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스탠리의 노부부가 남긴 여운

홍콩, 스탠리의 노부부가 남긴 여운

2019.05.16. 오전 11:43
댓글
글자크기설정
인쇄하기
홍콩, 스탠리의 노부부가 남긴 여운
AD
빅버스 그린라인을 타면 빅토리아 피크에 제일 먼저 도착한다.

홍콩의 가장 유명한 명소지만 처음 홍콩에 왔던 지난해엔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들에 떠밀려서 몇 시간을 줄서서 기다리는 건 도저히 할 짓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야경은 뭐 침사추이에서 바라보는 홍콩섬 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가 오락가락 하는 금요일 낮 시간이라면 뭐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번엔 정상으로 오르는 트램에 몸을 실었다.

홍콩, 스탠리의 노부부가 남긴 여운

어쩌면 이 트램 자체가 홍콩의 역사이자 문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빅토리아 피크에서 보이는 전망에 맞춰서 홍콩섬의 도시계획은 이뤄졌을 터.

시간만 많다면 걸어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알다시피 마음뿐이다. 하산하는 길이 어딘지도 모를 뿐더러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내려가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우리네 인생과 마찬가지로 알 길이 없는 게 여행일텐데, 이제 대놓고 낯선 길을 가기엔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밀려든다.

홍콩, 스탠리의 노부부가 남긴 여운

게다가 인생의 그 낯선 길에서 여러 번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려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새로움을 거부하면 인생이 재미없다는 걸 안다.

재미가 없을 뿐더러 아무런 상상력도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다.

똑같은 생각과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가 죽어나가는 걸 무력하게 지켜봐야 한다.

홍콩, 스탠리의 노부부가 남긴 여운

두 번째 정류장인 리펄스 베이의 바다는 한적한 시골 어촌의 모습이지만 주변 풍경은 그게 아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비싸보이는 별장과 콘도와 리조트들이 병풍처럼 둘러 쳐져 있다.
딱히 인상적일 건 없다.
오히려 풍경보다는 이 거친 날씨 속에서도 수영하는 몇몇 동남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부럽다.

홍콩, 스탠리의 노부부가 남긴 여운

행복지수를 어떻게 계량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누군가는 그 숫자에 열을 올리고 누군가는 저렇게 삶을 즐긴다.
빗줄기는 스탠리에서 더욱 강해진다. 쇼핑과 먹거리의 천국이라지만, 도저히 어딜 나갈 여건이 되지 않는다.

'별다방'을 비롯한 실내 공간에만 사람이 미어터진다.

옆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던 70대 노부부와 눈이 맞았다.

80대 일지도 모르겠다.

홍콩, 스탠리의 노부부가 남긴 여운

'바닷가 나가보셨어요?' 그가 물었다.
' 이 날씨에는 도저히 못 나가볼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네요. 스탠리에 두번째인데 두 번 다 비가 와서 이러고 있네요'

홍콩, 스탠리의 노부부가 남긴 여운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듯한 부부의 모습은 다정했고, 여행내내 여운으로 남았다.
나도 그들처럼 평온한 웃음과 여유로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린라인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애버딘은 그냥 건너뛰었다.
젖은 옷이 간신히 말라오고, 시간도 애매하다.
빅버스가 출발지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비가 내린다.

안개와 운무가 뒤섞인 듯한 어두운 하늘에 천둥까지 요란하다.

홍콩, 스탠리의 노부부가 남긴 여운

그래도 한번 와 봤다고 미드레벨로 가는 발걸음이 익숙하다. 사실 어디로 가는지 알 필요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향하는 곳이어서 따라만 가도 된다.

소호의 주점에서 스테이크에 칵테일 한잔 하며 홍콩을 생각한다.
이상하다, 딱히 탄성이 튀어나오는 멋진 경관을 본 적도 없고, 집으로 돌아가서까지 떠오르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것도 아니고,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홍콩은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정말 그렇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