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바둑 판을 바꾸다③] 인공지능으로 약진하는 기사들

[인공지능이 바둑 판을 바꾸다③] 인공지능으로 약진하는 기사들

2019.05.11. 오전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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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으로 약진하는 기사들

[인공지능이 바둑 판을 바꾸다③] 인공지능으로 약진하는 기사들

엘프고 이후 인공지능 학습 통해 약진하는 프로기사들

‘형세판단 실력’보다 ‘말솜씨’가 중요해진 바둑 해설

프로와 인공지능의 실력 차이는 몇 점?

바둑 실력 좋아졌지만 개성은 희미해졌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엘프고, 릴라제로, 미니고와 같은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프로기사들이 바둑을 배우는 것이 일반화된 지금, 실제 프로바둑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먼저 프로기사들의 초중반 포석 실력이 대체로 강해졌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조한승 9단, 초반전에 강하고 판을 잘 짜는 정상급 기사입니다. 엘프고 오픈 전 1년간 전적이 38승 21패, 이후 1년간 전적은 28승 17패입니다. 66%에서 62%로 승률이 조금 떨어졌습니다. 엘프고 이후 프로기사들의 초반전 포석 실력이 좋아지면서, 조한승 9단의 장점이 희석됐다고 예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말고도 바둑세계에서는 체력 저하만으로도 성적이 확 떨어지기 때문에 엘프고 때문이라고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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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엘프고 이후 인공지능 학습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한 케이스를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첫 번째 케이스로 꼽히는 프로기사는 이호승 4단입니다. 지난해부터 AI로 훈련하기 시작했는데 성적이 확 좋아졌습니다. 전에는 정상급 기사와 대결을 앞두고 미리 주눅이 든 경우도 많았는데 이제는 스스로 심리적으로 자신감도 많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미니고를 많이 쓴다고 합니다. 이호승 4단의 GS칼텍스배 성적을 보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긴 상대가 박정환 9단, 신민준 9단, 이세돌 9단 등 강자입니다. 바둑에서는 약한 사람이 가끔씩 강한 사람을 이길 수는 있지만,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연속해서 이기기는 매우 힘듭니다. 프리미어리그 약팀이 강팀을 계속 잡는 것이 어려운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호승 4단은 이변에 의한 승리라기보다는 실력이 좋아져서 나타난 결과라고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엘프고가 공개되기 전 1년간 이호승 4단의 통산 성적을 보면 49승 44패(승률 53%)입니다. 그런데 엘프고가 공개된 뒤부터 지금까지의 성적을 보면 23승 17패(승률 58%)입니다. 올해부터 5월 1일까지의 성적만 따져보면 10승 3패(승률 77%)로 더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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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승 4단은 인공지능들의 차이까지 한 문장으로 이야기할 정도로 인공지능으로 공부를 많이 합니다. 대국이 없는 날에는 하루에 10시간 정도를 인공지능으로 바둑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인공지능 셋을 비교하는 그의 말이 재미있습니다.

“릴라제로는 사람의 감각과 가장 가까워 보일 정도로 안정적이고, 엘프고는 허세가 있지만 감각이나 멋이 좋고, 미니고는 세련된 느낌의 힘바둑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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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민 6단도 있습니다. 박하민 6단도 엘프고 공개 전 통산 전적이 100승 85패(승률 54%)였습니다. 그런데, 엘프고 공개 이후부터 올해 4월 말까지 성적을 보면 57승 20패(승률 74%)입니다. 크라운해태배와 미래의별 신예최강전 왕중왕전에서는 우승까지 차지했습니다. 엘프고 오픈 시점에 랭킹이 73위였는데, 지난 4월에는 27위까지 상승했습니다. 지난해 한국바둑리그에서는 박정환 9단과 이세돌 9단, 김지석 9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달라진 바둑 실력을 과시했습니다. 올해도 26승 5패, 승률 84%로 다승 1위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인공지능의 강점은 답을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인공지능이 나온 뒤에는 답을 알려주니까 좋은 것 같습니다. 또 중후반 마무리도 인공지능이 굉장히 깔끔하게 잘합니다. 이기고 있는 바둑을 쉽게 정리하는 방법도 많이 배웁니다.”

여자 기사도 있습니다. 김채영 5단은 최정 9단을 상대로 역대전적 10연속 패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7월 제1회 오청원배 세계여자바둑 결승에서는 최정 9단을 두 번이나 거푸 이기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우승 소감이 재미있었습니다. AI로 공부한 효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바둑 판을 바꾸다③] 인공지능으로 약진하는 기사들

바둑을 해설하는 풍경도 바뀌었습니다. 해설은 프로기사가 하지만 참고도는 이제 AI의 몫이 됐습니다. 어떤 진행이 최선일 것이라고 향후 전개될 그림을 AI가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AI가 보여주는 참고도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인공지능이 새로운 수법이라도 제시했는데, 해설하는 프로기사가 직관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편해진 면도 있지만 해설하는 프로기사의 무게감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한 모습도 종종 보인다는 것 또한 인공지능이 바꾼 바둑계 풍경 중 하나입니다.

또 바둑해설가의 캐스팅 기준도 바뀌었습니다. 과거엔 형세판단의 능력도 뛰어나고, 또 당연히 실제 바둑에서 성적도 내는 기사들이 바둑해설가로도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계가(計家: 집을 센다는 뜻으로 형세판단의 기초가 됨)실력이 조금 부족한 프로기사들도 말솜씨가 좋고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면 바둑TV 해설자로 인기를 끌 수 있습니다. 그럼 계가는 누가 할까요? 형세판단과 계가는 인공지능이 실시간으로 해줍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프로기사들이 유튜브로 진출해, 자신의 채널을 운영하며 바둑을 해설하고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기사라면 유튜브에서 자신의 실력을 더욱 뽐낼 수 있게 됐습니다. 바둑계 국민스타라 할 수 있는 이세돌 9단도 유튜브 활동을 합니다. 유튜브에서 바둑팬들에게 회자되는 어록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알파고가 아니라 신(神)이 와도 석 점을 놓고는 안 질 것”이라는 말도 유튜브에서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바둑의 해설 풍경도 인공지능으로 인해 바뀐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인공지능과 사람의 실력 차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알파고가 나올 때만 해도, “인공지능이 프로기사를 이긴다고? 그래도 아직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시간이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반문하는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적어도 바둑을 둘 줄 알고, 바둑의 수많은 경우의 수를 아는 사람이라면 더 그랬습니다. 그러나 알파고가 그것을 무너뜨렸고, 엘프고가 나타난 뒤 이제는 프로기사가 인공지능에게 두 점을 깔고도 지는 일이 나타났습니다. 커제 9단도 중국의 인공지능 줴이(絶藝)에게 두 점을 접고도 패했습니다. 심지어 두 점이 아니라 석 점을 놓고도 프로기사가 지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프로기사와 인공지능의 실력 차이가 두세 점으로 벌어진 것입니다. 바둑 애호가라면 그 이름이 낯설지 않을 린하이펑(林海峯) 9단이 “바둑의 신이 있다면 3점쯤이라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던 말이 정말 무색해진 시대인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바둑 판을 바꾸다③] 인공지능으로 약진하는 기사들

저는 색깔이 있고, 개성이 있는 사람의 바둑이 종종 그립습니다.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포석이 비슷해지고, 초반 선택의 길이 좁아졌다는 것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 바둑을 공부했다고 해서 잡초 같은 바둑이라고 불렸던 토종바둑의 대명사 서봉수 9단, 발빠른 포석과 날렵한 행마의 조훈현 9단, 화려한 공격력을 자랑했던 유창혁 9단, 탁월한 계가 실력과 마무리 능력으로 천하를 평정했던 이창호 9단과 같이 뚜렷한 개성으로 세계를 호령했던 그 시대가 더 사람 냄새 나는 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주류, 세력바둑을 두었던 일본의 다케미야 9단에 맞서, 지하철 바둑으로 불리는 철저한 실리바둑을 구사하며 정상에 올랐던 조치훈 9단, 놀라운 공격력으로 ‘대마 킬러’라는 별명을 얻었던 일본의 가토 마사오 9단과 같이 자신만의 무기로 상대를 제압하던 때는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됐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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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 정상급 기사의 특징을 한 줄로 설명하면 어떻게 될까요? 최정상급 기사라고 할 수 있는 박정환 9단이나 커제 9단을 설명하자면 ‘약점이 없다’는 말이 적절할 것입니다. 초반과 중반, 종반까지 그 어느 부분에서도 약점이 안 보인다는 것. 그것은 골고루 다 잘한다는 말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바둑의 강자의 특징은 올라운드 플레이어입니다. 모두 다 잘하는 것입니다. 과거엔 하나의 장점으로 자신의 약점이 되는 부분을 가렸지만, 이제는 약점이 노출되면 금방 상대의 타깃이 되어버립니다.

바둑계를 바꾼 인공지능은 지금도 우리 삶 구석구석을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과 엔지니어들이 인공지능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웹툰 연재가 총 분량의 20%밖에 안 되었는데도 인공지능은 그 웹툰이 베스트셀러가 될 확률을 예상하는 시대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우리 일상과 가까운 곳에서 지금 인공지능이 시도하고 있는 것만 모아 이야기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은 분명히 바둑의 영역을 넓혔습니다. 그러나 바둑의 개성은 조금 획일화시킨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으로 바둑을 즐기지 않고 연구하지 않는 이유도 아마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여기서 우려가 하나 생깁니다. 인공지능이 만약 바둑의 개성을 위축시켰다면, 인공지능은 혹시 바둑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그런 역할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인공지능이 더 효율적인 것을 찾기에 사회는 더 경제적이 되겠지만, 개성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은 정말 괜찮은 일일까요?

대학 때 친구와 오랜만에 수담(手談: 서로 상대하여 말이 없이도 의사가 통한다는 뜻으로, 바둑을 이르는 다른 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수담이란 말처럼 바둑을 둘 때면 서로 마음을 떠보기도 합니다. 형세가 나에게 너무 유리한 것 같을 때 상대가 전쟁을 걸어오면 같이 난타전을 벌이며 또 한 판 신나게 전투를 하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은 한 번 유리하게 된 바둑을 난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하겠지만, 사람의 수담(手談)은 또 한 번 상대의 도전을 받아들이기도 하며 승률 80% 상황을 승률 50% 이하로 만들어버리며 상대와 또 한 번 어울리는 멋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멋을 주장하는 것이 구태의연한 발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저는 그것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할 수 있지만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져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져준다는 것은, 혹시 질 수도 있지만 져도 괜찮다는 마음에서 져주는 것을 말합니다. ‘미필적 고의’와 비슷한 개념의 패배 말입니다. 초등학생 아들과 바둑을 둘 때 한두 집을 지거나 비기거나 할 때가 있습니다. 대마를 잡고 이기는 기쁨보다 아슬아슬하게 한두 집을 질 때의 즐거움도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손으로 대화한다는 의미로 바둑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승리가 목적이기에 그렇게 져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프로기사의 실력을 끌어올렸습니다. 앞으로도 인공지능을 좋은 선생님으로 잘 활용하는 기사들의 성적이 더 좋아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개성과 취향은 점점 무뎌져 갑니다. 그럼, 아마추어에게 바둑은 어떻게 변해가는 것일까요? 아마추어가 바둑을 두는 이유가 꼭 이기는 것이 아니라, 바둑 자체를 즐기는 마음이 더 크다면, 바둑은 여전히 매력적인 존재입니다.

프로기사를 상대로 두세 점 차이로 앞서가는 인공지능을 따라잡는 것은 프로도 아닌 아마추어에게는 더욱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지고, 이제는 그냥 즐겁게 두다가 잘 지기도 하면서 사람만의 바둑을 즐기는 것이 바둑에서 남은 저의 외길 수순인 것 같습니다.

‘다케미야의 우주류로!’ ‘이번 판에는 조치훈 9단의 지하철 바둑으로!’ ‘이번에는 향소목 포석으로!’ ‘속임수가 즐비한 외목 포석으로!’ 개성 넘치고, 취향이 있는 포석이 프로의 세계에서는 사라져가고 있지만 아마추어인 저에게는 아직 그것을 즐길 권리가 남아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김동민 기자 YTN 디지털센터장 kdongmin@ytn.co.kr

취재에 협조해주시고 도움말 주신 목진석 바둑 국가대표팀 감독, 김영삼 한국기원 사무총장, 박하민 6단, 이호승 4단, 차영구 한국기원 홍보팀장, 홍보팀 조범근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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