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영화만' 배우 신성일의 삶

'오직 영화만' 배우 신성일의 삶

2018.11.05. 오후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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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오동건 앵커
■ 출연 : 김묘성 대중문화 전문기자

[앵커]
1년 반 동안의 폐암 투병 끝에 별세한 배우, 신성일 씨에 대한 추모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960~1970년대 한국영화의 주인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나라 영화사의 산 증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요.

한평생 오직 영화만 생각했던 고 신성일 배우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김묘성 대중문화 전문기자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신성일 배우의 죽음,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있을 것 같았어요.

어릴 때부터 봐왔고 영화에서도 봤고 항상 TV에서도 봤던 그분이 안 계신다니까 허전한데 안성기 씨와 사실 영화개봉도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숨진...

[인터뷰]
굉장히 갑작스러운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별세하기 3일 전에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5일 전부터는 지인들과 아예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하고요.

사실 이때부터 거의 의식이 없었던 것 아니냐라고 추측이 지금 되고 있는데 이때부터 가족들은 의료진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는데요.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지난해 6월에 폐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치료를 계속해서 받았고 신성일 씨 같은 경우에는 계속해서 내가 지금 괜찮아지고 있다, 치료를 받고 있고 또 앞으로 내가 체력 관리를 더욱더 잘해서 쾌유할 것이다, 완쾌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별세하게 되면서 많은 분들이 굉장히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앵커]
잘 되기를, 건강해지기를 바랐던 사람들이 사실 주변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그분을 봐온 많은 팬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네요.

팬들의 바람이었을 것 같은데요. 안타깝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이셨는지 추억을 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후배들, 영화계 후배들 많이 만나보셨을 텐데 후배들에게 신성일 배우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인터뷰]
신성일 배우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후배들을 챙겼던, 특히 어렵고 소외된 후배들의 복지에 힘을 쓰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과거에 배우협회장 이사장 등의 직을 얻었었는데 그때 활동하면서 찬조금이라든지 발전기금을 마련해서 후배들을 위해서 많이 썼던 것으로 지금 그렇게 기억이 되고 있어요.

그리고 투병중에도 2~3개월에 한 번씩은 서울에 올라와서 영화인들, 후배들, 감독들을 만나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일화 중 하나과거에 김수미 씨가 굉장히 신인 시절 때 영화 촬영 현장에서 그때 감독의 말 하면 굉장히 그냥 최고, 거역할 수 없는 것...

그 당시에는 더 심했었는데 그때 예고되지 않았던 노출신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황해하고 있을 찰나에 신성일 씨가 나서서 그것을 막아주고 조율을 해 줬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굉장히 힘을 얻었다고 했는데. 신성일 씨 같은 경우에는 내가 후배를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굉장히 확고했던 배우로 그렇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그 당시에 어떻게 보면 미투를 막았던 그런 강단도 보여줬던 것 같은데요.

그런 영화인이었으니까, 영화배우었고 영화를 사랑했었으니까. 영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 보죠. 로맨스 빠빠로 데뷔를 하셨고 그 이후에 많은 영화들로 활약을 하셨습니다. 정리를 좀 해 볼까요?

[인터뷰]
60년에 로맨스 빠빠라는 작품을 통해서 데뷔를 했습니다. 그리고 보면 지금 데뷔 이후에 출연했던 영화만 보면 524편입니다. 524편이고...

[앵커]
524편, 507편...

[인터뷰]
507편은 주연으로 했던 작품이고요. 그걸 추산하기도 굉장히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많은 작품들이 있는데 지금 맨발의 청춘이 나오고 있는 것 같죠. 굉장히 많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가정교사, 청춘교실,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 등이 있고 또 70년대는 감독으로도 활동을 했었거든요.

연출작이 한 4편 정도 되고 제작에 참여한 영화도 9편 정도 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굉장히 중요한 것은 별세 3일 전까지도 영화에 대해서 또 기획을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영화 소확행이라는 작품인데 본인이 직접 기획도 하고 또 주연을 하겠다라고 해서 안성기 배우 등 여러 배우들과 함께 조율을 했었는데 이게 결국 미완으로 끝나게 되면서 더 이상 스크린에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앵커]
김묘성 기자는 본 영화 있습니까, 나온 것 중에서?

[인터뷰]
저는 다 자료화면으로 봤던 것이 전부였던 것 같아요. 맨발의 청춘이나 별들의 고향이나.

[앵커]
어찌 보면 어떤 업무, 어떤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마지막일 수도 있겠네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돌아가시기 3일전까지 영화를 기획하고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 80세 나이에도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고인 이야기를 하다 보면 영화 이야기도 있지만 국회의원도 했어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짚어볼까요?

[인터뷰]
정계 진출에 있어서 굉장히 큰 뜻이 있었던 것 같다고 사람들이 추측을 하는데 신성일 씨 본인의 말로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대중적으로 톱의 위치, 스타의 위치에 있다 보니까 정계에서 정말 콜이 많았다는 거죠.

[앵커]
원하는 곳이 많았다...

[인터뷰]
원하는 곳이 굉장히 많았고 신성일 씨 말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유혹의 손길이 있었다. 그래서 도전을 하게 됐는데 사실 11대, 그리고 15대에서는 고배를 마셨어요.

그러다가 16대에서 당선이 되고 의정활동을 하게 되는데 고진감래 끝에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됐지만 여기에서도 또 고충이 있었죠.

2005년에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이 되면서 3년간 복역을 하게 되는데 그래도 이에 대해서 하는 말은 내가 정치를 하고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정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를 한 바가 또 있어요.

[앵커]
그렇군요. 그런 활동들이 또 연기에 묻어나올 수 있었을 것이고요. 이제 사생활 얘기를 짚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모든 얘기들을 다 저희가 추억을 하고 어떻게 보면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보내드리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되니까요.

본인이 자서전을 썼는데 불륜 얘기들을 나열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 엄앵란 씨와 부부관계가 있다는 걸 다 알고 있는데 불륜관계를 폭로를 해서 논란이 됐었죠.

[인터뷰]
굉장히 파격적인 언행이었고 많은 분들이 비판을 또 하기도 했는데요.

과거 2011년에 발간한 자서전을 통해서 과거에 내가 고 김영애, 그러니까 아나운서였던 한 여인을 최고로 사랑했다고 이야기를 했고 지금도 나에게는 애인이 있으며 이것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또 다른 사랑의 문제다라고 이야기해서 굉장히 대중으로부터 뭇매를 맞기도 했는데 해명 또한 굉장히 강경했어요.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일까, 속내가 무엇일까라고 제가 나중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진짜 속내가 따로 있었다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앵커]
뭔가요?

[인터뷰]
앞서서는 감옥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했었잖아요. 다녀오고 사회에 나오다 보니까 나와서 나의 입지가 전무하다, 나를 다 잊었다고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2007년에 사실 다른 이전의 책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전혀 안 팔린 거죠.

그러면서 2011년에 다시 책을 내게 됐는데 이때에는 조금 내가 수위를 높여서라도 실패를 하지 않겠다라는 과욕이 있었다고 해요.

그리고 또 매스컴의 속성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좀 폭탄발언을 해야겠다라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이것 때문에 결국 나를 아꼈던 팬들 그리고 나의 가족까지 상처를 입게 돼서 미안한 마음이 있다, 용서를 구한다라고까지 이야기를 한 바가 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YTN과 인터뷰에서 가슴에 두고는 못 버틴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속내를 더 김묘성 기자에게는 말씀을 해 주셨군요.

그렇다면 이제 엄앵란 씨와의 관계 그리고 엄앵란 씨는 예능 같은 데 출연을 하면서 많은 사랑이라든지 관심을 받았던 입장이기 때문에 더 많은 비난이 갔을 텐데 그 두 분의 관계는 어떻게 정리를 할 수 있을까요?

[인터뷰]
엄앵란 씨도 인터뷰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기를 좀 마음이 아팠다고 얘기를 했는데요. 그 포인트는 대중의 지나친 관심이나 걱정을 바라볼 때면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지금 힘들게 살고 있지 않은데 신성일 씨와의 관계가 너무나도 좋은데 왜 많은 사람들은 나를 불쌍하게 볼까라고 의문이 들었다는 거죠.

그리고 엄앵란 씨는 신성일 씨를 영원한 동반자, 동지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 남편은 평생 영화만을 보고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자유를 줘야 한다라는 생각을 계속 갖고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신성일 씨도 역시 우리는 다른 부부와 다르게 살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데 단지 대중들은 우리를 방송에서 봤다는 이유로 우리의 삶까지도 제단하려고 한다라고 이야기를 한 바 있어요.

그만큼 엄앵란-신성일 부부 같은 경우에는 사랑이나 애정을 넘어서서 동지애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사실 타인을 지적을 하고 할 권리는 저희에게 없죠. 오히려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야 되는 의무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제는 장례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영화인장으로 치러집니다. 수많은 타이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인으로 기억되는 것, 스스로도 원하셨을 것 같은데요.

마지막 어떤 절차로 진행이 되는지 짚어볼까요?

[인터뷰]
마지막까지 영화만을 생각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한국 영화의 발전에 공헌을 한 바로 예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지금 영화인장으로 그렇게 치러집니다.

그리고 발인은 내일 오전 10시로 예정되어 있고요. 그리고 장지는 경북 영천의 선영. 이곳은 계속해서 고인이 생전에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고향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곳에서 영면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신성일 씨에 대해서 그분의 삶, 여러 가지 있었지만 말씀드렸듯이 영화라는 단어로 모든 것이 집중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인 신성일 씨를 이렇게 보내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 김묘성 기자와 함께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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