / 1942년생 : (이중징용된 아버지는) 하시마라는 탄광, 군함도라는 거기서 (일했어요). 옛날에 하시마 탄광으로 들어가는 건 보지만 나오는 분은 못 봤다고. 그렇게 어렵게 일했다네.]

1942년 사할린 출생

1944년 아버지 이은일 씨 일본으로 이중징용

2004년~2012년 사할린주 이산가족회 회장

2011년 한국 영주귀국

[이수진 / 1942년생 : (아버지는) 마지막 있는 돈으로 도둑 배 타서 몰래 사할린 (코르사코프)로 밤에 온 것 같아요. 아버지가 러시아 군인한테 담배 주고 자전거로 바꿔서 그 자전거를 타서 이렇게 (집에) 왔대요. 며칠 타고 왔는지 모르겠다고. 아버지가 식구 보고 싶어서 그렇게 힘쓰고 와서 고맙지 않소. 3100여 명 중에서 들어온 사람은 얼마 안 된 것 같아. 한 10명 될까 말까. 남은 사람들은 다 거기 남고 죽고. 어떤 분은 거기서 한국으로 간 사람들 몇 명 있고 그랬습니다.]

이중징용 사실조차 외면한 일본

아버지 무덤만이라도 찾았으면…

[서진길 / 1944년생 : 지금 (일본 탄광 터에) 가면 (징용 피해자의) 묘도 없어요. 대나무 꽂혀 있고. 돌 같은 거 딱 있고 옆에는 (키우던) 짐승 위해 일본 사람들이 묘를 다 잘해놨어요. 우리 (피해자의) 묘를 찾아달라고. 배상 문제는 둘째 문제고 묘를 찾아 달라고. 일본 사람들은 말해줘야 하는데 말 안 해준단 말이야. 답답하단 말이야. 묘 어디 있는가? 어디 바다에서 돌아가셨는지 모른단 말이야. 지금 벌써 70년 넘어 지나갔는데 그런 것 좀 말해주면 좋아요. 뭐하러 비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가혹한 이중징용 피해

무관심이 더 큰 상처로 남다

[서진길 / 1944년생 : 2002년도에 이중징용 피해자 유가족 단체를 만들고 명단도 만들고 해서 다 내가 도와줘서 만들었지. (어떻게 명단 조사한 거예요?) 라디오 방송도 하고 누가 누가 아는 사람들 있으면 오라고 해서 적으라고 했고. (피해자 찾아달라는) 편지 몇 번 썼지 일본 정부에도 주고 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도 주고 대답이 아무도 없어요. 한국 국회의원에도 편지 쓰고 도와 달라 했는데 아무도 안 도와줬지.]

1992년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당시 화면

이중징용으로 이산의 고통을 더욱 절실하게 겪은 사할린 동포들,

영주귀국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친다

[이수진 / 1942년생 : 우리 부모들은 언제나 그리워했죠. 식구를 한국에 놓고 와서 이산가족이 되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또 형제가 있다고 많이 그리워했어. 제가 이산가족회장을 맡으면서 많은 분을 귀국시켜줬어요, 영주귀국. 2000년도에 안산 '고향 마을'에서 한 500가구 한 천명 갔고. 그다음에 인천에. 인천(논현동)에 한 600명 돌아왔어요. 한국의 지금 24구역에 동포들이 사는데 (가장 많을 때) 4500~700명 살았어요. 우리가 다 시켜줬지. 공식적으로.]

외교적 갈등 우려와 예산 부족으로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대상은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로 제한됐다.

[이수진 / 1942년생 : 사할린에 (한인이) 아직 3만 명 이상 남아 있어요. 그들도 '고국은 한국이다', '가고 싶다', '어떻게나 도와달라' 그런 운동 이때까지 계속하고 있어. 1세들뿐만 아니라 2세, 3세들이. 우리 부모들이 강제로 (사할린) 가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 나이는 1세고 쟤는 2세다 그렇게 가족을 할 수 없지 않겠소. 갈라질 필요… 그들(자식들)도 한인들인데, (한국에) 오고 싶어 하지 않겠어요? 한국 정부가 도와줘서 이렇게 올 수 있도록. 오고 싶은 사람들과 같이 있는게, 그것이 제일 소원이에요.]

사할린 한인 문화센터 앞에는 이중징용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서진길 / 1944년생 : 젊은 사람들이 징용 갔다는 걸 안 잊기 위해.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 알리기 위해서. 우리가 부모들 못 지키면 누가 지키겠어요.]

"두 번의 이산을 초래한 이중징용, 사할린 동포 만의 아픔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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