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때 끌려가..." 그동안 가려졌던 일제 만행, 직접 듣다

"10살 때 끌려가..." 그동안 가려졌던 일제 만행, 직접 듣다

2019.08.13. 오전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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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일제 강점기, 어른뿐 아니라 조선의 아이들도 강제 노역에 끌려가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당했습니다.

YTN이 광복 74주년을 맞아 그동안 가려졌던 아동 강제동원 실태를 집중 조명하는 시간을 마련했는데요.

첫 순서로 피해자들의 증언을 한동오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기자]

"부모 형제 이별하고 타향에 나와. 이삼 사월 진진해에 백골 못 보고. 오뉴월 더운 날에 바람 못 쐬고."

11살에 가족을 그리며 부르던 노래.

일본군 방직공장으로 끌려간 최점덕 할머니는 그때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일제는 나이와 성별 관계없이 한 가족에 한 명씩 무조건 차출해 갔습니다.

[최점덕 / 11살에 강제동원 : (초등학교) 다니다 가서 다니지도 못했지. 우리 아버지를 징용에 끌고 간다고 해서. 우리 아버지가 가버리면 우리 식구들 다 굶어 죽는다고 내가 갔다고 막, 내가 몰래 갔어.]

10살 때 고무줄놀이하다가 납치되듯 강제동원된 한순임 할머니.

군수 공장에선 고된 노역과 함께 끔찍한 몽둥이질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순임 / 10살에 강제동원 : 그렇게 두드려 패. 멍이 안 가셔. 엎어놓고 앉혀놓고 두드린다고. 그 멍이 낫기 전에 두드려. 낫기 전에 또 두드려. 두들겨 맞아서 천지가 푸릉댕이, 시푸릉댕이.]

이옥순 할머니도 10살에 군복 만드는 공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강냉이 열 알이 한 끼 식사의 전부, 일본인들이 먹다 버린 참외 껍질을 훔쳐 배를 채웠습니다.

[이옥순 / 10살에 강제동원 : 배가 고파서 잠을 못 자는 거예요. 일본 식당 앞에 가면 구정물 통이 있어요. 참외 껍질도 있고, 무 껍질도 있고…. 일본 식당에서 나온 거 건져서 수돗물에 씻어서….]

황부영 할머니는 8살에 고향인 전북에서 천 킬로미터 떨어진 만주로 동원됐습니다.

물도 없어서 가축 분뇨를 마셨습니다.

[황부영 / 8살에 강제동원 : 물도 없지, 빨래할 데도 없지. 만주 가서 밤새도록 물(얼음 녹여서) 퍼다 먹고. 소 똥물 퍼다 먹어. (소 똥물을 퍼다 먹으셨다고요?) 응, 어떻게 해. 먹을 물이 없는데….]

일제의 강제동원이 본격화된 건 1938년.

그때 아이였던 피해자 대부분은 생을 마감했고, 남은 이들의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김성님 / 9살에 강제동원 : (만주 몇 살 때 가? 만주! 만주 몇 살 때 갔냐고?) 몰라. 기억이 없어져 버려서 몰라. 기억이 없어져 버려서….]

하지만 어린이마저 침략 야욕에 동원한 잔혹성은 일본이 사과해야 할 수많은 역사적 진실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YTN 한동오[hdo86@ytn.co.kr]입니다.

[앵커]
식민지 조선의 어린이들이 군수 공장뿐 아니라 심지어 전쟁터에까지 동원된 사실은 일본이 만든 사료에도 나타납니다.

일본은 강제 동원이 불법 행위는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당시에도 어린이를 동원하는 건 불법이었습니다.

이정미 기자입니다.

[기자]

▲ 전시에는 어린이 동원 합법?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국제노동기구는 만 14세 미만 어린이를 고용하지 말라는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ILO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일본은 정작 이 조항을 비준하지 않았습니다.

1941년, 일본은 뒤늦게 노무 조정령을 제정해 강제 동원 대상을 만 14세 이상으로 한정했습니다.

2차 대전 말미인 1945년 수세에 몰려 다급해지자 최저 연령을 만 12세로 낮췄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허울뿐인 법에 불과했고, 식민지 조선엔 적용되지도 않았습니다.

[정혜경 / 일제 강제동원&평화연구회 박사 : 서류상으로는 어린 사람이라는 게 확인이 되지만 그걸 빼게 되면 지역할당 인원수를 맞추지 못하게 되잖아요. 인원수를 맞추기 위해서는 숫자를 묵인하게 되는 거죠.]

▲ 어린이 동원, 군대는 예외?

어린이는 전쟁터에도 동원됐습니다.

당시 해군 군속 명부를 보면 만 14세 미만은 백 명 넘게 등장합니다.

전투에 투입된 지 1년도 안 돼 말라리아로 숨진 아이부터, 배 침몰로 전사한 아이까지 있습니다.

▲ 일본인·조선인 임금 차별 없었다?

동원된 조선인들의 경우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임금도 일본인과 차별 없이 동등하게 줬다고 일본 정부와 국내 일부 연구진은 주장합니다.

[이우연 / 낙성대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유튜브 '신의한수' 7월) :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오히려 일본 정부가 강제로 차별을 금지하는 통에 오히려 차별이 적었던 상황이죠.]

하지만 YTN이 입수한 일본 해군 제5연료창 임금 규정을 보면 조선인은 16분의 10, 62.5%만 주라고 돼 있습니다.

[심재욱 / 재일제주인센터 학술연구교수 : 군 관련 기관에서조차 이런 차별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일반 기업에서 근무했던 노무자들에게도 이런 민족적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추론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아이를 포함한 조선인을 전쟁에 어떻게 이용했는지, 일본 스스로 만든 기록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YTN 이정미[smiling37@ytn.co.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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