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일]구명뗏목 떼놓고 항해? 1박 2일 '취재 실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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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8. 오전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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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일]구명뗏목 떼놓고 항해? 1박 2일 '취재 실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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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뗏목을 떼고 항해하는 배가 있어요!'

라고 YTN에 전화가 왔습니다. 사진도 받았는데요. 정말로 구명뗏목을 선착장에 두고 여객선이 바다로 유유히 나가고 있었습니다. 위험하다! 가보자! 해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1박 2일 출장을 떠났습니다.

[와이파일]구명뗏목 떼놓고 항해? 1박 2일 '취재 실패기'

도착해보니 정말 제보 사진과 똑같았습니다. 선착장에 구명뗏목 7개가 당당하게 놓여있고요. 그 앞에 배가 정박해 있었습니다. 매표소에선 표를 팔고 있었습니다. 현재 운항하고 있다는 얘기지요. 본격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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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착장에 놓인 위풍당당한 구명뗏목들


배에 타기 전 승객들이 대기하는 장소로 갔습니다. TV에선 구명뗏목 사용법이 영상으로 나오고 있었고요. 승객들이 참고하는 매뉴얼 책자엔 구명뗏목이 선미 쪽에 7개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구명뗏목도 없으면서 설명만 하다니….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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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기실 TV의 구명뗏목 사용법 설명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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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뉴얼 책자에는 구명벌(구명뗏목) 7개 있다고 적혀 있다


표를 끊어서 배에 탔습니다. (1시간 반에 약 2만 원) 이곳저곳 샅샅이 뒤졌습니다. 역시나 구명뗏목은 없었습니다. 빨간색 페인트로 '구명뗏목 탑승 장소'라고 적혀 있었지만, 구명뗏목 사용법과 개수가 적힌 표지판은 있었지만, 어디에도 구명뗏목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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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색 글씨로 적어놓은 '구명뗏목 탑승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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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명뗏목 사용법이 적힌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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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명뗏목 개수와 위치가 적힌 표지판


선원에게 물어봤습니다.

기자: 구명뗏목은 왜 선착장에 있는 거예요?
선원: 이 배에는 필요 없어요. 평수지역이라. 연해고 원양에 쓰는 건데 우리 배는 가까이 평수에 있어서 필요가 없는 거야.


평수, 연해.. 무슨 말이야? 싶으시죠. 저도 몰라서 나중에 찾아봤는데요. 쉽게 말해 평수는 육지에서 가까운 바다고, 연해는 그것보다 먼 바다입니다. 선원의 말을 해석하자면 '이 배는 가까운 바다를 운항하니까 구명뗏목이 필요 없다'라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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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명뗏목은 펼치면 이렇게 생겼다


그럼 구명뗏목이 필요 없는 배인데 구명뗏목을 애초에 왜 실었어? 거짓말이란 직감이 왔습니다. 필요 없었다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선박 내외부에는 구명뗏목의 개수, 위치, 사용법 등이 빼곡히 적혀 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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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착장에 외롭게 놓인 구명뗏목들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을 해경에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구명뗏목이 필요 없다는 선원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던 겁니다!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올해 초, 이 여객선은 항해 구역을 바꿨습니다. 원래는 먼바다도 갈 수 있는 배라 구명뗏목을 싣고 있었는데요. 이제는 가까운 바다만 가는 걸로 항로를 변경한 거죠. 그러면서 구명뗏목을 떼고 다른 구명장비를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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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배에 있는 구명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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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명부환 뒤에 보이는 구명부기


구명뗏목은 주로 먼 바다에서 긴급상황이 터졌을 때 승객들이 잠시 대피하는 고무보트입니다. 내륙에서 가까운 바다라면 구명조끼나 구명부환, 구명부기로도 충분합니다. 이 배에 있는 구명장비는 구명조끼 300여 개, 구명부환 40여 개, 구명부기 10여 개입니다. (여객선 책자 참조) 배에 직접 타서 하나씩 세봤는데 개수도 잘 맞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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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수 세어봤는데 다 맞음. 선원분이 거짓말했다는 기자 직감은 틀림


해당 배를 검사하는 기관에도 물어봤습니다.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구명뗏목을 뗀 건 합법적이고, 검사도 모두 정상적으로 이뤄졌다고 했습니다.

결국 취재는 실패했습니다. 취재기자와 촬영기자, VJ와 오디오맨, 운전기사까지 5명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6시간 동안 차를 타고 내려가서 취재했는데 말이죠. 물론 구명뗏목도 없는데 사용법 영상을 틀어놓고, 매뉴얼 책자에 적어놓은 건 문제긴 합니다. 하지만 안전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고 무엇보다 합법이었으니 원래 취지대로 기사를 쓸 순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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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해봤더니 안전했던 배


제보자님께 이런 과정을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몹시 죄송해하시더라고요. 저는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보해주신 분은 다른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용기 내서 YTN에 전화 주신 거였거든요. 저희는 그저 저희 일을 한 것뿐이고요. 결과적으로 이 배가 안전하단 걸 확인했으니, '기분 좋은' 실패가 된 거죠.

이런 용기 있는 제보자분들의 힘으로 YTN은 힘차게 굴러갑니다. '뭔가 이상하다?', '비리가 있는 것 같다?', '사고가 터진 것 같다?' YTN에 알려주세요.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이라면, YTN 기자들이 꼼꼼하게 확인하고 취재해서 보도할 겁니다. 이번처럼 '헛발질' 치면 어떡하냐고요? 괜찮습니다! '헛발질'도 여러 번 쳐봐야 언젠간 '큰발질'도 치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렇다고 지금까지 '큰 기사'를 써보진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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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자 한동오 hdo86@ytn.co.kr
촬영기자 이상엽
VJ 이경만
오디오맨 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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