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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 방송 : FM 94.5 (17:10~19:00)
■ 방송일 : 2020년 9월 13일 (일요일)
■ 대담 : 이원복 교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라디오로 듣는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교수'
◇이성규 한국장애인재단 이사장(이하 이성규)> ‘너 공부 안 하고 만화책 보냐? 아, 먼나라 이웃나라 보는 구나? 잘했다.’ 이렇게 부모님이 아이에게 권하는 만화가 있습니다. 집 안에 책장을 장식했던 백과사전이 이분이 집필한 만화시리즈에 자리를 빼앗기는 현상도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국민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의 작가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입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원복 교수(이하 이원복)> 네. 안녕하세요.
◇이성규> 다들 아시겠지만 한 번 우리 청취자 여러분들께 인사 한 번 하시죠.
◆이원복> 네. 안녕하십니까. 먼나라 이웃나라의 작가 이원복입니다.
◇이성규> YTN라디오의 세계를 만나는 시간 NOW라는 코너가 있는데 여기에 지금 출연중이시죠?
◆이원복> 일년 반됐습니다. 매주 목요일.
◇이성규> 근데 이게 등잔 밑이 어두워갖고 이제야 모시게 됐습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원복> 요새 방콕 시대죠. 저는 많이 나돌아다니는 편이에요. 작업실이 있기 때문에.
◇이성규> 작업실이 어디 있어요?
◆이원복> 선릉역에 있습니다. 그리고 집이 잠실이니까 잠실, 선릉, 잠실, 선릉 이렇게 시계추같이 왔다갔다.
◇이성규> 요즘도 작업을 하시는 군요.
◆이원복> 작업하죠. 계속 체력이 있을 때까지 책을 만들어야 되니까.
◇이성규> 근데 아까 교수님 들어오실 때 제가 교수님 손을 한 번 잡아봤어야 되는데 그동안 오랫동안 손으로 그리시더라고요. 손이 좀 다른가? 어떻게 됐나를 확인했어야 됐는데 못했어요. 그 손으로 만화를 그리신 지가 얼마나 되셨어요?
◆이원복> 신문에 발표되기 시작한 것까지 합하면 62년부터니까, 한 60년 가까이 되죠.
◇이성규> 지금은 예술 장르에 만화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근데 예전에는 만화 그러면 혼나는 인식이었거든요.
◆이원복> 옛날에는 만화라고 그러면 일종의 서브 컬쳐, 하류 문화, 문화란 말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그니까 문화 쓰레기 정도 취급을 받았죠.
◇이성규> 그런데 어떻게 쓰레기를 손을 되셨어요?
◆이원복> 재밌잖아요. 그리고 한 번 빠지면 못 빠져나오는 게 만화거든요.
◇이성규> 월터 스콧 소설을 만화로 만든 아이반호 이 부분하고도 관계가 좀 있다고 들었어요.
◆이원복> 이제 사연이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최초로 그린 만화인데, 그 만화가 제가 월터 스콧을 알아서 그린 것도 아니고,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어느 어린이 신문사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소년한국일보라고. 그래서 62년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거기서는 원하는 게 고등학생인 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건비가 싼 알바생을 원하는 거죠. 그래서 그 아이반호를 주면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만화입니다. 그걸 가지고 트레싱지 비치는 종이를 대고 베껴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것이 대고 그린 만화가 제 처음으로 나간, 이름도 당연히 안 나가죠.
◇이성규> 교수님 이름으로 안 나간 거죠?
◆이원복> 당연히 안 나갔죠. 대고 그린 사람을 누가 그럽니까. 그래서 신문에 처음으로 인쇄가 된 게 그게 처음이에요.
◇이성규> 그런데 그게 하나의 첫 작품이라고 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이원복> 작품은 아니고 첫 일이었죠.
◇이성규> 첫 일이었고, 첫 작품이라고 하는 거는 어떤 거예요?
◆이원복> 그러다가 쭉 가다가 어린이 신문이란 게 특성이 있습니다. 1일 발행으로 4면이었는데, 4면에 만화가 하나씩 들어가요. 어린이 신문이니까. 그런데 이제 신문사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줄여야 되고 작가한테 작품을 주면 고료가 들어가니까 제일 값싼 고등학생인 저한테 알바를 시켰는데 보니까 그림은 둘째치고 맨날 베끼고 대고 그리니까 실력이 좀 늘었거든요. 근데 제일 기특한 게 마감 날을 잘 지켜요. 제일 중요하죠. 그니까 너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하면서 이 4개 면의 만화를 제가 다 그렸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그때부터는 제 이름을 걸고 나가는 창작도 하고 그랬죠. 그것이 아마 1968년, 1969년 그쯤 됐을 겁니다.
◇이성규> 그때 그 첫 창작품..
◆이원복> 4~5년 지난 다음에.
◇이성규> 그게 작품이 뭐죠?
◆이원복> 그때는 뭐 또록이라고 해서 순정만화, 하도 많아가지고.
◇이성규> 어린이 냄새가 물씬 풍기네요. 그렇게 막 일을 시작하시고 주변에서는 만류하는 분도 계시고 이런 상황 아니었습니까?
◆이원복> 그런 말을 많이 듣죠. 그런데 전혀 그런 게 없었습니다. 제가 7남매인데 제가 46년생이니까 4살 때 6.25가 났어요. 형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 아닙니까? 그니까 6.25 직후의 가정이 완전히 박살이 나가지고 전부 다 자기들 먹고 살기 바쁘니까 아무도 막내 동생한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나가서 고등학생 때 알바해서 용돈을 벌어서 쓰니까 그게 기특하니까 아무 말도 안 하죠. 그래서 저는 어떠한 저해나 제지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죠.
◇이성규> 경제가 중요해요. 이원복 교수님하면 먼나라 이웃나라가 생각이 나는데 연재하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원복> 1981년부터입니다. 40년 돼죠.
◇이성규> 그거를 어떻게 해서 시작을 하셨습니까?
◆이원복> 그때가 제가 독일에 유학을 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 독일에 처음 간 것이 1975년입니다. 그때만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국민 소득이 천불, 이천불 정도밖에 안 되는 그런 수준이었고, 개발도상국가로서 한창 어려웠던 때 아닙니까? 외국에 나가니까 선진국 형편이 너무 놀라운 거예요. 아, 근데 어떻게 하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잘 사고, 우리는 이렇게 참 어렵고 힘들게 사는 가 그러다보니까 이 사람들이 잘 사는 이유를 한 번 찾아봤으면 좋겠다해서 시작한 것이 먼나라 이웃나라죠.
◇이성규> 독일을 쭉 보시고 유럽 다 다니셨겠네요?
◆이원복> 그때는 제가 거기서 전공한 것이 시각디자인입니다. 시각이라는 것은 저에게 큰 핑계거리가 되었죠. 봐야 되니까. 그래서 보러 다닌다는 핑계로 공부는 때려치우고 학교는 안 가고, 왜냐하면 디자인이니까요. 집에서 주로 작업하는 거니까. 주로 고물차 끌고서 유럽 여행 다닌 게 거의 대부분입니다.
◇이성규> 눈으로 많이 들어오게 하셨군요.
◆이원복> 네. 많이 봤어요.
◇이성규> 근데 그때 먼나라 이웃나라 집필하실 때 인터넷이 있던 것도 아니고, 자료가 방대할 텐데 그걸 다 어떻게 구하셨어요?
◆이원복> 그때 먼나라 이웃나라 1부에 속하는 유럽의 여섯 나라는 제가 독일에 있을 때 쓴 겁니다. 근데 그것이 주로 서적이나 여러 가지 신문에 기초해서 쓰여진 건 사실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제가 감히 유럽 여섯 나라에 대해서 쓸 수 있었던 것은 유럽하고 아시아는 다릅니다. 왜 그러냐 아시아는 각 나라가 전부 특징이 달라요. 그런데 유럽은 동쪽 끝에서 서쪽 끝,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전부 기독교로 통일이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정교나 카톨릭이나 개신교냐 루터교냐 그런 정도의 차이지, 기독교로 유럽이 완전히 통일 됐다는 얘기는 기본적인 멘탈리티 의식 구조가 같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그 기본만 해석하면 조금 조금씩 다르지만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태리 등 해결 코드가 다 나온단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의 기본적인 코드의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이 맥주집에서 세계에서 몰려든 유학생들, 제가 깜짝 놀란 게 저는 외국에 처음 나왔는데 제가 처음에 들어간 기숙사에 국적이 35개였어요. 그 아이들하고 맥주집에 가서 맥주 하나 놓고 밤새도록 떠든 거, 거기서 너무나 많은 걸 배웠죠.
◇이성규> 독일 대학의 기숙사에서.
◆이원복> 체코에서 온 친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친구, 브라질에서 온 친구 전혀 접하지 못했던 많은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성규> 참 유럽이 그게 장점이죠?
◆이원복> 장점이죠.
◇이성규> 나라는 조금 조금하지만 여러 나라에서 왔는데도 익숙하고 서로가.
◆이원복> 근데 이제 우리나라도 많이 글로벌화 돼서. 이제는 외국분들이 많이 오셔가지고 우리말 배워가지고 또 즐겁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성규> 근데 또 궁금한 게 먼나라 이웃나라가 참 제목이 좋은 것 같아요. 이게 누구 아이디어였어요?
◆이원복> 제가 신문 연재했던 소년한국일보 사장님이 김수남씨라고 계세요. 이분이 시인이고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시를 제일 많이 암송하시는 분이에요. 문학청년이었던 분이고, 그런데 그분하고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너 요새 외국 나가기 힘든 시대에 외국 나가서 유학 생활하면서 느끼는 거 많을 거 아니냐, 그거 만화로 좀 해봐라 그런 아이디어를 줬고요. 그거 좋네요, 그거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인데 그럼 제목을 뭐라고 할까요라고 하니까 0.5초도 안 기다리고 먼나라 이웃나라 됐네. 역시 시인이라 달라요. 그래서 먼나라 이웃나라 딱 거기서 0.5초 만에 나왔어요.
◇이성규> 그리고 또 0.1초 받아들이신 교수님도 대단하시네요.
◆이원복> 어감이 좋잖아요. 하하.
◇이성규> 거기에 보면 역사 얘기가 참 방대하게 나오거든요. 그리고 그게 이제 또 압축해서 만화에 담아야 되는데 그 작업을 하시는 시간도 꽤...
◆이원복> 거의 40년 걸렸죠. 81년에 시작을 해가지고 지금도 만들고 있으니까 40년 동안 외곬으로 온 것 아닙니까.
◇이성규> 먼나라 이웃나라에 나오는 베레모 남자 교수님이에요?
◆이원복> 아니에요. 저는 베레모 없어요.
◇이성규> 오늘 안 쓰고 오시더라고요.
◆이원복> 원래 없어요. 저는 원래 모자를 안 쓰니까. 그게 뭐냐면 일종의 우리 사람들의 선입견이 화가는 베레모를 쓰고...그래서 이제 나레이터로 등장시킨 거 뿐이죠.
◇이성규>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 이원복 교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까 이제 시각 디자인하셨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먼나라 이웃나라의 역사를 그리셨잖아요. 근데 전공을 한 이 사람들이 가끔 비판을 하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이원복> 근데 만화가 좋은 게 그런 게 있어요. 좀 잘못된 거 있으면 에이, 만화니까. 그리고 좀 괜찮으면 오, 만화인데도? 그래서 거기서 많은 부분이 익스큐즈가 됐어요.
◇이성규> 그런 어떤 해석이 가능하군요.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의 출판 만화 지금은 꽤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그 중에서도 제일 오랫동안 베스트셀러가 됐었지 않습니까? 많이 팔렸죠?
◆이원복> 좀 나왔죠.
◇이성규> 그 전에 처음 만화 그리시면서 이렇게 많이 팔릴 거라는 예상은 하셨나요?
◆이원복> 저는 상상도 못 했죠.
◇이성규> 이게 40년 동안 집필을 하셨다고 그랬는데, 먼나라 이웃나라는 완간된 게 언제죠?
◆이원복> 87년입니다. 43년 전에. 그니까 1981년부터 연재를 해서 86년까지 했고 그 다음에 87년에 유럽 여섯 나라를 처음으로 단행본으로 출간을 했죠.
◇이성규> 그렇게 40년 동안 해오시면서 뭔가 좀 추억거리 중에 딱 도드라져서 생각나는 게 있으세요?
◆이원복> 예컨대, 제가 보람을 느끼는 게 어느 우리나라 외교관인데 영국을 갔는데 아이를 데리고 간 거예요. 근데 가족에게 초대를 받아서 얘기를 하다가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헨리 8세 여섯 명의 와이프 얘기를 하니까 거기 사람들이 뒤집어진 것 같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게 먼나라 이웃나라에 나오거든요. 이런 것 같은 것이 아주 흥미로운.. 그리고 또 미국에 갔는데 초등학교 과정에 미국 대통령 순서 외우기, 근데 대부분이 1,2,3대밖에 몰라요. 워싱턴, 그 다음에 애덤스 그 다음에 재퍼슨 이러는데 그 다음은 모르는데. 초등학교 한국 아이가 10대까지 잘잘잘 외우니까 거기서 아메리칸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잘 아냐고 그런 것들이 큰 보람이죠.
◇이성규> 그러셨군요. 유학도 다녀오시고 보통 그 당시 만화를 그리는 분들 중에서는 상당히 엘리트라고 사람들이 생각을 하셨을 텐데. 그게 엘리트가 만화를 그린다 이러면서 좀 부자연스러운 분위기도 있었나요?
◆이원복> 부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대변하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알려드리면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책이 처음 출간이 됐습니다. 출간이 되자마자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 인터뷰를 요청한데가 4대 일간지나 그런 데가 아니라 지하철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무가지 인터뷰였어요. 그래서 인터뷰를 1시간 했는데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묻고 어떻게 교수가 만화를 그리느냐, 그니까 소위 지성의 상징이고 어떤 학문의 전당에 있어야 할 교수가 만화라는 하급 예술도 아닌 그런 것을 했다는 것이 이게 너무 지나친 거 아니냐 그래서 신기하다고 보도가 됐는데. 매스컴 특성상 하나가 보도되면 줄줄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4대 일간지부터해서 모든 매스컴들하고 인터뷰를 했어요. 그래서 그 책이 많이 알려지게 된 거죠.
◇이성규> 요즘 후배 만화가들을 보시면, 주로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많이 하죠?
◆이원복> 웹툰도 많이 하고. 지금이 대변혁기입니다. 변환기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정인데, 거의 넘어갔어요. 거의 100% 넘어갔는데, 제가 말하자면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입니다. 그러나 아날로그 만화나 디지털 만화나 근본적으로 그리는 건 같아요. 콘텐츠도 마찬가지고. 단지 성격이 다른 것은 아날로그 손으로 그리는 만화는 당시에 출판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편집자가 있어서 걸러내는데, 이 디지털은 직접 웹사이트에 띄우기 때문에 중간에 거르는 사람이 없죠. 그렇기 때문에 그림이 훨씬 더 거칠어질 수도 있고, 더 직접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만 포털 같은 데서 많이 필터링을 하니까 그런 염려는 크게 없습니다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독자와 작가가 직접 만나는 것이 디지털이고, 독자와 편집자와 작가가 간접으로 만나는 것이 아날로그다 그런 차이죠.
◇이성규> 교수님 생각엔 어떤 게 더 괜찮은 것 같아요?
◆이원복> 근데 지금은 전부 다 빨리빨리 시대니까. 아무래도 웹툰이 대세니까 아무래도 그쪽으로 가야겠죠.
◇이성규> 와인만화가 와인의 세계를 집필을 하셨잖아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까 독일에서는 맥주 펍 말씀을 하셨는데, 이원복 와인 셀렉션도 있고 근데 와인 얘기도 한 번 해주세요.
◆이원복> 제가 와인 만화를 그리리라고는 와인 만화 집필을 시작하기 전까지 상상도 못했어요. 2000년 대 초반에 우리나라에 어떤 일본 만화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근데 그 만화를 읽어보면 그 작가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솔직하게 얘기해서 서구 문명에 대한 하나의 열등감이 절절히 절어있어요. 아니, 왜 우리가 내 돈 내고 와인 사마시면서 그 와인 주인 조카이름까지 알아야 돼? 왜 와인을 내 돈 내고 마시면서 내가 와인을 지배해야지, 왜 경배하면서 마십니까? 와인마시면서 맛있으면 되는 거지, 이 와인에서 무슨 냄새가 나고, 왜 분석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때 와인 주권을 되찾아야지, 우리나라의 워낙 와인에 대한 문화가 없는 독특한 나라예요. 왜냐하면 일제에게 식민 지배를 당했기 때문에 와인 문화가 서구 문명이니까 그게 안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2000년대 들어와서 우리나라가 좀 살기 시작하니까 그때 와인문화가 갑자기 쏟아져 들어왔고, 와인의 지식이 너무 없다보니까 그런 만화에 의존했어요. 그런데 그 만화가 서구에 대한 열등감에 완전히 절어있었기 때문에 이거 그냥 뒀다가는 완전히 우리나라 또 서구의 문화적인 식민지가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와인을 좀 주인의식을 갖고 마시자 그런 의도에서 만든 게 와인의 세계죠.
◇이성규> 저도 이거 읽어봤어요. 근데 상당히 감동을 받았는데, 이원복 와인 셀렉션을 출시를 하셔서 그때 수익금이..
◆이원복> 수익금이 전혀 없었고, 어떤 와인 회사가 한국에 런칭 하는데 칠레 와인이었어요. 그 당시에 허영만씨 와인이라든지 몇 몇 분이 그렇게 했거든요. 그래서 한 번 해보냐 했는데 별로 안 나갔어요.
◇이성규> 그렇게 하셔서 여기저기 기부도 하시고 그러셨죠.
◆이원복> 그거 하고는 관계없고 기부는 난 차원에서 한 거고.
◇이성규> 교수님이시고 교육계에서 종사하셔서 그런지 장학금을 주시는...
◆이원복> 옛날에 정년퇴직을 하면서 2012년에 정년퇴직을 했는데 그때 아이티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잖아요. 내가 장학금을 대가지고 가난한 아이티의 유학생을 우리나라에 데려와서 선진 대한민국 문명을 좀 배우게 했으면 좋겠다 해서 아이티 정부에게 장학금을 주겠다 제안을 했어요. 한 2명 정도. 근데 제가 그걸 포기를 했어요. 포기를 왜 했냐니까 장학금을 주는 그 학생을 선발하는데 그 정부 관리가 뒷돈을 달래요. 내가 왜 뒷돈까지 주면서 장학생을 데려옵니까? 그래서 그걸 접고 딴 데 기부했죠.
◇이성규> 근데 이제 만화를 시작하신지 60년이신데.. 참 환갑이 되셨는데 만화라는 건 인간 이원복과 어떤 관련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이원복> 쉽게 얘기하자면 저의 전부고, 우선, 왜냐하면 지금까지 먹고 살아온 것도 만화덕분이고, 내가 또 이런 잡을 가지고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게 된 것도 만화고, 근데 저한테 만화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평생 즐겁게 지내온 놀이터였어요. 내가 즐거우니까 하는 거니까 놀이는, 만화를 즐겁게 그리니까 그건 놀이터죠.
◇이성규> 근데 여러 가지 작품을 쭉 만들어 오시고 그랬는데 나는 만화가다, 나는 작가다, 이런 생각을 하실 텐데. 앞으로 지금도 보니까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실 텐데. 나의 인생이 어떻게 세상에 기억되기를 바라십니까?
◆이원복> 글쎄요. 세상에 까지는 저는 그렇게 큰 욕심은 안 냅니다. 단지 제가 지금까지 그려오는 만화의 원칙은 내 아들 하나밖에 없어요. 자식이 아들 하나인데. 내 아들한테 부끄럽지 않는 만화를 그린다예요. 나중에 아들이 와가지고 아빠 이거 뭐야? 그런 소리 들으면 안 되잖아요.
◇이성규> 가장 가슴에 와닿은 얘기네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먼나라 이웃나라와 와인의 세계를 집필하신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였습니다. 교수님,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원복> 네. 감사합니다.
◇이성규> 이 프로그램은 YTN라디오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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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일 : 2020년 9월 13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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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로 듣는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교수'
◇이성규 한국장애인재단 이사장(이하 이성규)> ‘너 공부 안 하고 만화책 보냐? 아, 먼나라 이웃나라 보는 구나? 잘했다.’ 이렇게 부모님이 아이에게 권하는 만화가 있습니다. 집 안에 책장을 장식했던 백과사전이 이분이 집필한 만화시리즈에 자리를 빼앗기는 현상도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국민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의 작가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입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원복 교수(이하 이원복)> 네. 안녕하세요.
◇이성규> 다들 아시겠지만 한 번 우리 청취자 여러분들께 인사 한 번 하시죠.
◆이원복> 네. 안녕하십니까. 먼나라 이웃나라의 작가 이원복입니다.
◇이성규> YTN라디오의 세계를 만나는 시간 NOW라는 코너가 있는데 여기에 지금 출연중이시죠?
◆이원복> 일년 반됐습니다. 매주 목요일.
◇이성규> 근데 이게 등잔 밑이 어두워갖고 이제야 모시게 됐습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원복> 요새 방콕 시대죠. 저는 많이 나돌아다니는 편이에요. 작업실이 있기 때문에.
◇이성규> 작업실이 어디 있어요?
◆이원복> 선릉역에 있습니다. 그리고 집이 잠실이니까 잠실, 선릉, 잠실, 선릉 이렇게 시계추같이 왔다갔다.
◇이성규> 요즘도 작업을 하시는 군요.
◆이원복> 작업하죠. 계속 체력이 있을 때까지 책을 만들어야 되니까.
◇이성규> 근데 아까 교수님 들어오실 때 제가 교수님 손을 한 번 잡아봤어야 되는데 그동안 오랫동안 손으로 그리시더라고요. 손이 좀 다른가? 어떻게 됐나를 확인했어야 됐는데 못했어요. 그 손으로 만화를 그리신 지가 얼마나 되셨어요?
◆이원복> 신문에 발표되기 시작한 것까지 합하면 62년부터니까, 한 60년 가까이 되죠.
◇이성규> 지금은 예술 장르에 만화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근데 예전에는 만화 그러면 혼나는 인식이었거든요.
◆이원복> 옛날에는 만화라고 그러면 일종의 서브 컬쳐, 하류 문화, 문화란 말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그니까 문화 쓰레기 정도 취급을 받았죠.
◇이성규> 그런데 어떻게 쓰레기를 손을 되셨어요?
◆이원복> 재밌잖아요. 그리고 한 번 빠지면 못 빠져나오는 게 만화거든요.
◇이성규> 월터 스콧 소설을 만화로 만든 아이반호 이 부분하고도 관계가 좀 있다고 들었어요.
◆이원복> 이제 사연이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최초로 그린 만화인데, 그 만화가 제가 월터 스콧을 알아서 그린 것도 아니고,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어느 어린이 신문사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소년한국일보라고. 그래서 62년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거기서는 원하는 게 고등학생인 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건비가 싼 알바생을 원하는 거죠. 그래서 그 아이반호를 주면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만화입니다. 그걸 가지고 트레싱지 비치는 종이를 대고 베껴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것이 대고 그린 만화가 제 처음으로 나간, 이름도 당연히 안 나가죠.
◇이성규> 교수님 이름으로 안 나간 거죠?
◆이원복> 당연히 안 나갔죠. 대고 그린 사람을 누가 그럽니까. 그래서 신문에 처음으로 인쇄가 된 게 그게 처음이에요.
◇이성규> 그런데 그게 하나의 첫 작품이라고 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이원복> 작품은 아니고 첫 일이었죠.
◇이성규> 첫 일이었고, 첫 작품이라고 하는 거는 어떤 거예요?
◆이원복> 그러다가 쭉 가다가 어린이 신문이란 게 특성이 있습니다. 1일 발행으로 4면이었는데, 4면에 만화가 하나씩 들어가요. 어린이 신문이니까. 그런데 이제 신문사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줄여야 되고 작가한테 작품을 주면 고료가 들어가니까 제일 값싼 고등학생인 저한테 알바를 시켰는데 보니까 그림은 둘째치고 맨날 베끼고 대고 그리니까 실력이 좀 늘었거든요. 근데 제일 기특한 게 마감 날을 잘 지켜요. 제일 중요하죠. 그니까 너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하면서 이 4개 면의 만화를 제가 다 그렸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그때부터는 제 이름을 걸고 나가는 창작도 하고 그랬죠. 그것이 아마 1968년, 1969년 그쯤 됐을 겁니다.
◇이성규> 그때 그 첫 창작품..
◆이원복> 4~5년 지난 다음에.
◇이성규> 그게 작품이 뭐죠?
◆이원복> 그때는 뭐 또록이라고 해서 순정만화, 하도 많아가지고.
◇이성규> 어린이 냄새가 물씬 풍기네요. 그렇게 막 일을 시작하시고 주변에서는 만류하는 분도 계시고 이런 상황 아니었습니까?
◆이원복> 그런 말을 많이 듣죠. 그런데 전혀 그런 게 없었습니다. 제가 7남매인데 제가 46년생이니까 4살 때 6.25가 났어요. 형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 아닙니까? 그니까 6.25 직후의 가정이 완전히 박살이 나가지고 전부 다 자기들 먹고 살기 바쁘니까 아무도 막내 동생한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나가서 고등학생 때 알바해서 용돈을 벌어서 쓰니까 그게 기특하니까 아무 말도 안 하죠. 그래서 저는 어떠한 저해나 제지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죠.
◇이성규> 경제가 중요해요. 이원복 교수님하면 먼나라 이웃나라가 생각이 나는데 연재하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원복> 1981년부터입니다. 40년 돼죠.
◇이성규> 그거를 어떻게 해서 시작을 하셨습니까?
◆이원복> 그때가 제가 독일에 유학을 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 독일에 처음 간 것이 1975년입니다. 그때만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국민 소득이 천불, 이천불 정도밖에 안 되는 그런 수준이었고, 개발도상국가로서 한창 어려웠던 때 아닙니까? 외국에 나가니까 선진국 형편이 너무 놀라운 거예요. 아, 근데 어떻게 하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잘 사고, 우리는 이렇게 참 어렵고 힘들게 사는 가 그러다보니까 이 사람들이 잘 사는 이유를 한 번 찾아봤으면 좋겠다해서 시작한 것이 먼나라 이웃나라죠.
◇이성규> 독일을 쭉 보시고 유럽 다 다니셨겠네요?
◆이원복> 그때는 제가 거기서 전공한 것이 시각디자인입니다. 시각이라는 것은 저에게 큰 핑계거리가 되었죠. 봐야 되니까. 그래서 보러 다닌다는 핑계로 공부는 때려치우고 학교는 안 가고, 왜냐하면 디자인이니까요. 집에서 주로 작업하는 거니까. 주로 고물차 끌고서 유럽 여행 다닌 게 거의 대부분입니다.
◇이성규> 눈으로 많이 들어오게 하셨군요.
◆이원복> 네. 많이 봤어요.
◇이성규> 근데 그때 먼나라 이웃나라 집필하실 때 인터넷이 있던 것도 아니고, 자료가 방대할 텐데 그걸 다 어떻게 구하셨어요?
◆이원복> 그때 먼나라 이웃나라 1부에 속하는 유럽의 여섯 나라는 제가 독일에 있을 때 쓴 겁니다. 근데 그것이 주로 서적이나 여러 가지 신문에 기초해서 쓰여진 건 사실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제가 감히 유럽 여섯 나라에 대해서 쓸 수 있었던 것은 유럽하고 아시아는 다릅니다. 왜 그러냐 아시아는 각 나라가 전부 특징이 달라요. 그런데 유럽은 동쪽 끝에서 서쪽 끝,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전부 기독교로 통일이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정교나 카톨릭이나 개신교냐 루터교냐 그런 정도의 차이지, 기독교로 유럽이 완전히 통일 됐다는 얘기는 기본적인 멘탈리티 의식 구조가 같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그 기본만 해석하면 조금 조금씩 다르지만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태리 등 해결 코드가 다 나온단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의 기본적인 코드의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이 맥주집에서 세계에서 몰려든 유학생들, 제가 깜짝 놀란 게 저는 외국에 처음 나왔는데 제가 처음에 들어간 기숙사에 국적이 35개였어요. 그 아이들하고 맥주집에 가서 맥주 하나 놓고 밤새도록 떠든 거, 거기서 너무나 많은 걸 배웠죠.
◇이성규> 독일 대학의 기숙사에서.
◆이원복> 체코에서 온 친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친구, 브라질에서 온 친구 전혀 접하지 못했던 많은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성규> 참 유럽이 그게 장점이죠?
◆이원복> 장점이죠.
◇이성규> 나라는 조금 조금하지만 여러 나라에서 왔는데도 익숙하고 서로가.
◆이원복> 근데 이제 우리나라도 많이 글로벌화 돼서. 이제는 외국분들이 많이 오셔가지고 우리말 배워가지고 또 즐겁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성규> 근데 또 궁금한 게 먼나라 이웃나라가 참 제목이 좋은 것 같아요. 이게 누구 아이디어였어요?
◆이원복> 제가 신문 연재했던 소년한국일보 사장님이 김수남씨라고 계세요. 이분이 시인이고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시를 제일 많이 암송하시는 분이에요. 문학청년이었던 분이고, 그런데 그분하고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너 요새 외국 나가기 힘든 시대에 외국 나가서 유학 생활하면서 느끼는 거 많을 거 아니냐, 그거 만화로 좀 해봐라 그런 아이디어를 줬고요. 그거 좋네요, 그거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인데 그럼 제목을 뭐라고 할까요라고 하니까 0.5초도 안 기다리고 먼나라 이웃나라 됐네. 역시 시인이라 달라요. 그래서 먼나라 이웃나라 딱 거기서 0.5초 만에 나왔어요.
◇이성규> 그리고 또 0.1초 받아들이신 교수님도 대단하시네요.
◆이원복> 어감이 좋잖아요. 하하.
◇이성규> 거기에 보면 역사 얘기가 참 방대하게 나오거든요. 그리고 그게 이제 또 압축해서 만화에 담아야 되는데 그 작업을 하시는 시간도 꽤...
◆이원복> 거의 40년 걸렸죠. 81년에 시작을 해가지고 지금도 만들고 있으니까 40년 동안 외곬으로 온 것 아닙니까.
◇이성규> 먼나라 이웃나라에 나오는 베레모 남자 교수님이에요?
◆이원복> 아니에요. 저는 베레모 없어요.
◇이성규> 오늘 안 쓰고 오시더라고요.
◆이원복> 원래 없어요. 저는 원래 모자를 안 쓰니까. 그게 뭐냐면 일종의 우리 사람들의 선입견이 화가는 베레모를 쓰고...그래서 이제 나레이터로 등장시킨 거 뿐이죠.
◇이성규>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 이원복 교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까 이제 시각 디자인하셨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먼나라 이웃나라의 역사를 그리셨잖아요. 근데 전공을 한 이 사람들이 가끔 비판을 하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이원복> 근데 만화가 좋은 게 그런 게 있어요. 좀 잘못된 거 있으면 에이, 만화니까. 그리고 좀 괜찮으면 오, 만화인데도? 그래서 거기서 많은 부분이 익스큐즈가 됐어요.
◇이성규> 그런 어떤 해석이 가능하군요.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의 출판 만화 지금은 꽤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그 중에서도 제일 오랫동안 베스트셀러가 됐었지 않습니까? 많이 팔렸죠?
◆이원복> 좀 나왔죠.
◇이성규> 그 전에 처음 만화 그리시면서 이렇게 많이 팔릴 거라는 예상은 하셨나요?
◆이원복> 저는 상상도 못 했죠.
◇이성규> 이게 40년 동안 집필을 하셨다고 그랬는데, 먼나라 이웃나라는 완간된 게 언제죠?
◆이원복> 87년입니다. 43년 전에. 그니까 1981년부터 연재를 해서 86년까지 했고 그 다음에 87년에 유럽 여섯 나라를 처음으로 단행본으로 출간을 했죠.
◇이성규> 그렇게 40년 동안 해오시면서 뭔가 좀 추억거리 중에 딱 도드라져서 생각나는 게 있으세요?
◆이원복> 예컨대, 제가 보람을 느끼는 게 어느 우리나라 외교관인데 영국을 갔는데 아이를 데리고 간 거예요. 근데 가족에게 초대를 받아서 얘기를 하다가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헨리 8세 여섯 명의 와이프 얘기를 하니까 거기 사람들이 뒤집어진 것 같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게 먼나라 이웃나라에 나오거든요. 이런 것 같은 것이 아주 흥미로운.. 그리고 또 미국에 갔는데 초등학교 과정에 미국 대통령 순서 외우기, 근데 대부분이 1,2,3대밖에 몰라요. 워싱턴, 그 다음에 애덤스 그 다음에 재퍼슨 이러는데 그 다음은 모르는데. 초등학교 한국 아이가 10대까지 잘잘잘 외우니까 거기서 아메리칸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잘 아냐고 그런 것들이 큰 보람이죠.
◇이성규> 그러셨군요. 유학도 다녀오시고 보통 그 당시 만화를 그리는 분들 중에서는 상당히 엘리트라고 사람들이 생각을 하셨을 텐데. 그게 엘리트가 만화를 그린다 이러면서 좀 부자연스러운 분위기도 있었나요?
◆이원복> 부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대변하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알려드리면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책이 처음 출간이 됐습니다. 출간이 되자마자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 인터뷰를 요청한데가 4대 일간지나 그런 데가 아니라 지하철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무가지 인터뷰였어요. 그래서 인터뷰를 1시간 했는데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묻고 어떻게 교수가 만화를 그리느냐, 그니까 소위 지성의 상징이고 어떤 학문의 전당에 있어야 할 교수가 만화라는 하급 예술도 아닌 그런 것을 했다는 것이 이게 너무 지나친 거 아니냐 그래서 신기하다고 보도가 됐는데. 매스컴 특성상 하나가 보도되면 줄줄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4대 일간지부터해서 모든 매스컴들하고 인터뷰를 했어요. 그래서 그 책이 많이 알려지게 된 거죠.
◇이성규> 요즘 후배 만화가들을 보시면, 주로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많이 하죠?
◆이원복> 웹툰도 많이 하고. 지금이 대변혁기입니다. 변환기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정인데, 거의 넘어갔어요. 거의 100% 넘어갔는데, 제가 말하자면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입니다. 그러나 아날로그 만화나 디지털 만화나 근본적으로 그리는 건 같아요. 콘텐츠도 마찬가지고. 단지 성격이 다른 것은 아날로그 손으로 그리는 만화는 당시에 출판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편집자가 있어서 걸러내는데, 이 디지털은 직접 웹사이트에 띄우기 때문에 중간에 거르는 사람이 없죠. 그렇기 때문에 그림이 훨씬 더 거칠어질 수도 있고, 더 직접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만 포털 같은 데서 많이 필터링을 하니까 그런 염려는 크게 없습니다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독자와 작가가 직접 만나는 것이 디지털이고, 독자와 편집자와 작가가 간접으로 만나는 것이 아날로그다 그런 차이죠.
◇이성규> 교수님 생각엔 어떤 게 더 괜찮은 것 같아요?
◆이원복> 근데 지금은 전부 다 빨리빨리 시대니까. 아무래도 웹툰이 대세니까 아무래도 그쪽으로 가야겠죠.
◇이성규> 와인만화가 와인의 세계를 집필을 하셨잖아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까 독일에서는 맥주 펍 말씀을 하셨는데, 이원복 와인 셀렉션도 있고 근데 와인 얘기도 한 번 해주세요.
◆이원복> 제가 와인 만화를 그리리라고는 와인 만화 집필을 시작하기 전까지 상상도 못했어요. 2000년 대 초반에 우리나라에 어떤 일본 만화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근데 그 만화를 읽어보면 그 작가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솔직하게 얘기해서 서구 문명에 대한 하나의 열등감이 절절히 절어있어요. 아니, 왜 우리가 내 돈 내고 와인 사마시면서 그 와인 주인 조카이름까지 알아야 돼? 왜 와인을 내 돈 내고 마시면서 내가 와인을 지배해야지, 왜 경배하면서 마십니까? 와인마시면서 맛있으면 되는 거지, 이 와인에서 무슨 냄새가 나고, 왜 분석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때 와인 주권을 되찾아야지, 우리나라의 워낙 와인에 대한 문화가 없는 독특한 나라예요. 왜냐하면 일제에게 식민 지배를 당했기 때문에 와인 문화가 서구 문명이니까 그게 안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2000년대 들어와서 우리나라가 좀 살기 시작하니까 그때 와인문화가 갑자기 쏟아져 들어왔고, 와인의 지식이 너무 없다보니까 그런 만화에 의존했어요. 그런데 그 만화가 서구에 대한 열등감에 완전히 절어있었기 때문에 이거 그냥 뒀다가는 완전히 우리나라 또 서구의 문화적인 식민지가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와인을 좀 주인의식을 갖고 마시자 그런 의도에서 만든 게 와인의 세계죠.
◇이성규> 저도 이거 읽어봤어요. 근데 상당히 감동을 받았는데, 이원복 와인 셀렉션을 출시를 하셔서 그때 수익금이..
◆이원복> 수익금이 전혀 없었고, 어떤 와인 회사가 한국에 런칭 하는데 칠레 와인이었어요. 그 당시에 허영만씨 와인이라든지 몇 몇 분이 그렇게 했거든요. 그래서 한 번 해보냐 했는데 별로 안 나갔어요.
◇이성규> 그렇게 하셔서 여기저기 기부도 하시고 그러셨죠.
◆이원복> 그거 하고는 관계없고 기부는 난 차원에서 한 거고.
◇이성규> 교수님이시고 교육계에서 종사하셔서 그런지 장학금을 주시는...
◆이원복> 옛날에 정년퇴직을 하면서 2012년에 정년퇴직을 했는데 그때 아이티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잖아요. 내가 장학금을 대가지고 가난한 아이티의 유학생을 우리나라에 데려와서 선진 대한민국 문명을 좀 배우게 했으면 좋겠다 해서 아이티 정부에게 장학금을 주겠다 제안을 했어요. 한 2명 정도. 근데 제가 그걸 포기를 했어요. 포기를 왜 했냐니까 장학금을 주는 그 학생을 선발하는데 그 정부 관리가 뒷돈을 달래요. 내가 왜 뒷돈까지 주면서 장학생을 데려옵니까? 그래서 그걸 접고 딴 데 기부했죠.
◇이성규> 근데 이제 만화를 시작하신지 60년이신데.. 참 환갑이 되셨는데 만화라는 건 인간 이원복과 어떤 관련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이원복> 쉽게 얘기하자면 저의 전부고, 우선, 왜냐하면 지금까지 먹고 살아온 것도 만화덕분이고, 내가 또 이런 잡을 가지고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게 된 것도 만화고, 근데 저한테 만화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평생 즐겁게 지내온 놀이터였어요. 내가 즐거우니까 하는 거니까 놀이는, 만화를 즐겁게 그리니까 그건 놀이터죠.
◇이성규> 근데 여러 가지 작품을 쭉 만들어 오시고 그랬는데 나는 만화가다, 나는 작가다, 이런 생각을 하실 텐데. 앞으로 지금도 보니까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실 텐데. 나의 인생이 어떻게 세상에 기억되기를 바라십니까?
◆이원복> 글쎄요. 세상에 까지는 저는 그렇게 큰 욕심은 안 냅니다. 단지 제가 지금까지 그려오는 만화의 원칙은 내 아들 하나밖에 없어요. 자식이 아들 하나인데. 내 아들한테 부끄럽지 않는 만화를 그린다예요. 나중에 아들이 와가지고 아빠 이거 뭐야? 그런 소리 들으면 안 되잖아요.
◇이성규> 가장 가슴에 와닿은 얘기네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먼나라 이웃나라와 와인의 세계를 집필하신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였습니다. 교수님,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원복> 네. 감사합니다.
◇이성규> 이 프로그램은 YTN라디오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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