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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브라질 월드컵, 이제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첫 경기, 하루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8회 연속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진출을 했잖습니까.
이번에 아시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또 세계에서도 6개 나라만 갖고 있는 진기록, 대기록이라고 합니다.
[앵커]
그때 그 시절 월드컵, 한국의 월드컵 도전 역사를 되짚어 보겠습니다.
신명철 스포츠 평론가와 함께 합니다.
어서오세요.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드디어 스포츠의 계절이 온 것 같네요.
맨 처음 우리가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게 언제였죠?
[인터뷰]
축구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들 기억하고 계시죠.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인데요.
하나만 추가적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하나 가르쳐 드리려고 하는데요.
일제강점기이기는 합니다마는 1938년에 제3회 프랑스 월드컵이 있었는데 일본이 이 대회에 출전 신청을 했다가 막판에 출전신청을 포기했어요, 그때가 2차 중일전쟁이 일어날 무렵인데 그때 만약에 일본이 예선이기는 하지만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을 했다면 그때 일본축구협회가 말하자면 일본 대표팀이죠.
거기에 우리 조선인 선수들도 꽤 많이 포함을 한 40여 명이 예비명단을 했을 때 우리 한국선수, 조선선수가 4, 5명 정도가 포함이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축구팬들이 아시는 스위스월드컵 때 처음 출전했던 우리한국 선수들 외에 그분들의 더 선배분들이 어쩌면 아시아예선을 통과를 하셔서 일본이 프랑스 월드컵에, 제3회 대회입니다마는 갔을 수도 있겠다하는 사실을 우리 축구팬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면 일제강점기 때도 우리 선배 축구인들이 참 공을 잘 차셨구나.
잘하는 김영식 선생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그당시에 활동을 하셨습니다.
[앵커]
일본 이기고 와서 퍼레이드 장면이 나가고 있는데요.
[인터뷰]
이게 그러니까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에서는 원래는 한국, 일본, 대만이 출전 신청을 했는데 포기를 했고, 그때 우리가 도쿄에 가서 두 경기를 모두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엄청난 반일주의 정책을 폈었고 그리고 한일 국교 정상화 되기 전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도쿄 가서 우리 두 경기를 해서 5:1로 이기고 2:2로 비겼는데 그때 감독이 출국하기 전에 청와대에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 말이 지금도 축구 역사상에는 회자가 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지면 요즘 이런 말씀은 안 하지만 대한해협에 빠져 죽겠다고 결의를 다지고 한거죠.
그때 가서 5:1로 이기고 2:2로 비겼는데 장년층 축구팬들은 기억하실 거예요.
그때 당시의 아시아의 황금발이라고 해서 최정민 선수를 비롯한, 작고하셨습니다마는 아주 우수한 축구인들이 가볍게 일본을 꺾고 본선에 나서게 되죠.
[앵커]
그렇게 해서 스위스월드컵에서...
[앵커]
한일전의 승리는 큰 기쁨이었던 것 같은데.
[인터뷰]
그렇죠.
대승이었고요.
5:1로.
[앵커]
월드컵에서 우리가 언제 첫 골을 기록했는지 궁금합니다.
[인터뷰]
스위스 월드컵 가서 헝가리한테 0:9, 터키한테 0:7로 지지 않았습니까?
그때 홍덕영 골키퍼가 슛을 막느라 가슴이 다 얼얼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패를 하고 돌아왔는데 그때는 골을 아예 못 넣었으니까 그리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정말 오랜만에 우리가 월드컵본선에 진출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르헨티나 경기도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0:3으로 뒤지다가 박창선 선수의, 그 당시 화면이 나오는 모양이죠?
그때 우리가 0:3으로 뒤지다가.
[앵커]
아르헨티나인가요?
[인터뷰]
이것은 최순호 선수니까 이탈리아전입니다.
저기서 이게 들어가고 뒤에 또 허정무 선수의 추가 골이 있어서 강호 이탈리아와 우리가 2:3으로 지기는 했지만 팽팽한 경기를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박창선 선수는 아르헨티나한테 0:3으로 지다가 중거리 슛으로 골을 넣었으니까 우리나라로서는 월드컵의 첫 골이 되겠죠.
이 대회에서는 우리가 불가리아하고 1:1로 비겼습니다.
김종부 선수도 골을 넣었죠.
그런데 이것은 또 0:1로 뒤지다가 골을 넣었기 때문에 이게 선제골은 아니었고요.
어쨌든 김종부 선수의 골도 멕시코 월드컵 때 있었습니다, 그리고 멕시코 월드컵과 관련해서 또 한가지 상당히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때 80년대 중후반에는 차범근 선수가 독일 서독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었잖아요.
그때 국내 지금 축구팬분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분들이 있었어요.
뭐냐하면 차범근 선수를 불러와서 대표팀에 합류 시키느냐, 마느냐 가 그때 핫이슈였어요.
왜냐하면 우수한 선수를 대표팀에 당연히 뽑아야 되는데 요즘 축구팬들은 그게 무슨 말이냐 하실 텐데 팀워크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내세워서.
오랫동안 서독에 있어서 후배선수들하고 7년 여 동안 호흡을 안맞췄으니까.
[앵커]
한국축구를 잘 모를 수 있다.
[인터뷰]
호흡이 안 맞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1980년대만 돼도 그런 게 말하자면 화제가 되고 논쟁거리가 되는.
[앵커]
우리 축구계에 그당시에 어느 정도 위상을 알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네요.
[인터뷰]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앵커]
박창선, 허정무, 차범근. 저한테는 감독으로 익숙한 분들인데 선수로 뛰던 시절도 보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인터뷰]
그게 논쟁거리가 됐던 차범근 합류가 논쟁거리가 됐다는 게 참 요즘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안 되죠.
어쨌든 합류했습니다.
[앵커]
그리고 우리가 선제골, 처음 선제골 넣은 것은.
[인터뷰]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죠.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것은 1938년에 제3회였고요.
하석주 선수가 멋진 왼발 프리킥이었죠.
굴절되면서 골이 됐는데 워낙 첫 골의 기쁨이.
하석주 선수는 축구 팬들 다들 아시죠?
왼발의 달인입니다.
왼발 엄청 잘 쓰죠.
왼발 프리킥으로 첫 골을 넣었는데.
[앵커]
문제는 골 넣은 다음 이었어요.
백태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인터뷰]
그 무렵에 국제축구연맹 FIFA가 이른바 백태클, 뒤에서 하는 태클은 경종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내보내라 그랬는데 하필이면 그무렵이었어요.
하석주 선수가 바로 퇴장을 당하고 그 여파로 우리가 10명으로 뛰게 되니까 얼마나 수적 열세라는 게 크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3골 내리 내주면서 역전패를 당하는 쓰라린 그런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네덜란드한테 0:5로 지죠.
그리고 1980년 멕시코 대회 때는 선수 차범근이고,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는 감독 차범근인데 대회 도중에 교체되는.
갔다와서 부인께서 쓴 글로 논란이 되기도 하고.
[인터뷰]
우리가 그때는 벨기에하고 1:1로 무승부를 해서 전패를 하지는 않았죠.
[앵커]
축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가장 재미있는 게 한일전인데요.
아까도 54년 스위스월드컵 때 이기고 돌아와서 퍼레이드 할 정도로 한일전에 관심이 많은데 기억에 남는 한일전 있으십니까?
[인터뷰]
많죠.
한일전은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1997년 도쿄 경기장에서 이민성 선수의 역전골.
그래서 어느 캐스터가 어느 캐스터가 후지산이 무너졌다고 어록을 남겼죠.
그런 경기도 있고, 또 중장년층 팬 여러분들은. 예를 들면 1970년 멕시코월드컵인데, 한해 전인 1969년에 그당시 우리나라, 일본, 호주 예선이 지금 현재 흔적도 없어졌지만, 서울 운동장 축구장에서 있었잖아요.
그때 더블리그였어요, 그래서 그때 우리가 일본을 2:0으로 이기고 2:2로 비겼는데 이긴 경기도 아마 장년층 축구팬들은 기억나실 거고.
월드컵 1980년, 32년 만에 다시 월드컵에 나갈 때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가 일본을 이겼거든요.
잠실종합운동장에서 1:0으로 이긴 경기도 있고, 등등 이건 제가 보기에 운동장이 서울운동장이 아니고 효창운동장인데요.
효창운동장을 소개 말씀을 드리면 이게 우리나라 최초의 천연잔디 경기장입니다.
효창공원 안에, 현재도 인조잔디가 깔려있지 않습니까?
이건 동대문 운동장이고요.
효창구장은 1960년 제 2회 아시안컵, 아시아축구선수권 대회를 열기 위해서 지은 구장이고, 동대문 운동장은 예전 경성운동장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 축구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건 다시 효창운동장...
[앵커]
바로 이 효창구장, 동대문 운동장 시절부터 계속 취재를 하셨기 때문에.
[인터뷰]
저는 효창구장 시절은 팬이기도 했고, 취재도 했고 동대문 운동장 시절도 팬이기도 했고, 취재도 했고 그랬죠.
[앵커]
그런가 하면 또 하나 질문드릴 게 축구공 이야기입니다.
공인구.
[앵커]
이번 공이죠, 브라질월드컵.
[앵커]
역대 공인구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앵커]
역대 공인구 화면 하단에 나오고 있습니다.
[앵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공인구였죠.
피버노바.
32조각으로 구성돼 있었고요.
다음 2006년의 공인구입니다.
독일 월드컵에서 사용됐던 팀가이스트 14조각으로 구성돼 있다고 하고요.
다음 2010년 8조각으로 구성된 공인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때 사용됐던 자블라니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사용되는 브라주카인데요.
6조각으로 구성돼서 더 완벽한 구 형태에 가까워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확도도 높아졌다고 하는데 골키퍼들 불만이 높은 것 같아요.
[인터뷰]
스피드도 20% 정도 증가했다고 그러죠.
아마 중장년층 축구팬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에 다 공을 차셨으니까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때는 5각형 또는 6각형의 조각들이 30개 넘게 촘촘히 모여있지 않습니까? 꿰메기도 해야되고.
그전에 바람도 빠지면 자전거포에 가서, 기억나시죠?
축구공의 발전 역사를 보면 얼만큼 공을 둥글게 만드느냐의 역사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점점 공의 형태, 둥근모양에 가까워지고 있고, 축구공은 아무래도 그런 발전과정을 겪으면서 선수들에게는 좀더 터치할 때 감각도좋아지고 스피드도 빨라지고 또 예민하게 반응하다보니까 말씀하신 대로 골키퍼는 수난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450g 정도 되거든요.
410에서 450g 정도 돼야 되는데 잘 지켜야 되겠고 재질도 좋아야 되겠고 예전에 보면 경기 중에 공을 교환하는 것 보셨잖아요.
그리고 어떨 때는 동네 축구할 때입니다마는 공이 찌그러지기도 하고 바람이 빠져서 공기를 잘 유지해야 되는 그런 기능도 있어야 되고 둥그렇게 돼야 하는 기능도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그리고 꿰맨 자국이 많으면 공이 불규칙해지죠.
튈 때도 그렇고.
그래서 점점 발전을 하고 조각의 숫자가 줄어 드는 건, 결국 공이 발전하고 있다.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앵커]
공이 보면 저희들이 옛날에는 꿰매는 공이었어요.
그래서 저희들도 초등학교 때 축구하다가 그거 떨어져서 직접 꿰맨 거를 본드로 붙이기도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접착력이 좋아졌어요.
이렇게 안에 꿰맨 자국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세히 보시면 공에 돌기가 있습니다.
그렇죠?
그냥 원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돌기가 있는 이유가 공의 저항력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완전히 매끈하면 뒤에 있는 저항을 받아서 빨리 날아가지를 못하는데 그런 과학도 숨어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
사이사이로 공의 속도가 빠르게 되죠.
그렇게 되니까 그런 돌기를 만들게 되는 거고요.
예전 축구공 생각하시면 옛 축구 생각나실 거예요.
꿰매고 5각형, 6각형.
[앵커]
원에 가깝다는 32개.
[앵커]
직접 꿰매서 공을 사용합니까?
[인터뷰]
자전거포 가서 바람도 넣고.
[앵커]
그렇게 했던 동네 축구에서 시작됐던 한국의 축구 역사가 이제는 브라주카까지 왔습니다.
이제 내일 경기.
어떻게 예상하시는지요.
[인터뷰]
러시아는 간단히 말씀드리면 옛 소련에서 연방이 해체되면서 러시아가 됐고, 옛소련 시절에는 그 시절 사회주의 국가들은 프로로 인정 안 하니까 국가가 사실은 스포츠 스타를 다 관리했으니까 프로나 다름없죠.
그래서 올림픽에서는 아주 강세였습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도 우승을 했고, 잘 아시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도 비쇼베츠 감독이 이끄는 옛소련이 우승을 했지 않습니까?
올림픽에서는 강세인데 사실 월드컵에서는 별로 성적이 없습니다.
이전에 두 차례 출전에서 다 1라운드 탈락이에요.
제가 보기에는 이런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수 있지만 결국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어본다고.
우리나라 선수들은 자꾸 월드컵에 나오니까.
우리 선수들이 어설픈, 말하자면 국제무대, 월드컵 무대에서는 별로 성적이 없었던 러시아보다는 오히려 심리적으로는 앞서가지 않을까.
그리고 또 내일 경기의 관전포인트는 제가 볼 때 기후 얘기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일 아마 후반, 중반 이후 특히 후반 30분.
마라토너로 치면 35km 정도 달렸을 때 러시아 선수들이.
[앵커]
특히 춥잖아요.
러시아가.
[인터뷰]
러시아는 그래서 리그가 봄부터 가을입니다.
북유럽의 몇몇나라들은 겨울이 워낙 추워가지고 리그를 봄부터 가을까지 합니다.
날씨를 잘 관전포인트로 보시고 후반, 중반 이후. 특히 30분 정도부터 우리나라 선수들의 거센 추격전.
우리가 독일을 엄청나게 몰아부쳤던 거 기억나시죠?
3:2까지 따라갔고요.
경기를 우리가 비록 지기는 했지만 경기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던 것.
독일 선수들이 거의 발이 땅에 붙어서 갔거든요.
내일 경기를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몇대몇 굳이 예상한다면.
[인터뷰]
2:1이나 1:0으로 이기지 않을까.
[앵커]
오늘 내기하시는 분들 많으실 텐데, 참고하시면.
책임은 못 집니다.
저도 내기를 회사분들과 하고는 있는데 참고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선수단의 움직임, 신명철 평론가와 함께 살펴봤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인터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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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월드컵, 이제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첫 경기, 하루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8회 연속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진출을 했잖습니까.
이번에 아시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또 세계에서도 6개 나라만 갖고 있는 진기록, 대기록이라고 합니다.
[앵커]
그때 그 시절 월드컵, 한국의 월드컵 도전 역사를 되짚어 보겠습니다.
신명철 스포츠 평론가와 함께 합니다.
어서오세요.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드디어 스포츠의 계절이 온 것 같네요.
맨 처음 우리가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게 언제였죠?
[인터뷰]
축구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들 기억하고 계시죠.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인데요.
하나만 추가적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하나 가르쳐 드리려고 하는데요.
일제강점기이기는 합니다마는 1938년에 제3회 프랑스 월드컵이 있었는데 일본이 이 대회에 출전 신청을 했다가 막판에 출전신청을 포기했어요, 그때가 2차 중일전쟁이 일어날 무렵인데 그때 만약에 일본이 예선이기는 하지만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을 했다면 그때 일본축구협회가 말하자면 일본 대표팀이죠.
거기에 우리 조선인 선수들도 꽤 많이 포함을 한 40여 명이 예비명단을 했을 때 우리 한국선수, 조선선수가 4, 5명 정도가 포함이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축구팬들이 아시는 스위스월드컵 때 처음 출전했던 우리한국 선수들 외에 그분들의 더 선배분들이 어쩌면 아시아예선을 통과를 하셔서 일본이 프랑스 월드컵에, 제3회 대회입니다마는 갔을 수도 있겠다하는 사실을 우리 축구팬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면 일제강점기 때도 우리 선배 축구인들이 참 공을 잘 차셨구나.
잘하는 김영식 선생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그당시에 활동을 하셨습니다.
[앵커]
일본 이기고 와서 퍼레이드 장면이 나가고 있는데요.
[인터뷰]
이게 그러니까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에서는 원래는 한국, 일본, 대만이 출전 신청을 했는데 포기를 했고, 그때 우리가 도쿄에 가서 두 경기를 모두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엄청난 반일주의 정책을 폈었고 그리고 한일 국교 정상화 되기 전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도쿄 가서 우리 두 경기를 해서 5:1로 이기고 2:2로 비겼는데 그때 감독이 출국하기 전에 청와대에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 말이 지금도 축구 역사상에는 회자가 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지면 요즘 이런 말씀은 안 하지만 대한해협에 빠져 죽겠다고 결의를 다지고 한거죠.
그때 가서 5:1로 이기고 2:2로 비겼는데 장년층 축구팬들은 기억하실 거예요.
그때 당시의 아시아의 황금발이라고 해서 최정민 선수를 비롯한, 작고하셨습니다마는 아주 우수한 축구인들이 가볍게 일본을 꺾고 본선에 나서게 되죠.
[앵커]
그렇게 해서 스위스월드컵에서...
[앵커]
한일전의 승리는 큰 기쁨이었던 것 같은데.
[인터뷰]
그렇죠.
대승이었고요.
5:1로.
[앵커]
월드컵에서 우리가 언제 첫 골을 기록했는지 궁금합니다.
[인터뷰]
스위스 월드컵 가서 헝가리한테 0:9, 터키한테 0:7로 지지 않았습니까?
그때 홍덕영 골키퍼가 슛을 막느라 가슴이 다 얼얼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패를 하고 돌아왔는데 그때는 골을 아예 못 넣었으니까 그리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정말 오랜만에 우리가 월드컵본선에 진출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르헨티나 경기도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0:3으로 뒤지다가 박창선 선수의, 그 당시 화면이 나오는 모양이죠?
그때 우리가 0:3으로 뒤지다가.
[앵커]
아르헨티나인가요?
[인터뷰]
이것은 최순호 선수니까 이탈리아전입니다.
저기서 이게 들어가고 뒤에 또 허정무 선수의 추가 골이 있어서 강호 이탈리아와 우리가 2:3으로 지기는 했지만 팽팽한 경기를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박창선 선수는 아르헨티나한테 0:3으로 지다가 중거리 슛으로 골을 넣었으니까 우리나라로서는 월드컵의 첫 골이 되겠죠.
이 대회에서는 우리가 불가리아하고 1:1로 비겼습니다.
김종부 선수도 골을 넣었죠.
그런데 이것은 또 0:1로 뒤지다가 골을 넣었기 때문에 이게 선제골은 아니었고요.
어쨌든 김종부 선수의 골도 멕시코 월드컵 때 있었습니다, 그리고 멕시코 월드컵과 관련해서 또 한가지 상당히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때 80년대 중후반에는 차범근 선수가 독일 서독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었잖아요.
그때 국내 지금 축구팬분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분들이 있었어요.
뭐냐하면 차범근 선수를 불러와서 대표팀에 합류 시키느냐, 마느냐 가 그때 핫이슈였어요.
왜냐하면 우수한 선수를 대표팀에 당연히 뽑아야 되는데 요즘 축구팬들은 그게 무슨 말이냐 하실 텐데 팀워크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내세워서.
오랫동안 서독에 있어서 후배선수들하고 7년 여 동안 호흡을 안맞췄으니까.
[앵커]
한국축구를 잘 모를 수 있다.
[인터뷰]
호흡이 안 맞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1980년대만 돼도 그런 게 말하자면 화제가 되고 논쟁거리가 되는.
[앵커]
우리 축구계에 그당시에 어느 정도 위상을 알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네요.
[인터뷰]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앵커]
박창선, 허정무, 차범근. 저한테는 감독으로 익숙한 분들인데 선수로 뛰던 시절도 보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인터뷰]
그게 논쟁거리가 됐던 차범근 합류가 논쟁거리가 됐다는 게 참 요즘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안 되죠.
어쨌든 합류했습니다.
[앵커]
그리고 우리가 선제골, 처음 선제골 넣은 것은.
[인터뷰]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죠.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것은 1938년에 제3회였고요.
하석주 선수가 멋진 왼발 프리킥이었죠.
굴절되면서 골이 됐는데 워낙 첫 골의 기쁨이.
하석주 선수는 축구 팬들 다들 아시죠?
왼발의 달인입니다.
왼발 엄청 잘 쓰죠.
왼발 프리킥으로 첫 골을 넣었는데.
[앵커]
문제는 골 넣은 다음 이었어요.
백태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인터뷰]
그 무렵에 국제축구연맹 FIFA가 이른바 백태클, 뒤에서 하는 태클은 경종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내보내라 그랬는데 하필이면 그무렵이었어요.
하석주 선수가 바로 퇴장을 당하고 그 여파로 우리가 10명으로 뛰게 되니까 얼마나 수적 열세라는 게 크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3골 내리 내주면서 역전패를 당하는 쓰라린 그런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네덜란드한테 0:5로 지죠.
그리고 1980년 멕시코 대회 때는 선수 차범근이고,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는 감독 차범근인데 대회 도중에 교체되는.
갔다와서 부인께서 쓴 글로 논란이 되기도 하고.
[인터뷰]
우리가 그때는 벨기에하고 1:1로 무승부를 해서 전패를 하지는 않았죠.
[앵커]
축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가장 재미있는 게 한일전인데요.
아까도 54년 스위스월드컵 때 이기고 돌아와서 퍼레이드 할 정도로 한일전에 관심이 많은데 기억에 남는 한일전 있으십니까?
[인터뷰]
많죠.
한일전은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1997년 도쿄 경기장에서 이민성 선수의 역전골.
그래서 어느 캐스터가 어느 캐스터가 후지산이 무너졌다고 어록을 남겼죠.
그런 경기도 있고, 또 중장년층 팬 여러분들은. 예를 들면 1970년 멕시코월드컵인데, 한해 전인 1969년에 그당시 우리나라, 일본, 호주 예선이 지금 현재 흔적도 없어졌지만, 서울 운동장 축구장에서 있었잖아요.
그때 더블리그였어요, 그래서 그때 우리가 일본을 2:0으로 이기고 2:2로 비겼는데 이긴 경기도 아마 장년층 축구팬들은 기억나실 거고.
월드컵 1980년, 32년 만에 다시 월드컵에 나갈 때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가 일본을 이겼거든요.
잠실종합운동장에서 1:0으로 이긴 경기도 있고, 등등 이건 제가 보기에 운동장이 서울운동장이 아니고 효창운동장인데요.
효창운동장을 소개 말씀을 드리면 이게 우리나라 최초의 천연잔디 경기장입니다.
효창공원 안에, 현재도 인조잔디가 깔려있지 않습니까?
이건 동대문 운동장이고요.
효창구장은 1960년 제 2회 아시안컵, 아시아축구선수권 대회를 열기 위해서 지은 구장이고, 동대문 운동장은 예전 경성운동장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 축구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건 다시 효창운동장...
[앵커]
바로 이 효창구장, 동대문 운동장 시절부터 계속 취재를 하셨기 때문에.
[인터뷰]
저는 효창구장 시절은 팬이기도 했고, 취재도 했고 동대문 운동장 시절도 팬이기도 했고, 취재도 했고 그랬죠.
[앵커]
그런가 하면 또 하나 질문드릴 게 축구공 이야기입니다.
공인구.
[앵커]
이번 공이죠, 브라질월드컵.
[앵커]
역대 공인구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앵커]
역대 공인구 화면 하단에 나오고 있습니다.
[앵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공인구였죠.
피버노바.
32조각으로 구성돼 있었고요.
다음 2006년의 공인구입니다.
독일 월드컵에서 사용됐던 팀가이스트 14조각으로 구성돼 있다고 하고요.
다음 2010년 8조각으로 구성된 공인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때 사용됐던 자블라니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사용되는 브라주카인데요.
6조각으로 구성돼서 더 완벽한 구 형태에 가까워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확도도 높아졌다고 하는데 골키퍼들 불만이 높은 것 같아요.
[인터뷰]
스피드도 20% 정도 증가했다고 그러죠.
아마 중장년층 축구팬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에 다 공을 차셨으니까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때는 5각형 또는 6각형의 조각들이 30개 넘게 촘촘히 모여있지 않습니까? 꿰메기도 해야되고.
그전에 바람도 빠지면 자전거포에 가서, 기억나시죠?
축구공의 발전 역사를 보면 얼만큼 공을 둥글게 만드느냐의 역사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점점 공의 형태, 둥근모양에 가까워지고 있고, 축구공은 아무래도 그런 발전과정을 겪으면서 선수들에게는 좀더 터치할 때 감각도좋아지고 스피드도 빨라지고 또 예민하게 반응하다보니까 말씀하신 대로 골키퍼는 수난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450g 정도 되거든요.
410에서 450g 정도 돼야 되는데 잘 지켜야 되겠고 재질도 좋아야 되겠고 예전에 보면 경기 중에 공을 교환하는 것 보셨잖아요.
그리고 어떨 때는 동네 축구할 때입니다마는 공이 찌그러지기도 하고 바람이 빠져서 공기를 잘 유지해야 되는 그런 기능도 있어야 되고 둥그렇게 돼야 하는 기능도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그리고 꿰맨 자국이 많으면 공이 불규칙해지죠.
튈 때도 그렇고.
그래서 점점 발전을 하고 조각의 숫자가 줄어 드는 건, 결국 공이 발전하고 있다.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앵커]
공이 보면 저희들이 옛날에는 꿰매는 공이었어요.
그래서 저희들도 초등학교 때 축구하다가 그거 떨어져서 직접 꿰맨 거를 본드로 붙이기도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접착력이 좋아졌어요.
이렇게 안에 꿰맨 자국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세히 보시면 공에 돌기가 있습니다.
그렇죠?
그냥 원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돌기가 있는 이유가 공의 저항력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완전히 매끈하면 뒤에 있는 저항을 받아서 빨리 날아가지를 못하는데 그런 과학도 숨어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
사이사이로 공의 속도가 빠르게 되죠.
그렇게 되니까 그런 돌기를 만들게 되는 거고요.
예전 축구공 생각하시면 옛 축구 생각나실 거예요.
꿰매고 5각형, 6각형.
[앵커]
원에 가깝다는 32개.
[앵커]
직접 꿰매서 공을 사용합니까?
[인터뷰]
자전거포 가서 바람도 넣고.
[앵커]
그렇게 했던 동네 축구에서 시작됐던 한국의 축구 역사가 이제는 브라주카까지 왔습니다.
이제 내일 경기.
어떻게 예상하시는지요.
[인터뷰]
러시아는 간단히 말씀드리면 옛 소련에서 연방이 해체되면서 러시아가 됐고, 옛소련 시절에는 그 시절 사회주의 국가들은 프로로 인정 안 하니까 국가가 사실은 스포츠 스타를 다 관리했으니까 프로나 다름없죠.
그래서 올림픽에서는 아주 강세였습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도 우승을 했고, 잘 아시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도 비쇼베츠 감독이 이끄는 옛소련이 우승을 했지 않습니까?
올림픽에서는 강세인데 사실 월드컵에서는 별로 성적이 없습니다.
이전에 두 차례 출전에서 다 1라운드 탈락이에요.
제가 보기에는 이런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수 있지만 결국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어본다고.
우리나라 선수들은 자꾸 월드컵에 나오니까.
우리 선수들이 어설픈, 말하자면 국제무대, 월드컵 무대에서는 별로 성적이 없었던 러시아보다는 오히려 심리적으로는 앞서가지 않을까.
그리고 또 내일 경기의 관전포인트는 제가 볼 때 기후 얘기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일 아마 후반, 중반 이후 특히 후반 30분.
마라토너로 치면 35km 정도 달렸을 때 러시아 선수들이.
[앵커]
특히 춥잖아요.
러시아가.
[인터뷰]
러시아는 그래서 리그가 봄부터 가을입니다.
북유럽의 몇몇나라들은 겨울이 워낙 추워가지고 리그를 봄부터 가을까지 합니다.
날씨를 잘 관전포인트로 보시고 후반, 중반 이후. 특히 30분 정도부터 우리나라 선수들의 거센 추격전.
우리가 독일을 엄청나게 몰아부쳤던 거 기억나시죠?
3:2까지 따라갔고요.
경기를 우리가 비록 지기는 했지만 경기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던 것.
독일 선수들이 거의 발이 땅에 붙어서 갔거든요.
내일 경기를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몇대몇 굳이 예상한다면.
[인터뷰]
2:1이나 1:0으로 이기지 않을까.
[앵커]
오늘 내기하시는 분들 많으실 텐데, 참고하시면.
책임은 못 집니다.
저도 내기를 회사분들과 하고는 있는데 참고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선수단의 움직임, 신명철 평론가와 함께 살펴봤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인터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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