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일] 불멸의 롤랑가로스 14회 우승…이별을 준비하는 '흙신'

[와이파일] 불멸의 롤랑가로스 14회 우승…이별을 준비하는 '흙신'

2023.05.20. 오전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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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슬램 최다 우승..부상 장기화
-18년 개근 프랑스오픈 첫 불참
-세월 실감..저무는 '20년 빅3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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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얘야), 쟈(저 아이)는 왜 저렇게 추접노(지저분하니)?" 2013년 10월 베이징 특파원 시절, 차이나오픈테니스 경기장에 어렵게 모신 당시 칠순 노모의 첫 마디였습니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어머니가 언급한 선수는 다름 아닌 차이나오픈의 영웅 라파엘 나달. 서브 할때마다 엉덩이 부분과 코 등을 수차례 만지는 특유의 루틴 때문이었죠. 당시 베이징을 강타한 역대급 스모그 탓에 직관 시간은 짧았지만, 평생 처음 테니스를 구경한 모친의 평가는 이처럼 솔직(?)했습니다.

'18년 개근' 프랑스오픈 불참..복귀 시점도 미정
노모를 기절초풍시켰던 문제의 루틴

그 뒤로 꼭 10년, 치렁치렁하던 긴 머리 청년은 어느덧 군데군데 머리가 빠진 장년으로 접어들었고 메이저 22승의 GOAT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텃밭인 프랑스오픈 15번째 챔피언 도전의 갈림길에서 개막을 일주일 여 앞두고 전격 불참을 선언해 전세계 테니스 팬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재활 끝에 복귀한 올 초 호주오픈 조기 탈락 이후 넉 달 이상 두문불출, 부상 치료에 매진했지만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죠. 내년을 은퇴 시점으로 못 박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얼굴은 어두웠습니다. 우리 나이로 38살에 여전히 황소처럼 코트를 누볐던 라파. '못 받는 공이 없다'라고 할 만큼 체력과 코트 커버력을 앞세웠던 경기 스타일이 끝내 다리와 상체를 연결하는 고관절 부위의 과부하로 이어졌습니다.

화려한 경기스타일..거스를 수 없는 세월
중력을 거스르며 프로 22년을 지탱했던 고관절

사실 엉덩이뿐 아니라 나달의 부상 이력은 유명합니다. 10대 시절부터 온몸을 던지듯 공을 수비하고, 상대가 질리도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정신력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습니다. '마라톤맨' 앤디 머레이 역시 선수들에겐 치명적인 고관절 수술을 받고 극적으로 복귀한 걸 고려하면 나달의 몸이 여태까지 버틴 것이 기적이죠. 지난해 롤랑가로스 결승 역시 진통제를 맞고 극적인 부상 투혼을 발휘하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코로나 팬데믹은 노장을 괴롭혔습니다. "몇 개의 메이저 타이틀, 중요한 대회 정상을 차지했지만, 과거처럼 연습을 즐길 수 없었습니다. 몸이 버티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일상생활도 즐기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끊임없는 육체적 고통이 저를 멈추게 만들었습니다."라고 털어놨습니다. 외신들은 대체로 잘한 결정이라고 전했습니다.

메이저 최다 22승 금자탑..부단한 자기계발
부상 부위만 20곳 이상..'부상병동'

10대 시절의 성공 덕에 'El Nino ('소년')이라는 별명으로 시작해 'King of clay'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불굴의 투혼을 강조해 아예 전신(戰神 '전투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보다는 '부상 병동'이라는 표현이 조금 더 와닿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랜드 슬램 최다 우승의 기나긴 여정에서 끊임없이 기술 발전을 이뤄냈다는 점입니다. 압도적인 톱스핀을 앞세워 공이 느린 클레이코트의 제왕으로 군림했지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약점으로 평가되던 서브를 몇 년에 거쳐 조금씩 교정하고, 랠리보다는 체력 부담이 적은 속전속결 모드를 장착했습니다. 토스를 좀더 앞으로 해서 공격적으로 전환하고 네트 플레이도 자주 하는 것으로 바꾼 거죠. 모두가 '나달은 끝났다'라고 평가했던 지난해, 놀랍게도 2개의 그랜드슬램 트로피를 들어올렸습니다.

불멸의 롤랑가로스 14회 우승
간결하지만 더 위력적으로 변한 서브

112승 3패, 승률 97.4%. 18년간 롤랑가로스의 붉은 흙 위에서만큼은 '인간계'가 아닌 '신계'에 가까웠습니다. 오죽하면 아직 30대인 나달의 대기록을 기념해 동상까지 만들었을까요? 이번 프랑스오픈을 앞두고 나달 은퇴설이 돌면서 센터코트 입장권은 대기자만 20만 명을 넘었습니다. 프랑스오픈 특징이 4대 슬램 중 유일하게 우승자의 국가를 연주하는 것인데, 프랑스인 미디어 담당자들이 "난 프랑스 국가보다 스페인 국가를 더 많이 들었다"라는 농담을 할 법도 합니다.


38살 흙신..실력과 인성 모두 최고!
2021년 5월, 전매특허 호쾌한 포핸드 스윙

복귀 시점을 알 수는 없지만 내년이 마지막 시즌이라며 은퇴를 공언했습니다. 아쉽지만, 팬들은 '86년생에 불혹을 바라보는 흙신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할 듯 합니다. 매년 6월 3일 프랑스오픈에서 생일 케이크를 받아들던 모습도 올해는 볼 수 없습니다. 특유의 다이내믹한 플레이, 그리고 삼촌 토니의 엄한 교육 탓에 라켓 한번 부러뜨린 적 없는 경기 매너로 실력과 인성 모두 역대 최고의 스타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지금은 오제-알리아심을 지도 중인 삼촌 관련 사족 하나. 어릴 때 힘이 약해 양손 포핸드였던 나달. 공을 잘못 넘기자 "양손 포핸드는 없으니 바꿔보렴."이라고 권했고, 나달 본인이 보다 편한 왼손을 잡게 됐다고 자서전에 나옵니다. 골프는 오른손, 축구는 왼발인데 말이죠. 삼촌이 "왼손이 유리하니 왼손으로 쳐라." 유도한 게 아니라 자기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연스런 선택이었다는 걸 강조한 겁니다.

특유의 세리머니..이젠 볼 수 없는 건가요

저는 2016년 이후 7년 만에 두 번째 프랑스오픈 직관을 앞뒀습니다. 출국을 눈앞에 두고도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나달의 불참 소식과 함께 쏟아지는 반환표에 이제는 편히 준비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영원한 페더러 팬이라 나달의 최대 RPM(분당 회전) 5,500의 궤적 높은 왼손 포핸드 톱스핀이 황제 페더러의 백핸드를 무력화할 때마다 한숨을 내쉰 것도 더 이상 없을 아련한 기억입니다. 그렇지만 페더러도 가고 나달도 (곧) 떠나고. 삼두마차, 트로이카처럼 세계 테니스계를 20년 가까이 평정했던 '빅3'의 해체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저 역시 팬들과 함께 벌써부터 나달을 그리워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Vamos, Rafa!"
(사진출처 : 롤랑가로스 ATP AP 르몽드)



YTN 서봉국 (bksuh@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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