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 데이비드 선언, '이 날' 아니면 없었다? 80년 전, 김구가 남긴 한 마디는?

캠프 데이비드 선언, '이 날' 아니면 없었다? 80년 전, 김구가 남긴 한 마디는?

2023.08.24. 오후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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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데이비드 선언, '이 날' 아니면 없었다? 80년 전, 김구가 남긴 한 마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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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3년 8월 24일 (목)
□ 진행 : 이현웅 아나운서
□ 출연자 :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 이현웅 아나운서(이하 이현웅) : 지난 주말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이 모여서 회담을 갖고 캠프 데이비드 원칙을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3국의 외교 무대를 보니까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첫 독립국이라고 선언된 카이로 회담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었는데요. 마침 올해 2023년이 카이로 선언이 8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80년 전 카이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들어보려고 합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 전화 연결돼 있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80년 전 카이로 회담 당시로 한번 돌아가 보는 시간 오늘 준비를 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겁니까?

◆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이하 박태균) : 네 그 당시에 이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 대통령하고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중국의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 총통이 카이로에서 만나서 전후에 일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그 결과를 성명서로 발표를 하게 됩니다.

◇ 이현웅 : 원래 처음부터 이 3개국만 모이려고 했던 겁니까?

◆ 박태균 : 그건 아니었고요. 원래는 소련의 스탈린도 초대를 할 예정이었어요. 그러니까 유럽 전선에서는 미국하고 소련이 주된 어떤 연합군으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려고 했는데 문제가 이 소련 스탈린은 또 굉장히 극좌의 전체주의 지도자고 또 장개석 총통은 굉장히 또 극우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아가지고는 얘기가 진행되기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카이로에서는 스탈린을 부르지 않고 세 사람이 만나고 이게 끝나자마자 이제 테헤란에서 또 회담을 갔는데 거기는 또 장개석 총통은 돌아가라고 하고 스탈린을 불러가지고 거기서는 이제 미국, 소련, 영국 이렇게 세 나라가 만나서 또 논의를 합니다.

◇ 이현웅 : 그랬군요. 그러면 카이로 선언이라고 부르는 그 선언에는 어떤 내용이 구체적으로 담겼습니까?

◆ 박태균 : 아무래도 저희한테 제일 중요한 것은 한국의 독립을 강대국들이 공약을 했던 첫 번째 국제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제 43년 말이니까 일본이 패망하기 한 1년 반 전인데요. 이 시점에서 한국을 독립시켜줘야 된다. 이 얘기가 저희한테 제일 중요하고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의 내용 중에 제일 중요한 부분은 일본한테 무조건 항복을 받는다. 그러니까 일본과의 어떤 이 전쟁이 끝날 때 어떤 조건을 달아서 항복을 받는 게 아니고 이건 무조건적인 항복이다. 이제 이게 되게 중요하고요. 그다음에 이제 거기에 명시돼 있는 게 1914년 이후에 이 14년이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입니다. 그 이후에 일본이 탐욕으로 이 점령한 지역에서 모두 철수를 한다. 그 지역은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라는 내용이 이제 두 번째로 들어가 있고요. 세 번째로 이 만주하고 타이완은 중국에 반환을 하고 한국은 독립을 시킨다. 이렇게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 이현웅 : 근데 당시 제가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굉장히 식민지가 많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독립만 따로 언급이 된 겁니까?

◆ 박태균 : 그렇죠. 저도 사실은 그게 굉장히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원래 지금 한국뿐만 아니라 사실 그 당시 중요한 문제는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인데요. 이 과거에 유럽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일본이 점령을 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뭐 일본 입장에서는 미국이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 이후에 여러 가지 보급품이 들어가는 걸 봉쇄를 하니까 자기들이 새로운 보급이 필요했고 그러면서 이제 자원이 많은 동남아시아를 다 점령을 해버린 건데 그러면서 이제 일본이 아 이 동남아시아를 유럽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우리가 갔다라는 이제 그 명분을 가지고 가서 점령을 해버린 거예요. 그런데 이 지역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한국만 언급을 한 거죠. 그런데 이게 기본적으로는 저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역할이 되게 컸다. 이걸 첫 번째 말씀드리고 싶고요. 그러니까 왜냐하면 한국에 대해서 독립을 한다라고 할 때 한국 독립시켜준다라고 할 때 두 가지 조항이 들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이유가 한국인들이 노예 상태로 있는 것을 고려해서라는 이유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무슨 얘기냐 하면 한국 사람들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거를 굉장히 원하고 있다라는 거를 열강의 지도자들이 이해하고 있었다라는 거고요. 두 번째는 이제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이제 독립을 시킨다라고 하는 건 이제 전후의 열강들의 전후 어떤 세계질서에 대한 정책이 들어가 있는 부분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한국에 대해서는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문제는 동남아에 대해서는 얘기를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도 왜 그랬을까를 이제 생각을 해봤는데 여기에 실마리를 주는 게 우리는 8월 15일에 해방이 됐잖아요. 근데 인도네시아하고 베트남은 8월 15일 45년 8월 15일 이후에 독립전쟁을 또 치릅니다. 왜냐하면 그 지역에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가지고 있었는데 네덜란드가 다시 복귀를 해요 인도네시아로. 그리고 프랑스가 베트남으로 복귀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기본적으로 왜 들어가지 않았느냐라는 걸 보면 그 당시에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영국이나 네덜란드나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거기에 반영이 돼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독립을 시켜주는 게 아니고 이전 상태로 복귀시켜준다는 건 이전처럼 다시 식민지로 돌아간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그런 어떤 민감성 때문에 그 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일본이 탐욕으로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 나가도록 한다 라는 걸로 그냥 퉁치는 방식으로 해서 이렇게 선언을 해버린 겁니다. 이제 그게 이 선언에서 보여주는 어떻게 보면 국제정치의 냉혹함이라고 할까요? 또 미국이 고려해야 될 부분들이 일본에 대한 전후처리를 하면서도 자기의 가장 중요한 동맹 국가였던 서유럽 국가들을 또 고려해야 될 부분들이 있거든요. 거기에다 또 이제 아시아의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영국의 수상도 이 카이로선언에 참여를 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이 다 고려돼서 나온 그런 작품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이현웅 : 장개석 같은 경우는 한국 광복군 임시정부와 동맹 관계였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라는 내용도 있던데 혹시 이런 것들도 영향을 줬을까요?

◆ 박태균 : 많이 영향을 줬죠. 그러니까 사실 장개석이 쓴 글이나 했던 얘기들을 보면 특히 많이 얘기하는 게 윤봉길 의사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 그때가 이 만주사변 이후 그리고 이제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후 상황이었는데 이게 중국 사람들이 그 많은 인구가 해내지 못하는 일을 윤봉길 의사라고 하는 한 사람이 이걸 해낸 것 아니냐라면서 이런 부분들이 우리가 항일 전쟁에서 큰 어떤 힘을 북돋우고 큰 역할이 될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고요. 그 이후에 한국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를 하게 됩니다. 이제 특히 김구 선생이 그때 되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죠. 그러면서 그 당시에 중국 국민당의 문서들을 보면 미국 정부와도 굉장히 긴밀하게 얘기를 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무장을 시키고 그 무장력을 이용해 가지고 항일 전선에서 좀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이제 그때 제가 굉장히 인상깊게 본 게 뭐냐 하면 중국 국민당에서 많이 고려를 한 게 뭐냐 하면 일본 조직에도 한국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일본 조직에만 충성을 하겠느냐 이 사람들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게 임시정부 쪽에 있는 사람들을 군사훈련을 시켜서 이 사람들을 국내에 보내고 또 일본에 침투하는 작전들을 했을 때 굉장히 중요한 공헌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이제 한국 광복군이 창설이 되는 거죠. 이런 내용들을 보면 사실 이제 이 장개석 같은 경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광복군에 대해서 굉장히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 이현웅 : 영국도 포함이 돼 있는데 영국은 대표적으로 식민지를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던 나라잖아요. 근데도 우리나라의 독립국으로서 인정을 한다라는 게 좀 와닿지가 않아서

◆ 박태균 : 처음에 반대합니다. 그걸 이제 장개석 총통이 가지고 가고 미국 쪽에서도 그걸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영국 쪽에서 이제 그게 걸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사실은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서유럽 국가도 마찬가지인데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 식민지를 독립해 준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는 게 뭐냐 하면요 1차 세계대전 때도 민족자결주의 들어보셨죠? 그러니까 이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얘기를 했는데 이거는 패전국 식민지에는 적용이 되는데 승전국 식민지는 적용이 안 된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일본은 1차 세계대전 때 승전국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한텐 적용이 안 된 건데 2차 세계대전에서는 일본은 패전국이에요. 그러니까 패전국인 식민지였던 한국을 독립시켜주고 대만을 다시 중국에 돌려준다는 것에 대해서 영국도 할 수 있는 얘기가 없죠. 그러니까 반대를 하고 싶어도 그거는 반대할 수 있는 명분이 없는 얘기가 돼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반대를 했지만 결국은 중재를 해서 이거를 한국의 독립에 대한 조항을 넣게 됐고 그래서 그 가운데 사실은 인듀코스라고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한국을 독립시킨다라는 얘기가 들어가게 된 거죠.

◇ 이현웅 : 적절한 코스라고 한다면 뭐가 되겠습니까?

◆ 박태균 : 그러니까 이게 적절한 과정 이것 때문에 논란이 많았는데 그 당시에는 이 신탁통치 또는 위임 통치라는 걸로 얘기가 되는 건데 그러니까 독립을 하고 나서 바로 자기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어떤 그런 어떤 준비가 되지 않은 나라는 일정 기간 정도는 신탁통치나 위임 통치를 받는다. 그런데 이게 이전에는 국제연맹이 있을 때는 위임 통치라는 개념이 있었는데 이게 국제연합 UN이 생기면서 이제 신탁통치라는 개념으로 바뀝니다. 근데 이게 한국의 독립운동가들한테는 굉장히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개념이었어요.

◇ 이현웅 : 교과서에서 본 적 있습니다.

◆ 박태균 : 근데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 위임 통치라는 게 어떻게 보면 1905년에 우리가 을사늑약 얘기를 할 때도 그때 통감부가 들어와서 5년 동안 있었던 것도 이게 사실 위임통치거든요.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일본이 남양군도라고 해가지고 지금 얘기하는 괌이나 사이판이나 이런 지역을 점령하고 있고 또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국을 세우고 막 이런 부분도 위임 통치를 하는 걸로 대부분 보도가 됐어요. 그러니까 이게 임시정부나 아니면 독립운동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약속해준 건 너무 고맙지만 거기에 인듀 코스라고 들어가는 거 이거 진짜 독립을 시켜주는 거 맞아라는 좀 의구심이 생길 수 있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런 부분들이 결국은 들어가는 게 나중에 해방 이후에 한국의 정치나 사회에 굉장히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서 소위 저희가 얘기하는 이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 운동 찬반탁 운동이라고 하는데요. 그걸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간의 갈등이 굉장히 심각하게 일어나게 되죠.

◇ 이현웅 : 그 과정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역할이 있었다고 또 알고 있는데

◆ 박태균 : 그렇죠. 뭐 반탁 운동을 처음 앞에서 이끌었던 것도 김구 선생이 이끌었고요. 또 그것 때문에 사실 미군정하고 아주 강하게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왜냐하면 이적절한 시기를 거쳐서 위임통치를 하거나 신탁통치를 한다. 이거는 사실 영국 정책이라기보다는 정책은 사실 미국 정책이었거든요. 미국이 전후에 어떻게 이 해방된 지역들을 관리를 할 것이냐라는 거에서 이제 그 안이 나오게 되는 거고요. 또 특히 이제 미국이 저는 뭐 좀 흥미롭게 봤던 건 뭐냐 하면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4개국 신탁통치안을 주장을 하는데 왜 4개국 신탁통치를 주장을 했을까 그것도 한반도에. 근데 제가 미국 문서를 찾다 보니까 어떤 얘기가 있냐 하면 19세기에 한국 상황에 대해서 미국 문서에 논의하는 게 1945년에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19세기에 보니까 어느 한 나라가 한반도에 대해서 굉장히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동북아시아와 전 세계가 굉장히 어지러워지고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중국이 자기가 완전히 한국에 대해 독점적인 그런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때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러시아가 들어오려고 할 때 결국은 러일 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이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결국은 태평양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냐 이게 한반도라는 지역이 어느 하나의 나라에 독점적 영향력이 들어오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굉장히 강하게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제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 얘기가 나왔고 사실 또 그 사례가 이제 독일하고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에 패전 후에 4개국에 의한 분할 점령이 됐었거든요. 그런 사례들을 가지고 들어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뭐 한국의 정치인이나 독립운동가들 입장에서는 이게 도대체 신탁통치라는 게 언제까지 갈 건지 언제 끝난다는 조항은 있는 건지 또 과거에 보면 위임통치라고 해서 군사기지 만들고 일본이 완전히 남태평양에 있는 섬들을 다 군사기지를 만들어버렸거든요. 그런 사례들을 보면서 굉장히 좀 부정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제 김구 선생이 굉장히 강하게 반탁 운동을 밀고 나갔는데 문제는 이게 또 미분종하고 부딪히게 돼요. 그리고 또 이 조선공산당 쪽에서 했던 이 모스크바 삼성 협정에 대한 찬성 이게 이제 찬탁이라고 보통 일반적으로 얘기를 하는데 이 김구 선생이 굉장히 강한 반공주의자였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걸 보니까 이게 잘못하면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 들어가는 거 아니냐 이거에 대한 또 굉장한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에 이걸 했는데 문제는 이게 길어지니까 아 이 찬반탁 운동 사이에서의 갈등이 우리 내부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오고 있구나 이제 이거를 느끼시게 돼요. 그게 이제 한 47년 초인데요. 그런 어떤 부분들도 사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많이 주목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번 학술대회에서 한번 그 얘기도 좀 해볼까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이현웅 : 학술대회라고 방금 말씀해 주셨는데 제가 마지막으로 그 질문을 드리려고 했는데 이야기 나온 김에 어떤 학술대회인지 잠깐 소개를 해 주시면요.

◆ 박태균 : 네 백범재단에서 후원을 하고요. 그다음에 이제 학자들이 나와서 주로 카이로 선언 80주년의 의미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요. 그러니까 카이로 선언이 그 자체로서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느냐 사실 저희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전중회담에서 카이로 얄타 포츠담 해가지고 이게 시험에도 많이 나왔는데 요새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근데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이제 그 자체도 좀 보고 또 그 선언에 대해서 한국의 지식인들 또 중국의 지식인들, 일본의 지식인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을 했는가 그리고 이제 그 이후에 형성되는 동아시아의 어떤 국제질서가 이후에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져 나가는가라는 내용을 가지고 이 카이로 선언이 갖고 있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려고 하고 또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했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주요 요인들이 어떤 대응을 했는가 이제 이런 부분들을 같이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 이현웅 : 그러면 학술대회 미리 보기 판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역시나 과거와 마찬가지로 외교는 더욱더 중요해지고 있는 상황이고 특히나 최근의 흐름들을 보면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현 시점에서 카이로 선언의 의미를 다시 해석해 본다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나라에게는 어떤 전략들이 필요할지 이 부분을 마지막으로 좀 들어볼게요.

◆ 박태균 : 그러니까 저희가 처음에 카이로 선언을 학자들이 볼 때는 한국의 독립을 약속해 준 그런 선언이었다는 것에만 굉장히 주목을 했고요. 또 한국과 관련돼서 인듀코스라고 하는 뭐 이런 부분들에만 했는데 사실은 전체 내용을 보면 굉장히 냉혹한 국제질서가 보여요.각 열강들이라든가 각 국가들이 자신들의 국가 이익을 이런 세계적으로 중요한 그런 회의와 결정해서 반영을 하고 있는가 지금도 사실 저희가 이제는 중견국을 넘어서 세계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가가 됐고 그래서 이제 많은 나라들과의 외교들을 해나가는데 물론 당연히 저는 거기서 중요한 거는 각 국가의 협력과 이해를 높여가는 게 너무 중요한데 이제 그 안에서 사실은 그 안에 숨어 있는 그 국가들의 어떤 국가 이익들 우리는 이제 이런 부분들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국가 이익에 맞게 좀 대응을 하고 협력을 해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들 이런 고민들이 저는 80년 전의 카이로회담에서 보여주는 것 같고요. 카이로 선언에서 보여주는 것 같고요.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임시정부나 김구 선생이 했던 것처럼 아주 밀접하게 저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들을 이끌어가야 된다. 이게 눈에 보이는 관계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제 그쪽에서 여러 가지 전략을 만들고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과의 관계들 이건 뭐 물밑에서 갈 수도 있고요. 그런데 이게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막 바뀌는 게 아니라 국가 이익이라고 하는 그런 기준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실용적으로 잘 해 나갈 수 있는가 이런 부분들에 좀 교훈을 저희가 좀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 이현웅 : 마지막 말씀에서 생각할 거리들이 좀 많았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듣도록 하고요. 학술대회 잘 또 진행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와 함께했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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