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앤피플] “시는 자의식을 담는 그릇” 이기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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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4. 오후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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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앤피플] “시는 자의식을 담는 그릇” 이기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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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차지만 시인이 걷는 이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기철(74) 시인이 신작 시집 ‘흰 꽃 만지는 시간(민음사)’을 펴냈다. 자연과 사물의 생명력, 삶의 의미를 시에서 찾는다.

이기철 시인은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청산행’,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등을 발표했다. 또한 김수영문학상, 시와시학상, 최계락문학상, 후광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시·문학계의 인정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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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꽃은 뜰에 온 나무의 첫마디 인사다 / 그런 날은 사람과의 약속은 꽃 진 뒤로 미루자 / 누굴 만나고 싶은 나무가 더 많은 꽃을 피운다 / (...) / 아름다운 사람이 앉았다 간 자리마다 / 다녀간 꽃들의 우편번호가 남아 있다 / 풀잎으로 서른 번째 얼굴을 닦는다 / 내일모레 언젠가는 그들이 남긴 주소로 손등이 발갛도록 흰 잉크의 편지를 쓰자 (p.48 흰 꽃 만지는 시간)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이기철 시인에 대해 "우리 시단에 서정시의 기품과 깊이를 지속적으로 부여해 온 대표적인 중진이며, 근원성을 지향하는 맑고 푸른 위의(威儀)를 이어온 서정의 사제"라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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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기철 시인과의 일문일답이다.

Q. 18번째 시집 '흰 꽃 만지는 시간'이 나왔는데, 어떤 주제의 시들이 담겼나?

이번 시집에는 총 73편의 시가 들어있다. 늘 그렇듯이 전 크고 무겁고 어려운 주제보다, 작고 낮고 겸허한 주제를 찾는다. 일상, 사물, 목숨의 소중함,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서 소재를 찾는 경우가 많다.


Q. 이번에 발표하신 시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시를 꼽는다면?

시는 제게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면 아들과 딸인데, 그중 어느 자식에 가장 애착이 가는지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우선 ‘흰 꽃 만지는 시간’, ‘속옷처럼 희망이’, ‘시인이 걷는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슭에서의 사색’, ‘시 쓰는 일’ 등이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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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태초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을 주로 표현하시는데, 생명의 근원을 노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데도 제 목숨을 가꾸고 갈무리하며 사는 여리고 작은 생명들이 흩어져 있다. 그것을 시인이 아니면 누가 발견하고 기릴 수 있는가? 우리 시사(詩史)에서는 1930년대 후반에 ‘생명파’로 분류되던 시인들이 있었다. 그분들이 ‘전기 생명파’라면 저는 ‘후기 생명파’로 불리고 싶다.


Q. 시 쓰는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평소 시상의 원천은 무엇인가?

틈날 때마다 산책을 하며 시를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침, 저녁 산책길을 비롯해 혼자 있는 밤, 다른 사람이 쓴 좋은 글을 보면서 시상을 얻는 편이다. 더 근원적으로 본다면 주위의 잊혀가는 생명들, 설령 그것들이 지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아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작은 숨소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시상의 원천이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를 쓰는 일이 시작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섬광(閃光)처럼 오는 그 순간을 스스로 포착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또 필요한 일이다.


Q. 한 평생 시인의 길을 걸어오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시집’을 세상에 내는 일이 가장 조심스러운 일이다. 시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담는 그릇이고, 시집은 산고 끝에 낳은 자식과 같다. 그러나 어렵게 시집을 내도 독자와 언론의 반응, 나아가 시집이 얼마나 잘 팔리는지 등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러 고난과 예상 못한 과정 속에서도 시집을 꾸준히 내면서 세상과 독자와 소통하는 일은 중요하면서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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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앞으로 작품 계획이 궁금하다.

꾸준히, 힘이 닿는 한 시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시대와 사회가 변해도 시는 불변의 진리를 품고 있다. 저 역시 지금까지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나아갈 것이다. 그동안 쓴 시가 1,450 편쯤 되는데, 가능하다면 새로운 시를 쓰겠다는 일념으로 하루를 산다. 이번 시집에 담긴 시 ‘시 쓰는 일’에서 저는 이렇게 썼다.

"시 쓰는 일은 나를 조금씩 베어 내는 일 / 면도날로 맨살을 쬐끔씩 깎아 내는 일 / 입천장, 겨드랑이, 사타구니, 항문까지 / 쬐끔씩 발라내는 일 / (…) / 주검까지 가다가 죽지는 않고 / 절뚝이며 휘청이며 돌아오는 일 / 시 쓰는 일"

[YTN PLUS] 취재 공영주 기자, 사진 정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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