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유공자 후손의 삶은?...가난의 대물림

독립 유공자 후손의 삶은?...가난의 대물림

2019.08.12. 오전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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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독립유공자들.

해방 이후 이분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후손들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현실을 해결하지 못한 것도 우리의 민낯입니다.

가난의 굴레에서 고통받는 독립 유공자 후손들의 열악한 삶, 광복절을 앞두고 김대겸 기자가 만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기자]
한적한 시골 마을의 허름한 주택.

독립유공자와 참전유공자 명패가 대문 옆에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여기저기 쳐진 거미줄.

좁디좁은 방에 낡은 세간살이.

독립 유공자의 후손, 89살 정화영 씨의 집입니다.

[정화영 / 故 정성모 독립유공자 후손 : 우리나라를 되찾아야겠다. 만세 부르자. 이렇게 이런 마음으로 개인별로 의사에 따라 나간 거지…]

할아버지인 정성모 애국지사는 1919년 만세 운동에 나섰다 일제의 혹독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후 가정 형편은 급격히 어려워졌고, 가난은 3대에 걸쳐 대물림됐습니다.

방법도 모르고, 찾아온 공무원도 없어 지난 2005년에서야 유공자 가족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정화영 / 故 정성모 독립유공자 후손 : 내가 3·1 운동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욕 밖에 안 나온다…왜 뭐 해오라 해서 신청하면 안 된다. 또 신청하라고 해서 가면 안 된다 (하니깐)]

75살 김종화 씨의 외할아버지는 만세 운동으로 옥살이를 했던 윤순태 애국지사입니다.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고, 외손주인 김 씨도 혹독한 가난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나마 지난 4월, 독립 유공자 후손들을 위한 집짓기에 나선 비영리단체 덕분에 몸 편히 누울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김종화 / 故 윤순태 독립유공자 후손 : 잘 못 사는 거를 알아서 어려운 사람 신청하라고 해서 70이 넘어서 아무 일도 못 하고 하니깐 신청을 해서 혜택을 (받게 된 거죠.)]

독립 유공자와 그 후손에 대한 지원이 시작된 건 해방 뒤 17년이 지난 1962년.

이후 30년이 지나도록 국가가 인정한 독립 유공자는 770명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후손들은 국가에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에서야 정부의 뒤늦은 노력이 시작됐지만, 이미 3대가 지난 시점으로 가난의 대물림을 끊을 수는 없었습니다.

[김주용 /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 인문사회연구소 교수 : 정식 정부가 1948년에 성립되고 나서 그 뒤 한참 있다가 독립 유공자를 추서하게 됐고, 그러면서 많은 유공자 후손들은 생활고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시스템의 모순이 있었던 거죠.]

독재·군사 정권의 무관심이 끝나고 민주화 정부의 지원이 시작되면서 현재까지 국가가 독립 유공자로 인정한 이들은 모두 1만 5천여 명.

후손들은 유공 등급에 따라 매달 45만 원에서 290만 원까지 받을 수 있는데, 이마저도 가족 중 단 한 명만 받을 수 있습니다.

독립 유공자 가족이라는 명예를 가슴에 품은 채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후손들.

광복 74주년을 맞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YTN 김대겸[kimdk1028@ytn.co.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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