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자 리포트(MURDER REPORT)│2025
감독 : 조영준 │ 주연 : 조여정, 정성일, 김태한
감독 : 조영준 │ 주연 : 조여정, 정성일, 김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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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선주’(조여정)는 비밀리에 준비하던 기사의 증거물을 도둑맞고 곤경에 처한 기자다. 직장 내에서 눈치 보는 것도 힘든데 요즘엔 사춘기 딸의 얼굴도 많이 어두워 보인다. 선주는 오래 만난 연인, ‘한상우’(김태한)에게 딸의 가방에서 면도칼이 나왔다며 걱정한다. 하지만 상우는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선주가 놀랍기만 하다. 선주는 열 한 명을 살해했다는 살인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정체불명의 살인자는 선주가 자신을 인터뷰해 준다면 오늘 밤 예정된 살인은 하지 않겠다고 했고, 그래서 선주는 이 인터뷰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러나 선주 자신조차도 정말 그런 이유에서 이 위험한 요청을 수락한 것인지, 혹시 모를 특종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선주와 상우가 살인자를 만나러 가는 이 첫 번째 신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 적당히 친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뜬금 없는 반전보다는 참여형 두뇌 싸움을 즐기는 관객들을 위한 선택이다. 이런 관객들은 첫 신에서 벌써 이야기의 여러 단서를 얻는다. 첫째, 지금 선주에게는 특종이 간절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살인을 예방한다는 핑계로 포장되고 있다. 둘째, 선주 딸의 가방에 들어있다던 면도칼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등장할 것이다. 즉, 의문의 살인자는 선주의 윤리적 갈등을 건드리며 도발할 것이고, 그것은 선주 딸의 문제와도 관계가 있다.
호텔 스위트룸에서 만난 살인자 ‘이영훈’(정성일)은 아직 나무만 보이고 숲은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착실하게 선주를 자신이 쳐놓은 덫으로 끌어들인다. 선주와 상우도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정신과 의사인 영훈은 그들의 머리 위에 있다. 먼저, 영훈은 연쇄살인범이 되기 전 자기 가족에게 벌어졌던 끔찍한 사고를 선주에게 들려주면서 그녀의 감정을 동요시킨다. 이후 폐인으로 살던 그는 자신만큼 고통스런 일을 당한 환자들을 만나 동병상련을 느꼈고, 그들의 가해자들을 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환자들을 치료하고 행복하게 해줬다며 살인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삶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아픔을 잊어왔던 것이다. 이쯤에서 선주는 죄책감이 없었냐고 묻는데, 의미심장하게도 이 질문은 영훈이 아니라 영훈 환자들의 양심을 향한 것이다. 여기에는 영훈의 살인이 중범죄자를 대상으로 했다는 데 대한 심정적 허용과 더불어 선주가 그를 어차피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을 사이코패스로 본다는 이중적 의미가 깔려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질문은 내담자로 왔다가 결과적으로 살인청부를 하게 된 환자들에 대한 것으로, 결국 선주가 곧 직접 경험하게 될 일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모든 좋은 각본은 대사 한 줄도 중요하지만 특히 스릴러 장르에서는 한 단어 한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영화는 비록 호화스런 호텔 스위트룸이기는 해도, 주인공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은밀한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밀실스릴러의 형태를 띤다. 플래시백이나 외부 공간의 장면들이 잠깐씩 삽입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선주와 영훈의 대화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영화의 긴장감은 상당부분 연기자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조여정과 정성일의 합은 성공적이다. 조여정은 당당하고 직설적인 기자의 모습에서 공포에 질리고, 분노에 눈이 뒤집히며, 말 못할 슬픔에 잠긴 얼굴까지 폭넓은 감정을 소화해 내는데 성공했다. 정성일 또한 깔끔하고 지적인 용모 뒤에 숨겨진 광기와 살기를 과장되지 않게 표현해내 극에 현실감을 더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난한 각본과 배우들의 열연에 비해 연출은 다소 쫀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촬영은 밀실스릴러에서 기대하는 것보다 단조로웠고, 미디어아트로 조명 효과를 낸 미장센은 적절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보다 거추장스러워 보였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인 상우가 나오는 장면들은 스위트룸 신들에 비해 힘이 빠져 있어서 전반적인 톤 앤 매너에서 튀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자 리포트’는 신선한 소재에 제한된 공간과 등장인물들로 만든 저예산 상업영화로서 의미가 충분하다. 역사상 최악의 불황을 맞은 우리 영화산업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이런 중저예산의 상업영화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관객들을 만나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팔색조 같은 배우들의 얼굴을 큰 스크린에서 만나보시길 권한다.
■ 글 : 윤성은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 전주국제영화제 이사)
YTN 브랜드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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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살인자 리포트' 포스터
‘백선주’(조여정)는 비밀리에 준비하던 기사의 증거물을 도둑맞고 곤경에 처한 기자다. 직장 내에서 눈치 보는 것도 힘든데 요즘엔 사춘기 딸의 얼굴도 많이 어두워 보인다. 선주는 오래 만난 연인, ‘한상우’(김태한)에게 딸의 가방에서 면도칼이 나왔다며 걱정한다. 하지만 상우는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선주가 놀랍기만 하다. 선주는 열 한 명을 살해했다는 살인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정체불명의 살인자는 선주가 자신을 인터뷰해 준다면 오늘 밤 예정된 살인은 하지 않겠다고 했고, 그래서 선주는 이 인터뷰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러나 선주 자신조차도 정말 그런 이유에서 이 위험한 요청을 수락한 것인지, 혹시 모를 특종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선주와 상우가 살인자를 만나러 가는 이 첫 번째 신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 적당히 친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뜬금 없는 반전보다는 참여형 두뇌 싸움을 즐기는 관객들을 위한 선택이다. 이런 관객들은 첫 신에서 벌써 이야기의 여러 단서를 얻는다. 첫째, 지금 선주에게는 특종이 간절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살인을 예방한다는 핑계로 포장되고 있다. 둘째, 선주 딸의 가방에 들어있다던 면도칼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등장할 것이다. 즉, 의문의 살인자는 선주의 윤리적 갈등을 건드리며 도발할 것이고, 그것은 선주 딸의 문제와도 관계가 있다.
▲ 영화 '살인자 리포트' 스틸컷
호텔 스위트룸에서 만난 살인자 ‘이영훈’(정성일)은 아직 나무만 보이고 숲은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착실하게 선주를 자신이 쳐놓은 덫으로 끌어들인다. 선주와 상우도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정신과 의사인 영훈은 그들의 머리 위에 있다. 먼저, 영훈은 연쇄살인범이 되기 전 자기 가족에게 벌어졌던 끔찍한 사고를 선주에게 들려주면서 그녀의 감정을 동요시킨다. 이후 폐인으로 살던 그는 자신만큼 고통스런 일을 당한 환자들을 만나 동병상련을 느꼈고, 그들의 가해자들을 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환자들을 치료하고 행복하게 해줬다며 살인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삶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아픔을 잊어왔던 것이다. 이쯤에서 선주는 죄책감이 없었냐고 묻는데, 의미심장하게도 이 질문은 영훈이 아니라 영훈 환자들의 양심을 향한 것이다. 여기에는 영훈의 살인이 중범죄자를 대상으로 했다는 데 대한 심정적 허용과 더불어 선주가 그를 어차피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을 사이코패스로 본다는 이중적 의미가 깔려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질문은 내담자로 왔다가 결과적으로 살인청부를 하게 된 환자들에 대한 것으로, 결국 선주가 곧 직접 경험하게 될 일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모든 좋은 각본은 대사 한 줄도 중요하지만 특히 스릴러 장르에서는 한 단어 한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영화 '살인자 리포트' 스틸컷
영화는 비록 호화스런 호텔 스위트룸이기는 해도, 주인공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은밀한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밀실스릴러의 형태를 띤다. 플래시백이나 외부 공간의 장면들이 잠깐씩 삽입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선주와 영훈의 대화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영화의 긴장감은 상당부분 연기자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조여정과 정성일의 합은 성공적이다. 조여정은 당당하고 직설적인 기자의 모습에서 공포에 질리고, 분노에 눈이 뒤집히며, 말 못할 슬픔에 잠긴 얼굴까지 폭넓은 감정을 소화해 내는데 성공했다. 정성일 또한 깔끔하고 지적인 용모 뒤에 숨겨진 광기와 살기를 과장되지 않게 표현해내 극에 현실감을 더했다.
▲ 영화 '살인자 리포트' 스틸컷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난한 각본과 배우들의 열연에 비해 연출은 다소 쫀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촬영은 밀실스릴러에서 기대하는 것보다 단조로웠고, 미디어아트로 조명 효과를 낸 미장센은 적절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보다 거추장스러워 보였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인 상우가 나오는 장면들은 스위트룸 신들에 비해 힘이 빠져 있어서 전반적인 톤 앤 매너에서 튀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자 리포트’는 신선한 소재에 제한된 공간과 등장인물들로 만든 저예산 상업영화로서 의미가 충분하다. 역사상 최악의 불황을 맞은 우리 영화산업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이런 중저예산의 상업영화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관객들을 만나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팔색조 같은 배우들의 얼굴을 큰 스크린에서 만나보시길 권한다.
▲ 영화 '살인자 리포트' 스틸컷
■ 글 : 윤성은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 전주국제영화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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