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보이거실화냐] 엄마는 죽고 아빠는 불구 됐는데…“반자율주행 때문”이라니

[제보이거실화냐] 엄마는 죽고 아빠는 불구 됐는데…“반자율주행 때문”이라니

2021.06.05. 오전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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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매를 모두 독립시킨 뒤, 쉬는 날이면 종종 오붓하게 여행길에 오르곤 했던 이영재-권세은 씨 부부. 이 씨 부부는 지난해 6월 22일 새벽에도 모처럼 충남 논산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수원-광명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창밖에서 불어온 시원한 밤공기가 부부를 한껏 들뜨게 했습니다. 설레는 야간 여행길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침은 무얼 먹을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뒤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온 승용차가 순식간에 부부를 덮쳤습니다.

차량이 반파될 만큼 엄청났던 사고 충격으로, 아내 권 씨는 끝내 세상을 떠났고, 남편 이 씨는 하반신이 마비돼 걸음을 걷지 못하게 됐습니다.

가해 운전자는 중고차 딜러인 23살(당시 나이) 김 모 씨였습니다. 술기운에 꾸벅꾸벅 졸던 김 씨는 시속 약 190km로 과속까지 하다 사고를 냈습니다. 김 씨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43%, 면허 취소 수준의 만취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사고 직후 차를 세우지 않고, 무려 1km 가량을 더 나아갔습니다. 사고 이후 15분이 지나서야 비틀거리며 피해 차량 쪽으로 돌아온 김 씨. 그런데도 김 씨는 음주 사고를 낸 건 맞지만, 절대 도망친 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반자율 주행 기능을 사용하고 있었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 ‘보닛이 올라와있어 앞을 보지 못 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는 등 사고 현장을 자의로 이탈한 게 아니라며 변명에 변명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지난 2월, 1심 재판부는 “도주의 범의도 인정된다”며 징역 7년을 선고했습니다. 그런데도 가해자 김 씨는 하루 만에 항소장을 제출했고, 뺑소니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습니다.

“시속 190km 속도로 주행됐었고, 사고 충격으로 엔진이 완전히 파손돼버렸잖아요. 브레이크니 뭐니 아무것도 안 됐었고, 타력 주행됐던 거고요. 1km 가량 가긴 했는데, 거기가 약간 굽어진 데다 내리막길이에요. CCTV 보시면 브레이크 잡는 게 다 보여요. 브레이크가 제대로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에 대해서 기술적으로 잘 알 수가 없는 거잖아요.”
- 가해자 측 변호사

하지만 CCTV를 본 전문가 의견은 달랐습니다.

박병일 자동차 명장은 “브레이크를 밟는 게 차를 세우려는 의도였다기보다는 앞에 있던 장애물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보통 브레이크가 안 들으면,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반복해서 밟기 마련이에요. 차를 세우려면 브레이크 밟는 시간이 길고, 여러 번 밟는 신호가 들어왔어야 하는데, 딱 들이받았을 때랑 코너 쪽에서 짧게 밟는 게 나타나는 걸 봐선 차를 세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죠.”
- 박병일 자동차 명장

당시 가해 차량을 견인했던 기사 역시 가해자 주장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사고 발생 지점부터 가해 차량이 서있던 곳까지가 커브 구간인데, 거기를 가드레일이나 중앙분리대 충돌 없이 갔다는 건 차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차를 운전해서 갔다는 거거든요.”
- 박 모 씨, 가해차량 견인차 기사

가해자 김 씨는 또 1심 재판부에 아홉 차례, 항소심 재판부에 두 차례 반성문을 제출했지만, 피해자 가족에게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과는 일체 없었어요. 전화라도 해서 사죄할 줄 알았더니 전화 한 번 없더라고요. 1심 공판 당시 직접 갔던 적이 있어요. 아들 말로는 그때 가해자 아버지가 왔다더라고요. 근데 그때도 본체만체 하더라고요.”
-피해자 이영재 씨

또, 아들 이정식 씨는 어머니 장례를 치르느라 경황이 없던 와중에도 경찰이 해야 할 일을 직접 대신해야 했습니다. 아버지 차량의 블랙박스는 찾아보지 않았고, 사고 현장 CCTV마저 확보하지 않았다는 경찰 조사관에게만 사건을 맡겨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씨는 끔찍한 사고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아버지 차량을 마주한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화목했던 가족을 망가뜨린 비극의 원인을 찾고 싶었습니다.

슬픔을 겨우 다독이며 블랙박스 영상을 찾아낸 이 씨는 사고현장 CCTV 위치도 직접 파악했고, 그제야 경찰은 가해자의 뺑소니 혐의를 추가했습니다.

“너무 화가 났죠.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가해자가 현장에서 벗어난 걸) 평생 모르고 지나갔을 거 아니에요. 담당 수사관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긴 했는데, 경고 처분에 그쳤대요.”
- 피해자 아들 이정식 씨

피해자 이영재 씨는 대수술 후 1년 가까이 병원에서 힘겨운 재활 치료를 받고 있고, 막대한 치료비는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사망보험금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사고 후 사흘 만에 의식을 회복해 가장 먼저 아내를 찾았던 이 씨는 코로나 때문에 한 번도 아내의 납골당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최근 아들과의 영상 통화로나마 아내가 잠들어있는 곳을 겨우 마주했지만,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제보이거실화냐] 엄마는 죽고 아빠는 불구 됐는데…“반자율주행 때문”이라니

“직접 가보지도 못하는 상황이니까 마음이 더 찢어지죠. 쉬는 날이면 맨날 집사람하고 돌아다녔는데 갑자기 반쪽을 잃고 나니까…. 나가면 너무 막막할 것 같아요. 음주 운전 처벌 수위를 높여서 술 먹고 운전하는 일이 두 번 다시는 없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 피해자 이영재 씨

“처음에는 날마다 어머니가 살아 돌아오시는 꿈을 꿨어요. 너무 힘들어서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고요. 우리 가족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는데, 가해자는 겨우 7년 살고 나오면 끝이잖아요. 그나마도 어떻게든 형량을 줄여보려고 하는 걸 보면 너무 괘씸하고 억울해요. 음주운전은 타인의 삶을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걸 깨닫도록 처벌 수위가 훨씬 강화돼야 합니다.”
- 피해자 아들 이정식 씨


촬영, 제작: 강재연 PD(jaeyeon91@ytnplus.co.kr), 안용준 PD(dragonjun@ytnplus.co.kr)
취재: 강승민 기자(happyjournalist@ytnplus.co.kr), 권민석 기자(jebo24@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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