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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수교협상이 한창이던 1964년 오늘, 서울지역 대학생 5천여 명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중지하라며 시위를 벌인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을 조만간 타결짓고 다음 달인 1964년 4월에 조인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대학생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섰다.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한일회담 관계자들에 대한 화형식이 치러졌다.
시위는 24일에 이어 25일도 계속됐으며, 사흘째인 26일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돼 16개 도시에서 대학생 4만3천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26일 특별담화를 발표해 '학생들의 우국충정은 이해하지만 시위는 외교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며 한일회담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한다.
이 때문에 중・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할 정도로 분위기가 격해진다.
4년 전의 4.19혁명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정부가 결국 일본에 가 있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귀국을 지시하면서 급진전되던 한일회담이 소강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5년 2월 20일 시이나 일본 외무장관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함으로써 결국 한일회담은 타결된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을 조만간 타결짓고 다음 달인 1964년 4월에 조인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대학생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섰다.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한일회담 관계자들에 대한 화형식이 치러졌다.
시위는 24일에 이어 25일도 계속됐으며, 사흘째인 26일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돼 16개 도시에서 대학생 4만3천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26일 특별담화를 발표해 '학생들의 우국충정은 이해하지만 시위는 외교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며 한일회담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한다.
이 때문에 중・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할 정도로 분위기가 격해진다.
4년 전의 4.19혁명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정부가 결국 일본에 가 있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귀국을 지시하면서 급진전되던 한일회담이 소강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5년 2월 20일 시이나 일본 외무장관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함으로써 결국 한일회담은 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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