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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1세의 기록] 강제징용 피해자, 김윤덕의 마지막 증언
Posted : 2019-01-13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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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 /1923년 출생·강제 징용 피해자]

먹는 식량(이 없어) 배고파 그게 아주 고생했지 세상에 우리만큼 그렇게 고생한 사람도 없어요.

일본 시대에 우리 여기 왔지. 일본 시대에 왜놈들이 사람 여기 없으니까 동네 군마다 하나면 하나, 둘씩 징용 보내서.

그때 뭐 왜놈들 징용 안 가면 감옥에 보내던지 그러다 보니 안 오면 안 돼서 그래서 내가 대표로 왔지. 내가 올 때 아버지 대신 오다 보니, 어머니가 그렇게 (반대)했지.

탄광에 들어가니 캄캄하더구먼. 나무 (기둥이) 부서지면, 땅땅 부서지는 소리 나면 깜짝깜짝 놀라요. 처음 들어보고 그러면.

나중에 이제 그게 날이 돼서(시간이 지나서) 한 달쯤이나 다 되면 방에 누워 자는 것과 한가지예요(똑같아요). 땅땅 소리 나도 그냥 가만 앉아있고. 모자에 전시(전등) 달아 놓은 게 자꾸 내려와요. 또 올려놓으면 또 내려오고.

그래서 끈을 매서 여기 (목에) 달아매도 계속 그렇지 뭐. 그게 이제 날이 되면(시간이 지나면) 일 없다니까요(괜찮아요).

고개 내려와도 일 없고(괜찮고), 앞에 좀 숙여도 일 없는데(괜찮은데) 숙이면 눈이 안 보이지. 앉아서 엎드려 일하는 데도 있고. 뒤로 누워서 일 하는 데 있단 말이요.

여기 봐. 전부 새카매. 올라가면 늘 이렇게 엎드려서 올라가다 보니 모두 굳은살이 됐어, 전부. 아유, 생전에(다시는) 그런 탄광에 일 안 하지. 그렇게 우리 고생한 사람들이라고.

아주 말할 것 없다. 그때 식량 귀했지요. 우리 여기 와서 배고팠던 거 생각하면. 있는 옷 다 팔았죠. 신발이든지 시계든지 전부 다 바꿔서 팔아서 먹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팔아먹을 것도 없지요.

배가 되게 고프고 잠이 안 오고 그러면, 아무리 누워 있어도 잠이 안 와요. 그러면 물을 한 그릇 먹고 나면 배가 조금 부르단 말이에요. 그때 잠이 살살 들어요. 일 갔다 와서 힘들지 그 뒤로 잠이 살살 들구먼.

(1945년 8월 15일) 일 갔다가 3시 되어 나오니까, 막 울고 난리대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나중에 우리 사무실에 와서 물으니까, 일본이 손 들어버려서(항복해서) 일본 사람들이 운다고 그래요.

그래서 막 울고 그러대요. 그러고 난 뒤에 우리 한 보름 뒤에 일이고 뭐고 다 멈추고 아무도 일 안 했어.

조선에 언제 가냐고 (일본인들에게) 묻고 해도, (일본인은) 우리 조선 사람부터 먼저 보낸다고 하더니, 나중에 일본사람들 자기들이 먼저 (모국에) 가버리고. 조선 사람들은 그냥 떨어지고(남고).

고향 갈 생각 많았지. 많아도 나중에 한 해 가고, 두 해 가고, 자꾸 늦어지니까 나중에는 뭐 왜놈들이 안 보내니까 고향이고 뭐고 이제 다 틀렸다. 못 간다고 그렇게 생각하고는.

(1990년 고향에) 가니까 울고, 붙들고. 나는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머니는) 집에 아내 붙들고 울지, 뭐. 못 보겠대. 시골에서 집안사람 온다고 하니 집안사람들이 마당에도 꽉 차 있지.

우리 사할린 올 때는 내가 어머니한테 그랬는데. 내가 다시 한 번 오면, 그땐 울지 말라고. 울면 내가 일찍 가버린다고.

그러니까 (어머니는) '내가 안 울게', '안 울게' 하시대. 괜찮대. 나올 때는 (어머니가) 그냥 '잘 가거라' '가면 편지 보내라', 그래서 '네. 편지할게요' 그랬는데 한 달 조금 넘어서 돌아가셨어요.

지금 사할린에 한국 사람이 있어도 (강제 징용에 대해서) 하나도 몰라요. 그 전에 (일제 강점기) 골짜기에 있던 그런 사람, 그 전에 우리 같이 만났던 사람들은 만나면 알까? 그 외에는 지금 거의 젊은 사람들만 남았지 뭐…나이 먹은 사람은 몇 명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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