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걸작선] '경마장 가는 길'

[한국영화 걸작선] '경마장 가는 길'

2018.11.30. 오후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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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걸작선] '경마장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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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막론하고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 앞서 나가는 예술가들은 논쟁의 중심에 서기 마련이죠.

1990년대 가장 논쟁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창작자, 바로 장선우 감독입니다.

오늘은 그의 작품 가운데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 받으며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낳은 영화를 소개해드립니다.

문성근과 강수연이 주연한 영화 '경마장 가는 길'입니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R은 파리에서 동거했던 여자 J를 만납니다.

R은 J에게 잠자리를 요구하지만 J는 왠일인지 R을 거부하죠.

J: 조금 있다가 전 가봐야 되겠네요.
R: 아휴, 왜 가니? 내가 그동안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J: 이러지 마세요. 여기선 안돼요.

미련이 남은 R은 끈질기게 J에게 구애하지만 J의 완강함 앞에서 속수무책입니다.

문학 박사 R은 특유의 문어체 말투로 J에게 따집니다.

R: 너 그동안 남자 생겼니?
R: 그럼 왜 이러느냐? 너의 이러한 행동의 이데올로기는 뭐냐?

화가 난 R은 대구의 고향 집으로 내려 갑니다.

그러나 아내와의 사이는 싸늘하기만 합니다.

R: 난 이미 편지에다 충분히 뚜렷하게 밝혔듯이 너와 이혼하길 원한다.

하지만 R의 아내는 이혼을 거부하는데요.

결국 R은 J가 있는 서울과 대구를 오가는 생활을 이어갑니다.

영화는 중간중간 R의 시선을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해 논평합니다.

R: 여기가 정말 한국인가? 여기가 정말 600년 역사를 가진 서울인가? 온통 어딜 가나 십자가들 뿐이군. 여긴 마치 커다란 유럽의 공동묘지에 들어온 기분이야.
J: 그렇게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세요.

이런 와중에 J에게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J: 저쪽에서는 오래 전부터 결혼을 하자고 해왔어요.
R: 그래, 자네는 그 남자에게 자네와 내가 프랑스에서 3년 반 동안 함께 살았다는 얘기를 했는가?
J: 어떻게 그런 말을 남한테 할 수가 있어요? 결혼을 안 하면 안 했지!

자신을 떠나려는 J를 붙잡기 위해 R은 승부수를 띄웁니다.

J의 박사 논문을 R이 대신 써줬다는 사실을 이용하기로 한 거죠.

R: 난 오늘 너를 집에 보내주지 않는다.
J: 도대체 왜 이래요? 뭘 어떻게 하라고 나보고 그러는 거예요?
R: 날 경찰서에 데려다 다오! 그러면 될 거 아니니?

이렇게 '경마장 가는 길'은 영화 내내 두 남녀의 밀고 당기는 애정 게임을 이어 갑니다.

지식인의 허울과 그럴듯한 말의 성찬 속에 가려져 있지만, R의 행각은 원초적인 본능을 채우기 위해 지배자로서 벌이는 권력 다툼의 양상을 보여주죠.

어쨌든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뚜렷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기존의 서사 방식을 과감하게 버린 것인데요.

그래서 개봉 당시 평단으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됐죠.

일부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일컬어 일상의 리듬이 반영된 리얼리티의 본질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선보인 장선우 감독의 선구적인 연출 방식은 1990년대 중반 등장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세계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경마장 가는 길'이었습니다.

글/구성/출연: 최광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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