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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김호성의 출발 새아침]
□ 방송일시 : 2019년 4월 4일 (목요일)
□ 출연자 : 전우용 역사학자
◇ 김호성 앵커(이하 김호성): 출근길에 라디오로 만나는 가볍지만 깊이 있는 오디오 칼럼시간입니다. 목요일마다 역사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분석해 주는 분이시죠.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 나오셨습니다.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 전우용 역사학자(이하 전우용): 안녕하세요.
◇ 김호성: 오늘의 오디오 칼럼 제목은 무엇이죠?
◆ 전우용: ‘다이아몬드 수저, 재벌의 탄생’입니다.
◇ 김호성: 재벌의 탄생. 재벌의 탄생 그러면 무슨 제목들 같아요. 비극의 탄생 하듯이. 한국 재벌, 그동안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특히 외신에서 많이 소개되고 이러지 않았습니까?
◆ 전우용: 옥스퍼드나 웹스터나 유명한 외국 영어사전에도 ‘재벌chaebol’이라는 발음 그대로 표제어가 실려 있죠. 다른 나라에 없는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그런 기업 또는 기업집단이라고 보통 이야기하는데 기업집단이라기보다는 그냥 가족들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죠.
◇ 김호성: 그래서 재벌의 탄생 하셨는데 이게 초창기 어떤 배경에서 어떻게 형성이 됐나, 사실 좀 궁금합니다.
◆ 전우용: 말 자체는 1910년대 일본에서 탄생했어요. 그 무렵에, ‘벌’이라는 글자는 재벌 학벌 문벌 군벌 이런 말 많이 쓰잖아요, 일상적으로. 원래 벌이라고 하는 글자는 침략전쟁을 통해서 전리품을 많이 얻어서 자기 집안에다가 쌓아놓은 집 가문 이런 뜻이었어요.
◇ 김호성: 정벌할 때 벌하고 같은 건가요, 다른 건가요?
◆ 전우용: 달라요. 정벌할 때 벌(伐) 자를 대문할 때 문(門) 자 안에다가 집어넣은 글자죠.閥) 정벌해서 얻은 전리품을 문 안에 쌓아놓은 그런 세도가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조선시대는 벌열, 문벌. 우리가 문벌귀족 하잖아요. 그 벌 자였거든요. 그런데 신해혁명 이후에 중국 내에서 특히 중국 동북 지역에서 위안스카이 휘하의 이른바 군 지휘관들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독립된 정치세력을 형성하면서 이 사람들을 군벌이라고 불렀거든요. 그러니까 군벌이라고 하는 것은 독립된 무장력을 기반으로 해서 정치적으로 특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군인 집단 이런 뜻이었어요. 그런데 일본은 그 당시에 메이지유신 이후에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한 기업들이 있었고요. 이 기업들을 몇 개의 가족들이 지배하면서 비정상적인 특권을, 정치적 특권까지 행세하는 그런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이게 군벌에 해당하는 이름으로써, 또 일본 사람들이 벌 자 쓰는 걸 좋아해요. 우리가 학벌이니 이런 개념이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거든요.
◇ 김호성: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집단의식이 강하다는 얘긴가요?
◆ 전우용: 아니요, 아니요. 가족 단위로서, 일종의 패밀리 단위로서 기업들을 지배하고 있고, 몇 개의 가족집단이 대부분의 주요 산업들을 지배하면서 국민 경제 전체를 좌우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책방향에도 굉장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게 이제 재벌의, 일본말로 자이바츠(ざいばつ) 발음으로는, 정의였어요. 그러니까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기업에 대한, 대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가진 몇 개의 가족집단이, 그 가족집단을 재벌이라고 불렀고요. 그 가족집단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특권적 방법으로, 민주적 방법이 아니라 특권적 방법으로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해서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시스템. 이걸 재벌체제라고 했고요. 사실은 이 재벌체제가 그래서 정상적인 경쟁적 자본주의를 통해서 성장한 게 아니고, 기본적으로는 국가권력과의 유착을 통해서 급성장했다고 하는 첫 번째 특징이 있고요. 두 번째로는 그 때문에 실제로 다른 기업들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반경쟁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 두 번째 특징이고요.
◇ 김호성: 일종의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거네요.
◆ 전우용: 그렇죠. 세 번째는 그걸 발판으로 해서 국가의 국내정치나 국제정치, 특히 침략전쟁 이런 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게 세 번째기 때문에 자이바츠는 독일의 신디케이트·카르텔·콘체른과 같은 이른바 기업독점체와 더불어서 일본 특유의 기업독점체로 지목되었고.
◇ 김호성: 이게 대기업 집단하고는 다른 의미인가요?
◆ 전우용: 다른 의미죠. 가족지배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 때문에 이른바 일본의 침략전쟁의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일본의 이른바 전체주의적 침략전쟁을 재벌의 의도에 따라서, 재벌의 이익에 맞는 방향으로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이걸 놔두면, 이 체제를 놔두면 일본의 이른바 군국주의적 침략성을 해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2차대전 이후에 미국 쪽의 아주 강력한 의지에 따라 맥아더 사령부가 집중적으로 해체했던 것도 일본의 바로 이 자이바츠 체제였기 때문에 1970년대까지는 외국어 사전에 자이바츠라는 단어가 올라갔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거의 사라지고 일본 내에 사실 그런 대기업은 있어도 이런 자이바츠라고 하는 재벌이라고 하는 건 없기 때문에 사라지고, 대신 한국의 재벌이 등재돼버렸죠.
◇ 김호성: 그러면 일제강점기를 통과하면서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에도 재벌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건가요?
◆ 전우용: 일제강점기에도 재벌이라는 말은 썼어요. 이건 사실은 그냥 단지 돈 많은 사람이란 뜻은 아니고, 이른바 돈으로 뭉친 가족집단이고 그러면서 정치에 굉장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런 가족집단이다. 이런 의미로 써야 하는데, 그냥 대중적으로는 아주 돈이 많으면, 학벌이 좋다, 재벌이 있다 이렇게 하는 것처럼 재벌이란 말을 썼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조선인 재벌이라고 하는 말은 거의 안 썼고, 굳이 한국인 중에서 치자면 경성방직의 김연수나 화신의 박흥식이나 이런 사람들 정도를 재벌이다라고 부르긴 했는데. 본인들은 일본에 가봤자 중소기업밖에 안 되는 수준이다라고 생각하는 정도였고요.
◇ 김호성: 박사님, 그런데 백남준 선생도 알고 보면 재벌2세쯤 된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입니까?
◆ 전우용: 재벌2세쯤 되는 게 아니라 제일가는 재벌의 2세였죠.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는 한국 기업들이 별로 힘을 못 썼죠.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이 일본의 경제적 지배가 워낙 강했으니까. 그런데 해방 이후에 상황이 달라지는 거죠. 일본이 한반도에 남기고 간 모든 공장, 기업체, 이런 것들이 전부 적산, 일본의 재산으로 해서 미군정에 귀속이 되었고 미군정이 이걸 불하하면서 한국 경제 재건 방침에,
◇ 김호성: 지금 말씀하신 적산이라는 게 손혜원 의원 이슈 됐던 적산가옥도 그 적산 말하는 거죠?
◆ 전우용: 예, 예. 일본인 소유다, 라는 뜻이에요. 적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미군정이 귀속시켰다고 해서 귀속재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말씀하셨듯이 집도 있고요. 부동산도 있고요. 공장도 있고요. 주식 같은 경우도 다 포함되거든요. 유가증권 같은 것도 다 포함이 돼서 일본인의 재산을 전부 미군정이 압수한 다음에 한국인에게 불하를 하죠.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건설했던 기업들을 보면 북한 지역에는 주로 전쟁 수행에 필요한 금속, 비철금속, 중화학공업들을 육성했고요. 남쪽은 인구가 많다 보니까 농업지대고 하니까 소비재 공업들을 육성했어요. 분단이 되다 보니까 주로 남한에 소비재공업들이 남아 있었던 거죠. 대표적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적산기업 후신을 놓고 보시면 이거 생각하시면 돼요. 지금 한국 맥주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것이 조선맥주와 동양맥주죠. 동양맥주의 줄임말이 Oriental Beer거든요. 그래서 OB맥주가 된 건데 많은 분들이 이게 왜 OB맥주인지를 모르고 그냥.
◇ 김호성: Oriental Beer.
◆ 전우용: 예, Oriental Beer였어요. 동양맥주였죠. 그렇게 해서 한국인들에게 불하를 하는데 이 불하 과정에서 좀 문제가 생겼어요. 누구한테 불하를 할 것이냐. 첫 번째는 연고자 우선주의였어요. 일본인과 같이 사업을 했던 사람들이 유리했고요. 연고자가 없을 경우에는 많이 써내는 게 중요했는데, 워낙 많이 한꺼번에 매물들이 쏟아지니까 주로 미군정과 가까운 사람들이 헐값에 불하를 받고, 불하받아서는 공장을 그냥 두는 게 아니라 시설물들 기계나 이런 것들을 고철로 팔아버리고. 그래서 오히려 산업기반이 파괴되는 그런 문제들이 생겼는데.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적산을 불하받아서 그럭저럭 운영한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6·25 전쟁 전후 해서는 끝나고 나서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물자가 주로 삼백이라고 해서 제당, 원료 설탕. 그다음에 원면, 그리고 제분, 밀가루.
◇ 김호성: 제일제당 이런 거 나오잖아요.
◆ 전우용: 그렇죠. 제일제당 대한제분 이런 것들인데, 가장 큰 것이 섬유산업이었죠. 그런데 그 당시 일제강점기부터 대창무역주식회사라고 해서 원래 조선시대 시장상인 집안이었는데요. 일제강점기에는 섬유산업 무역에 종사했고, 이게 해방 이후에 태창으로 바꾸면서 이승만하고 아주. 사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처음부터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특혜를 많이 받아서 태창이 50년대에는 한국 최고의 재벌로 꼽혔고. 창업자는 백윤수라는 분이었고요. 그 손자가 백남준 씨였던 거죠. 그래서 그런 사연도 있습니다.
◇ 김호성: 과거사를 그렇게 설명해주시는 걸 보니까 그냥 정경유착 이런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네요.
◆ 전우용: 그래도 50년대에는 주로 원자물자 배분이라고 하는 형태로 돼 있었는데요. 박정희 정권의 경제 이른바 수출입국 산업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또 외국 원조도 중단되거나 줄어들잖아요. 대신 차관을 도입하는 게 이른바 경제성장의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다. 이렇게 판단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는 수출산업 육성이고 하나는 외자 도입이었어요. 그런데 외자는 정부가 보증을 서서 정부쪽으로 들어오니까 당시 다들 돈이 없고 또 시중금리하고 외자금리하고 은행금리하고 워낙 큰 차이가 났거든요. 시중금리는 연리 20%씩 들어가는데 은행금리는 5% 이 정도밖에 안 되니까 은행 빚만 지면 아무것도 안 해도 금리차익으로 연간 20%씩 올릴 수 있었던 게 그 당시 상황이었거든요. 외자를 지원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권이었죠. 정부가 외자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걸 원하는 기업들한테, 자기 마음에 드는 기업들한테 나눠줄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외자 배분할 때 맨입으로 주진 않으니까 정경유착 또는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광범위한 뇌물, 정치자금 제공 이런 것들이 이뤄졌었고. 첫 번째가 외자 이른바 자본 지원이고요. 두 번째가 수출지 알선, 공장부지 헐갑불하. 그다음에 공장을 짓겠다고 하면 그 주변에 국가 돈으로 도로 내주고 이런 일들 다 해주면서, 그야말로 기업이 잘될 수 있도록 모든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60년대고 이 과정에서 이른바 독점적 지위를 갖는 가족지배의 기업집단들을 형성하게, 성장하게 된 거죠.
◇ 김호성: 알겠습니다. 박사님, 사실 저희가 오늘 이것과 관련한 질문을 지금까지 한 것의 반 정도는 더 준비했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다음 주에 다시 한 번 듣는 시간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오늘 말씀, 재벌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 초반부를 들었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2부를 이어가도록 하죠.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전우용: 감사합니다.
◇ 김호성: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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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일시 : 2019년 4월 4일 (목요일)
□ 출연자 : 전우용 역사학자
◇ 김호성 앵커(이하 김호성): 출근길에 라디오로 만나는 가볍지만 깊이 있는 오디오 칼럼시간입니다. 목요일마다 역사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분석해 주는 분이시죠.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 나오셨습니다.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 전우용 역사학자(이하 전우용): 안녕하세요.
◇ 김호성: 오늘의 오디오 칼럼 제목은 무엇이죠?
◆ 전우용: ‘다이아몬드 수저, 재벌의 탄생’입니다.
◇ 김호성: 재벌의 탄생. 재벌의 탄생 그러면 무슨 제목들 같아요. 비극의 탄생 하듯이. 한국 재벌, 그동안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특히 외신에서 많이 소개되고 이러지 않았습니까?
◆ 전우용: 옥스퍼드나 웹스터나 유명한 외국 영어사전에도 ‘재벌chaebol’이라는 발음 그대로 표제어가 실려 있죠. 다른 나라에 없는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그런 기업 또는 기업집단이라고 보통 이야기하는데 기업집단이라기보다는 그냥 가족들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죠.
◇ 김호성: 그래서 재벌의 탄생 하셨는데 이게 초창기 어떤 배경에서 어떻게 형성이 됐나, 사실 좀 궁금합니다.
◆ 전우용: 말 자체는 1910년대 일본에서 탄생했어요. 그 무렵에, ‘벌’이라는 글자는 재벌 학벌 문벌 군벌 이런 말 많이 쓰잖아요, 일상적으로. 원래 벌이라고 하는 글자는 침략전쟁을 통해서 전리품을 많이 얻어서 자기 집안에다가 쌓아놓은 집 가문 이런 뜻이었어요.
◇ 김호성: 정벌할 때 벌하고 같은 건가요, 다른 건가요?
◆ 전우용: 달라요. 정벌할 때 벌(伐) 자를 대문할 때 문(門) 자 안에다가 집어넣은 글자죠.閥) 정벌해서 얻은 전리품을 문 안에 쌓아놓은 그런 세도가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조선시대는 벌열, 문벌. 우리가 문벌귀족 하잖아요. 그 벌 자였거든요. 그런데 신해혁명 이후에 중국 내에서 특히 중국 동북 지역에서 위안스카이 휘하의 이른바 군 지휘관들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독립된 정치세력을 형성하면서 이 사람들을 군벌이라고 불렀거든요. 그러니까 군벌이라고 하는 것은 독립된 무장력을 기반으로 해서 정치적으로 특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군인 집단 이런 뜻이었어요. 그런데 일본은 그 당시에 메이지유신 이후에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한 기업들이 있었고요. 이 기업들을 몇 개의 가족들이 지배하면서 비정상적인 특권을, 정치적 특권까지 행세하는 그런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이게 군벌에 해당하는 이름으로써, 또 일본 사람들이 벌 자 쓰는 걸 좋아해요. 우리가 학벌이니 이런 개념이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거든요.
◇ 김호성: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집단의식이 강하다는 얘긴가요?
◆ 전우용: 아니요, 아니요. 가족 단위로서, 일종의 패밀리 단위로서 기업들을 지배하고 있고, 몇 개의 가족집단이 대부분의 주요 산업들을 지배하면서 국민 경제 전체를 좌우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책방향에도 굉장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게 이제 재벌의, 일본말로 자이바츠(ざいばつ) 발음으로는, 정의였어요. 그러니까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기업에 대한, 대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가진 몇 개의 가족집단이, 그 가족집단을 재벌이라고 불렀고요. 그 가족집단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특권적 방법으로, 민주적 방법이 아니라 특권적 방법으로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해서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시스템. 이걸 재벌체제라고 했고요. 사실은 이 재벌체제가 그래서 정상적인 경쟁적 자본주의를 통해서 성장한 게 아니고, 기본적으로는 국가권력과의 유착을 통해서 급성장했다고 하는 첫 번째 특징이 있고요. 두 번째로는 그 때문에 실제로 다른 기업들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반경쟁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 두 번째 특징이고요.
◇ 김호성: 일종의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거네요.
◆ 전우용: 그렇죠. 세 번째는 그걸 발판으로 해서 국가의 국내정치나 국제정치, 특히 침략전쟁 이런 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게 세 번째기 때문에 자이바츠는 독일의 신디케이트·카르텔·콘체른과 같은 이른바 기업독점체와 더불어서 일본 특유의 기업독점체로 지목되었고.
◇ 김호성: 이게 대기업 집단하고는 다른 의미인가요?
◆ 전우용: 다른 의미죠. 가족지배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 때문에 이른바 일본의 침략전쟁의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일본의 이른바 전체주의적 침략전쟁을 재벌의 의도에 따라서, 재벌의 이익에 맞는 방향으로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이걸 놔두면, 이 체제를 놔두면 일본의 이른바 군국주의적 침략성을 해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2차대전 이후에 미국 쪽의 아주 강력한 의지에 따라 맥아더 사령부가 집중적으로 해체했던 것도 일본의 바로 이 자이바츠 체제였기 때문에 1970년대까지는 외국어 사전에 자이바츠라는 단어가 올라갔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거의 사라지고 일본 내에 사실 그런 대기업은 있어도 이런 자이바츠라고 하는 재벌이라고 하는 건 없기 때문에 사라지고, 대신 한국의 재벌이 등재돼버렸죠.
◇ 김호성: 그러면 일제강점기를 통과하면서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에도 재벌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건가요?
◆ 전우용: 일제강점기에도 재벌이라는 말은 썼어요. 이건 사실은 그냥 단지 돈 많은 사람이란 뜻은 아니고, 이른바 돈으로 뭉친 가족집단이고 그러면서 정치에 굉장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런 가족집단이다. 이런 의미로 써야 하는데, 그냥 대중적으로는 아주 돈이 많으면, 학벌이 좋다, 재벌이 있다 이렇게 하는 것처럼 재벌이란 말을 썼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조선인 재벌이라고 하는 말은 거의 안 썼고, 굳이 한국인 중에서 치자면 경성방직의 김연수나 화신의 박흥식이나 이런 사람들 정도를 재벌이다라고 부르긴 했는데. 본인들은 일본에 가봤자 중소기업밖에 안 되는 수준이다라고 생각하는 정도였고요.
◇ 김호성: 박사님, 그런데 백남준 선생도 알고 보면 재벌2세쯤 된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입니까?
◆ 전우용: 재벌2세쯤 되는 게 아니라 제일가는 재벌의 2세였죠.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는 한국 기업들이 별로 힘을 못 썼죠.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이 일본의 경제적 지배가 워낙 강했으니까. 그런데 해방 이후에 상황이 달라지는 거죠. 일본이 한반도에 남기고 간 모든 공장, 기업체, 이런 것들이 전부 적산, 일본의 재산으로 해서 미군정에 귀속이 되었고 미군정이 이걸 불하하면서 한국 경제 재건 방침에,
◇ 김호성: 지금 말씀하신 적산이라는 게 손혜원 의원 이슈 됐던 적산가옥도 그 적산 말하는 거죠?
◆ 전우용: 예, 예. 일본인 소유다, 라는 뜻이에요. 적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미군정이 귀속시켰다고 해서 귀속재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말씀하셨듯이 집도 있고요. 부동산도 있고요. 공장도 있고요. 주식 같은 경우도 다 포함되거든요. 유가증권 같은 것도 다 포함이 돼서 일본인의 재산을 전부 미군정이 압수한 다음에 한국인에게 불하를 하죠.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건설했던 기업들을 보면 북한 지역에는 주로 전쟁 수행에 필요한 금속, 비철금속, 중화학공업들을 육성했고요. 남쪽은 인구가 많다 보니까 농업지대고 하니까 소비재 공업들을 육성했어요. 분단이 되다 보니까 주로 남한에 소비재공업들이 남아 있었던 거죠. 대표적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적산기업 후신을 놓고 보시면 이거 생각하시면 돼요. 지금 한국 맥주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것이 조선맥주와 동양맥주죠. 동양맥주의 줄임말이 Oriental Beer거든요. 그래서 OB맥주가 된 건데 많은 분들이 이게 왜 OB맥주인지를 모르고 그냥.
◇ 김호성: Oriental Beer.
◆ 전우용: 예, Oriental Beer였어요. 동양맥주였죠. 그렇게 해서 한국인들에게 불하를 하는데 이 불하 과정에서 좀 문제가 생겼어요. 누구한테 불하를 할 것이냐. 첫 번째는 연고자 우선주의였어요. 일본인과 같이 사업을 했던 사람들이 유리했고요. 연고자가 없을 경우에는 많이 써내는 게 중요했는데, 워낙 많이 한꺼번에 매물들이 쏟아지니까 주로 미군정과 가까운 사람들이 헐값에 불하를 받고, 불하받아서는 공장을 그냥 두는 게 아니라 시설물들 기계나 이런 것들을 고철로 팔아버리고. 그래서 오히려 산업기반이 파괴되는 그런 문제들이 생겼는데.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적산을 불하받아서 그럭저럭 운영한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6·25 전쟁 전후 해서는 끝나고 나서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물자가 주로 삼백이라고 해서 제당, 원료 설탕. 그다음에 원면, 그리고 제분, 밀가루.
◇ 김호성: 제일제당 이런 거 나오잖아요.
◆ 전우용: 그렇죠. 제일제당 대한제분 이런 것들인데, 가장 큰 것이 섬유산업이었죠. 그런데 그 당시 일제강점기부터 대창무역주식회사라고 해서 원래 조선시대 시장상인 집안이었는데요. 일제강점기에는 섬유산업 무역에 종사했고, 이게 해방 이후에 태창으로 바꾸면서 이승만하고 아주. 사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처음부터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특혜를 많이 받아서 태창이 50년대에는 한국 최고의 재벌로 꼽혔고. 창업자는 백윤수라는 분이었고요. 그 손자가 백남준 씨였던 거죠. 그래서 그런 사연도 있습니다.
◇ 김호성: 과거사를 그렇게 설명해주시는 걸 보니까 그냥 정경유착 이런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네요.
◆ 전우용: 그래도 50년대에는 주로 원자물자 배분이라고 하는 형태로 돼 있었는데요. 박정희 정권의 경제 이른바 수출입국 산업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또 외국 원조도 중단되거나 줄어들잖아요. 대신 차관을 도입하는 게 이른바 경제성장의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다. 이렇게 판단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는 수출산업 육성이고 하나는 외자 도입이었어요. 그런데 외자는 정부가 보증을 서서 정부쪽으로 들어오니까 당시 다들 돈이 없고 또 시중금리하고 외자금리하고 은행금리하고 워낙 큰 차이가 났거든요. 시중금리는 연리 20%씩 들어가는데 은행금리는 5% 이 정도밖에 안 되니까 은행 빚만 지면 아무것도 안 해도 금리차익으로 연간 20%씩 올릴 수 있었던 게 그 당시 상황이었거든요. 외자를 지원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권이었죠. 정부가 외자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걸 원하는 기업들한테, 자기 마음에 드는 기업들한테 나눠줄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외자 배분할 때 맨입으로 주진 않으니까 정경유착 또는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광범위한 뇌물, 정치자금 제공 이런 것들이 이뤄졌었고. 첫 번째가 외자 이른바 자본 지원이고요. 두 번째가 수출지 알선, 공장부지 헐갑불하. 그다음에 공장을 짓겠다고 하면 그 주변에 국가 돈으로 도로 내주고 이런 일들 다 해주면서, 그야말로 기업이 잘될 수 있도록 모든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60년대고 이 과정에서 이른바 독점적 지위를 갖는 가족지배의 기업집단들을 형성하게, 성장하게 된 거죠.
◇ 김호성: 알겠습니다. 박사님, 사실 저희가 오늘 이것과 관련한 질문을 지금까지 한 것의 반 정도는 더 준비했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다음 주에 다시 한 번 듣는 시간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오늘 말씀, 재벌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 초반부를 들었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2부를 이어가도록 하죠.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전우용: 감사합니다.
◇ 김호성: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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