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일] 82년생 장한나 “지휘자, 실력 있으면 끝나는 거예요.”

[와이파일] 82년생 장한나 “지휘자, 실력 있으면 끝나는 거예요.”

2019.11.20. 오전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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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11살의 나이로 최연소 우승한 뒤 ‘신동’으로 첼리스트의 길을 걸어온 장한나. 거장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지금까지 만난 가장 천재적인 소녀 첼리스트”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죠. 그러나 이 천재 첼리스트는 2007년부터 지휘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 중, 독 3개국 청소년들로 구성된 연합오케스트라 지휘로 데뷔한 장한나는 2013년 카타르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을 맡았고, 2017년부터는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죠, 트론헤임 심포니의 상임 지휘자로서 활동하고 있죠.

현미경 vs 망원경

11살 콩쿠르 수상으로부터 이미 데뷔 25주년을 맞은 장한나가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첫 내한 공연했습니다. 공연 전 기자간담회가 있었는데요. 역시나 비슷한 질문들이 이어졌죠. 왜 첼리스트에서 지휘자로 전향했는지? 첼로 연주는 이제 들을 수 없는 것인지? 장한나의 대답은 12년 전 처음 지휘자로 방향을 정했을 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더 넓은 음악세계를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이번에 기사에 많이 인용된 현미경 vs 망원경 이야기가 나옵니다.

”첼로 독주 레퍼토리가 굉장히 적잖아요. 같은 곡을 반복해서 연주하다 보니 어느새 나의 시야가 좁아지는 건 아닌가 하는,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저는 솔직히 망원경을 보고 싶은데...“

대학 진학 무렵 고민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위대한 교향곡을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고 합니다.

”말러와 베토벤 교향곡 악보를 뚫어져라 보며 작곡가가 오케스트라 곡을 쓰면서 그 무한한 가능성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공부하다 보니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나도 이 훌륭한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어요.“


첼리스트 지휘자? …”양다리는 못 해요“

첼로 연주도 듣고 싶다는 팬심 섞인 질문엔 단호히 ’양다리는 못한다’고 말하더군요.

”세계 정상의 연주를 하려면 하루 10시간 공부해도 모자라요. 그만큼 공부량이 많아서 양다리를 걸칠 수 있는 상황이 못 돼요. 지금은 지휘에 몰두하고 있고요. 그렇지만 첼로는 음악적인 제 첫사랑이자 지휘자 삶까지도 가능하게 해준 것이 첼로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연주할 수 있지 않을까.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니까요.“

첼리스트였을 때 나의 기쁨이 있었다면, 지금은 우리의 기쁨을 발견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가 다 제각기 사정이 있는데, 이 무대 위에서 함께 연주하면서 호흡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꿈을 꾸고 이렇게 소리를 통해 하나가 된다는 게 우리의 기쁨 같고요. 너무 좋아요.“


‘82년생‘ 장한나…’여자‘가 아닌 ’실력‘으로

지휘자 장한나에게 쏟아진 질문 가운데는 유독 ’여성 지휘자‘에게 주어진 차별과 어려움에 대한 것이 많았습니다. 장한나는 클래식에서 여성 지휘자를 향한 차별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차별‘에 집중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분명했습니다.

”수많은 차별이 이 세상에 존재하죠. 주어진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자라서 또는 나는 동양인이라서, 나는 나이가 어려서 이런 것을 자꾸 생각하기보다는 ’나의 실력만이 길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실력 있는 지휘자 하면 끝나요, 그냥.“

그리고 강조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여자 지휘자들이 여자가 아니라 훌륭한 지휘자이기 때문에 지휘자로서의 영역을 개척해 나간다면 훗날 여자 지휘자는 ’여자‘라는 이유가 아닌 ’실력‘으로만 설 수 있는 자리가 넓어지겠죠.“


”베를린 필 지휘요? 해야죠. 합니다”

11월 13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첫 내한공연 무대에서 장한나는 기대했던 대로의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장한나의 첼로 공연 기억하실 텐데요. 예전에 어떤 아이가 ’연주 때 왜 그렇게 얼굴을 밉게 찡그리냐‘고 물었다고 하죠. 혹자는 여전히 불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전히 온몸으로 음악을 느끼고, 그 느낌을 표정에 가득 담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혼자만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그 마음을 눈빛과 지휘봉을 잡은 손끝에 담아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보냅니다. 공연 전, 장한나는 어떤 지휘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가장 필요로 하는 지휘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추구하는 소리는 모든 단원이 하나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라, 그 순간 이 음악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맥시멈 표현하는 것, 청중 객석 맨 끝에서도 전율이 있는 무언가를 전하는 소리, 그게 가장 중요한 음악의 철학이라고 생각해요. 소리가 왜 있어야 하는지. 무언가를 전달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죠.“

그의 말대로 무대 앞에 선 장한나의 에너지는 자신이 아닌 오롯이 단원들의 것입니다. 그와 단원이 주고받는 엄청난 교감이 멀리 떨어진 객석에도 전해집니다. 협연에 나선 피아니스트 임동혁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주자가 우선인 장한나의 애티튜드에서 이미 훌륭한 지휘자의 길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망원경으로 큰 음악을 더 보고 싶다는 ’마에스트라‘ 장한나. 지금 어디까지 왔을까요?“

“한국에도 ’베를린 필‘ 같은 오케스트라가 나올 수 있는 씨앗을 뿌리고 싶어요. 안정적으로 상주하는 홀에서 오로지 음악에만 장기적 비전을 갖고 있었던 카라얀의 베를린 필. 그런 미래가 있지 않을까 꿈꿉니다. 베를린 필 지휘요? 해야죠. 합니다.”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11월 13일, 예술의전당)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작품번호 16
피아니스트 임동혁 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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