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사북 항쟁..."원인은 광부 향해 돌진한 경찰차"

1980년 사북 항쟁..."원인은 광부 향해 돌진한 경찰차"

2021.04.21. 오전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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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4월 ’사북항쟁’…광부와 주민 6천 명 농성
노조 선거 무효·임금 인상 요구…경찰과 충돌
계엄사 수사단 진압 과정서 물고문·폭행 자행
부녀자 40~50명 연행…성적 유린·학대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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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오늘이 4월 21일이죠.

잘 모르는 분이 많겠지만 1980년 오늘, 강원도 정선 탄광 지역에서는 광부들을 중심으로 '사북항쟁'이 발생했습니다.

'사북항쟁'은 그동안 어용노조를 둘러싼 갈등과 농성 정도로 치부된 경향이 있었는데, 지역 인권단체가 조사해 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지 환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광주 민주화 운동 한 달여 전인 1980년 4월 21일.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 광부와 가족 6천 명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노조지부장 부정선거 무효와 임금 인상을 요구했습니다.

사북 읍내를 점거한 이들은 경찰과 충돌해 경찰관 1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습니다.

그런데 당시 증언과 기록을 조사해보니 노사 문제가 주민 항쟁으로 번진 데는 다른 계기가 있었습니다.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진 차량 사진.

이른바 정보형사로 불리던 당시 정선경찰서 소속 사복경찰관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노조원 동향을 감시하던 사복 경찰관 3명이 현장에서 도주하다 광부들에게 돌진해 2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황인욱 / 정선지역사회연구소 : 노조 사무실에서 사복 경찰 3명이 동향 탐지하다가 광부들에 의해 지목을 받고 호통을 들으니까 도망가면서 지프 차로 노동자 서너 명을 깔아뭉갠 거죠.]

당시 신군부는 이 사실을 단순 교통사고로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공권력이 침해됐다며 계엄사령부 합동 수사단이 사북에 들이닥쳤습니다.

광부와 그 가족 150여 명은 정선경찰서 임시조사실에서 물고문과 폭행을 당했습니다.

40~50명은 부녀자들이었고, 성적 유린과 학대, 희롱도 이어졌습니다.

[故 이명득 / 사북 항쟁 고문 피해자 : 곤봉대를 가지고 음부 쪽을 후려 때리고 이만큼 팬티가 내려가면 이놈도 만지고 저놈도 만지고.]

이웃 공동체가 파괴되며 당시 피해자 상당수는 탄광을 떠났고, 40년이 넘게 흐른 지금은 많은 사람이 숨졌습니다.

지난 2008년 진실 화해 위원회는 사북 항쟁에 대한 국가 사과를 권고했지만, 정부는 아직 아무 답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YTN 지환[haji@ytn.co.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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