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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터view] 광주를 향한 '의기' : 비극에 대한 부채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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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터view] 광주를 향한 '의기' : 비극에 대한 부채의식

2020년 05월 30일 08시 28분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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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광주 바깥에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려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강대를 다니던 김의기 열사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요.

가족과 지인들은 한결같이 그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모교에선 매년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리고 작년엔 기념사업회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광주와는 아무 연이 없음에도 목숨 걸어 광주를 알리려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김의기 열사 40주기 기일인 오늘,

사람·공간·시선을 전하는 YTN 인터뷰에서 80년 5월 광주와 김의기를 기억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20년 전 모두가 새로운 밀레니엄을 향한 기대와 희망으로 들떠 있을 때, 지나간 시간에 멈춘 곳이 있었다.

당시 대구에서 대학을 다니던 난 중간고사 기간에 시험도 포기한 채, 동아리 사람들과 무박 2일로 그곳을 찾았다.

[김종호 / 서강대 교수 (40) :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0년 5월 17일. 20주년을 맞은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들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전남대에서 광주역, 그리고 광주교도소 등을 거쳐 마지막 항쟁지인 전남도청까지. 무고한 아픔이 서려 있는 광주 시내 곳곳을 밤새 걷고 또 걸었습니다.]

대학에 갓 입학한 평범한 학생이던 내게 5·18은 교과서에서나 접한 빛바랜 사건이었다.

그 나이가 그렇듯 치기만 앞서던 시절, 나는 이곳의 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궁정동에 울린 총성으로 유신이 끝나고 민주에 대한 열망은 '서울의 봄'으로 나타났다.

계엄령이 내려진 1980년 5월 15일 서울역광장엔 무려 10만 명이 넘는 대학생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하지만,

[문재인 / 대통령 (5·18 40주년 광주MBC 인터뷰) :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매일 서울역에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함으로써, 결국은 군이 투입되는 그런 빌미를 만들어주고는 결정적인 시기에는 퇴각을 하는 그런 결정을 내린 것 때문에 광주 시민들이 정말 외롭게 계엄군과 맞서게 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사실에 당시 (광주 밖에 있던) 민주화운동 세력들 모두가 이 광주에 대한 어떤 부채의식, 그것을 늘 가지고 있었고.]

5월 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광주를 본보기 삼았다.

휴교령에 거세게 저항하는 전남대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이다.

이를 본 광주 시민들이 함께 맞서며 열흘간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관련 피해자 사망 165명 (18일-27일) 실종 84명 부상 및 구속 5,568명 - 5·18기념재단, 광주시청 (2018.12.현재)

밤새 걷고 걸어 닿은 여정의 종착지.

그해 기념식엔 처음으로 대통령도 참석했다.

20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건만, 유족들에게 5·18은 과거 이야기가 아니었다.

발포 명령을 비롯해 참혹했던 진상을 규명하는 일과 책임자 처벌 문제, 이를 폄훼하는 시선들은 4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추념에 그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가눌 길 없던 그들의 슬픔을 어루만질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해 먼발치서 조용히 지켜만 보는데, 백발의 어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故 권채봉 / 김의기 어머니 (2005년 작고) :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해. 어떻게 말로 다 해. 20년 동안을 이 가슴앓이를 하는데. 20년이라는 세월을 이렇게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데.]

묘비명 김의기.

그 이름의 무게를 알기엔 내가 너무 어렸다.

김의기는 광주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죽은 곳도 금남로가 아닌 서울 종로다.

[김주숙 / 김의기 누나 : (의기는) 경북 영주에서 낳고요. 어려서 영특해서 6살에 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서강대학교 무역학과에 진학을 했고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굉장히 마음이 따뜻한 애였어요. 정말 많이 아끼고 사랑해서 제 행복의 반이라도 주고 싶은 그런 동생이었어요.]

그는 대학서 농민들의 가슴 아픈 현실에 눈을 뜨고, 흔한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벗어나 농촌문제에 매진한다.

80년 5월 19일,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로 향한 김의기는, 고립되어 외부에 알려지지 않던 그들의 참상을 목도했다.

가없는 충격에 분노가 용솟음쳤고, 시민들과 함께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윤기현 / 당시 시민군 (5월 19일 광주에서 김의기 만남) : 이건 그렇게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분명히 저놈들이(계엄군) 자기들이 다 만들어 놓고 사람 죽여 놓고 광주 사람들 폭도들이라 그러고 광주 사람들이 이렇게 했다고 그럴 거 아니냐. 눈으로 다 봤는데. 이걸 밖으로 알려야 한다. (의기) 넌 나가라, 나가서 이 상황을 알려야 한다.]

6일간 광주에 머물며 그곳의 참상을 기록한 그는 서울로 올라와 이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5월 30일 오후 5시경, 종로에 있는 기독교회관 6층 사무실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작성하고 인쇄하던 중 군홧발 소리와 함께 계엄군이 들이닥치자, 만들어 놓은 유인물을 황급히 창밖으로 뿌렸다.

잠시 후, 갑자기 그가 6층 아래 장갑차 사이로 떨어졌다.

군인들은 그를 버려둔 채, 유인물을 수거하기 바빴다.

80년 광주를 목격한 스물두 살 청년은 서울로 돌아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득 의기란 말의 다른 의미가 떠올랐다.

'어떤 일을 하겠다는 적극적인 마음'

2004년 5월 17일, 나는 후배들과 다시 광주를 찾았다.

같은 여정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그 시절 나의 의기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김의기가 품었던 그것은 무얼 위한 것이었을까?

80년 5월에서 7년이 흐르고 다시 30년이 지났어도,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진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하종강 / 김의기 동료 (성공회대 교수) : 김의기 씨 장례를 치른 선배를 한참 뒤에 만났더니 그 선배가 하는 말이 수배됐다는 핑계로 똑똑한 놈들은 다 겁나서 숨어버리고 멍청한 바보 같은 놈들만 남아서 의기 장례 치렀다. 얼마나 다 숨어 버렸는지 의기 관을 운구할 놈이 없는 거야. 너 인마 나쁜 놈이야. 이렇게 말하는데 제가 할 말이 없더라고요. 제가 나중에 죽어서라도 김의기 씨를 만나면 네가 죽었을 때 난 참 비겁하게 숨어 있었지만, 네가 죽었다는 말 듣고 난 다음부턴 열심히 살았다 나도. 이렇게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김주숙 / 김의기 누나 : 누나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하는 그런 물음을 저 자신한테 자꾸 묻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어서 다시 열심히 살려고 살았는데, 나중에 동생 만나면 고맙다고, 자랑스럽다고 꼭 얘기해주고 싶고.]

[김종호 / 서강대 교수 : 제가 (20년 전) 광주에 간 것도 결국 이 부채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 짊어져야 했던 절망스러운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인 거죠.]

그래서 난 오늘도 출근길에 그를 마주하며, 그가 던진 질문을 되뇐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故 김의기 열사 1959.4.20.-1980.5.30.)

버트너/ 이상엽[sylee24@ytn.co.kr], 연진영[yjy1769@ytn.co.kr], 홍성욱, 박재상, 김민지

도움/ 김의기기념사업회, 5·18기념재단, 국립5·18민주묘지, 서강대학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가톨릭농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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