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은의 영화이야기] 그래서, 투쟁은 계속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윤성은의 영화이야기] 그래서, 투쟁은 계속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2025.10.17. 오후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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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2025
감독 : 폴 토마스 앤더슨
주연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베니치오 델 토로, 레지나 홀, 테야나 테일러, 체이스 인피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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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포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이 돌아왔다. 흥행 감독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부기 나이트’(1999), ‘매그놀리아’(2000), ‘펀치 드렁크 러브’(2003),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마스터’(2013), ‘팬텀 스레드’(2017) 등 만드는 작품마다 평단의 찬사를 받아왔던 그는 세계 3대 영화제를 석권한 몇 안 되는 거장이다. 2021년에 내놓았던 ‘리코리쉬 피자’는 전작들에 비해 다소 가벼운 작품이었으나 이제 그는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이하 ‘원 배틀’)를 통해 다시 한번 아카데미 시상식 여러 부문에서 호명될 예정이다.

▲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와 ‘팻’(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반체제 단체 ‘프렌치75’ 소속으로, 급진적 활동가들이다. 첫 시퀀스에서 이들은 야간에 국경 이민자 수용시설을 급습해 병사들을 감금한 후 수용자들을 풀어준다. 폭탄전문가인 팻은 비교적 온건한 편이지만 퍼피디아는 과격한 언행으로 군사 관료들을 제압하며 작전을 수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록조’(숀 펜)를 성희롱하기도 한다. 이후 퍼피디아와 팻은 아이도 낳고 행복한 한 때를 보내지만 본래 변태적 성향이 있던 록조가 퍼피디아를 찾아내 협박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퍼피디아는 혼자 멕시코로 도주해 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16년 후,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와 함께 ‘밥’이라는 이름으로 은둔하며 살고 있는 팻을 보여준다. 밥은 혹시나 닥칠지 모르는 비상 상황을 대비해 딸에게 격투기는 물론 ‘프렌치75’의 비밀구호를 가르치고 외출할 때마다 트래킹 장치를 쥐어 주지만 정작 자신은 술에 찌들어 무질서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윌라가 자신의 딸인지 의심하는 록조가 윌라를 납치해 가고, 밥은 윌라를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이들을 추격한다.

▲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원 배틀’은 가상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사실상 동시대 미국 내부의 갈등 양상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백인우월주의자들과 액티비스트들이 공히 과장되고 희화화 되어 있을 뿐이다. 일례로, 비밀우익단체 ‘크리스마스 어드벤쳐 클럽’은 유대계가 아니면서 다른 인종과 성관계를 맺지 않았어야 한다는 황당한 입회조건을 내거는데 퍼피디아에게 성적으로 집착했던 록조와는 거리가 먼 단체여서 실소를 유발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이 영화가 혁명 이후의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리더격이었던 퍼피디아가 배신자가 되어 떠나 버린 후, 조직은 와해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느낀 밥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다. 마치 혁명가들은 자멸해 버리고 만다는 듯이. 그러나 록조가 윌라를 쫓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밥은 실수투성이에 어눌하기 짝이 없지만 음지에서 여전히 활동 중이던 ‘프렌치75’는 위협에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하면서 그를 윌라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밥이 휴대폰을 충전하기 위해 허둥지둥 콘센트를 찾는 동안 말 없이 긴급한 일들을 척척 처리해내는 가라테 사부 ‘세르지오’(베니시오 델 토로)의 활약은 무척 인상적이다. 어쨌든 밥은 스스로 저항의 과거와 이별했다고 생각했지만 권력자들은 그들을 잊지 않았고, 또 다른 싸움을 만들어냈으며, 이들의 지난한 관계는 어김없이 후대로까지 이어진다. 제목 그대로 이들의 싸움은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혁명의 정당성 문제를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원 배틀’을 가벼운 액션 영화로 치부하거나 감독이 독재정부와 혁명가들 사이에서 적당히 균형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 영화에서 폭력적인 혁명에 거리를 두고 개인의 과오가 조직을 붕괴시킬 수 있음도 지적했지만, 명백한 공공의 적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이다. 록조를 위선과 허영으로 가득찬 변태로 묘사하고, 크리스마스 어드벤쳐 클럽의 광기와 폭력성을 보여준 데서 그의 정치적 중립성은 깨진다. 록조의 휴대용 유전자 키트는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발명품이자 그의 비윤리성을 드러내주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그는 혁명가로서의 팻과 아버지로서의 밥이 일관되게 올바른 행동,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은 세르지오의 대사에 명시한 것처럼 두려움 없는 자유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You know what freedom is? No fear.”) 그래서 이 용감한 영화는 저열한 납치극 끝에 혁명가들의 미래인 윌라가 얼마나 두려움 없이 세상을 대하게 되었는지 보여주며 끝난다. ‘원 배틀’이 말하는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두려움 없는 행보는 미국의 영화 및 미디어 산업에 불어닥치고 있는 트럼프 정부의 검열과 억압을 감안할 때 창작가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중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이 영화가 꼭 흥행에도 성공하길 바란다.

▲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 글 : 윤성은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 전주국제영화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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