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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걷다] (3) 서귀포 알뜨르 비행장, 쓸쓸함이 채워 버린 옥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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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걷다] (3) 서귀포 알뜨르 비행장, 쓸쓸함이 채워 버린 옥토

2021년 01월 25일 18시 29분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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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걷다] (3) 서귀포 알뜨르 비행장, 쓸쓸함이 채워 버린 옥토
나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 때로는 더 강한 자극을 가하는 게 정답일 수 있다.

한여름에 먹는, 인삼 한 뿌리가 들어간 뜨끈한 삼계탕, 그렇지 않아도 매운 고추를 고추장에 듬뿍 찍어 먹기, 피로한 몸을 뜨거운 열탕에 담그고선 “으어! 시원하다!”라고 외치기 등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겠다.

쓸쓸함과 고독을 자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아예 쓸쓸함으로 가득 찬 곳을 머물고 걷다가 쉬는 것도 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걷다] (3) 서귀포 알뜨르 비행장, 쓸쓸함이 채워 버린 옥토

제주를 다녀온 여행객이라면 대부분 알겠지만, 제주공항은 이미 포화 상태. 그래서 서귀포 쪽에 공항을 하나 더 지을 것인가를 두고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이미 서귀포에는 비행장이 있었다. 민간인이 이용할 수 없는 곳이긴 했지만.

그리고 지금은 "여기가 한 때 비행장이었다니" 싶을 정도로 조용하다 못해 쓸쓸함만이 남은 공간이 돼버렸지만 말이다.

내비게이션에 '알뜨르비행장'을 치고 차를 몬다.

차는 어느 새 흙먼지 날리는 좁은 도로, 뭍에서는 시골에서조차 보기 어려운 비포장 농로를 달리고 있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쯤이면,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말과 함께 안내가 끝난다.

황량한 벌판, 휴식을 취하고 있는 농기계 한 대... 어리둥절 주위를 둘러보니, 과거 공항에서 쓰였을 법한 폐건축물들이 눈에 띈다. 아! 제대로 온 것 맞긴 하구나.

[다시, 걷다] (3) 서귀포 알뜨르 비행장, 쓸쓸함이 채워 버린 옥토

알뜨르는 '아래 쪽 넓은 뜰'이라는 의미의 제주 방언이라고 한다.

농지와 목초지로,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 곳. 하지만 일제는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이 일대를 군용 비행장으로 만들었다. 활주로가 깔리고 격납고가 들어섰다.

일본에서 온 전투기가 알뜨르에서 주유를 하면 중국 공습이 가능했다는 이야기, 2차 세계대전 후반부 ‘가미카제’ 조종 훈련이 알뜨르에서 진행됐다는 이야기... 쓸쓸한 가운데 가슴이 아려오는 이야기다.

일제가 이 땅에서 물러난 뒤에도 알뜨르는 한동안 군사 기지로서의 역할을 이어나가야 했다. 6.25 전쟁 때문이다.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가 ‘제2훈련소’로 불리던 시절, ‘육군 제1훈련소’는 제주에 있었고, 알뜨르는 이 ‘제1훈련소’의 훈련장으로 이용됐다고 전해진다.

제1훈련소가 해체된 게 1956년.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06년, 격납고와 지하벙커는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다.

삶의 터전이었던 옥토에 전투기가 뜨고 내리는 모습, 군인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마을 주민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폐허가 돼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는 관제탑과 벙커, 그리고 다시 농토의 모습을 되찾은 옛 활주로의 모습을 보며 상상만 해볼 뿐이다.

[다시, 걷다] (3) 서귀포 알뜨르 비행장, 쓸쓸함이 채워 버린 옥토

벙커가 개방돼 있어 한 번 들어가 본다.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콘크리트 벽만 남은 공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온 몸을 휘감는다.

차를 타고 들어온 길을 따라 무작정 걸어본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정말 전투기 한 대 들어갈 만한 공간의 동굴이 나온다.

전쟁의 흔적에 대한 거부감일까. 아니면 저 모양 자체가 기괴하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평화로운 농토 위의 버려진 군사시설이라는 극도의 부조화 때문일까.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름이 온 몸을 뒤덮는다.

[다시, 걷다] (3) 서귀포 알뜨르 비행장, 쓸쓸함이 채워 버린 옥토

제주 올레길 제10코스이기도 한 이 일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제주 셋알오름 일제동굴진지가 나온다.

여러 입구가 있지만, 현재 안전상의 이유로 모두 막혀있어서 직접 들어갈 수는 없다.

도롯가 안내표지판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문을 찾아볼 수 없다. 역사 현장 탐방을 위해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도 있을 텐데. '헛걸음'을 막기 위한 배려가 아쉽다.

이 와중에도 주변 농토와 산지는 그저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TRAVEL TIP : 눈치 챘겠지만, 알뜨르비행장 일대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다. 상점은 물론이거니와 화장실조차도 찾기 어렵다. 고독을 씹으며 차 한 잔 하고 싶다면, 미리 준비해 와야 한다. 급한 용무는 당연히 다른 곳에서 해결하고 오는 것이 좋겠다.

역사 체험이나 현장 학습 등의 목적이 아니라, 그저 휴식을 위해 알뜨르를 찾는다면, 여행 마지막 날은 피하는 걸 추천한다. 공항에서 멀다는 문제도 있지만, 이 일대를 걷고 나면 분명 술 한 잔이 몹시 당길 것이기 때문이다.

트래블라이프=진영택 evrywhere@travel-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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