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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이광연 앵커
■ 출연 : 이찬호 K-9 자주포 폭발 피해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앵커]
지난 2017년 8월의 일입니다. 강원도 철원에서 K-9 자주포 사격 훈련 중에 폭발사고가 발생해 군인 3명이 사망하고 4명이 크게 다친 사고였습니다. 여전히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계실 것 같은데요. 당시 생존자 중의 한 명이신 이찬호 씨가 사고 후 치료 과정을 담은 에세이를 곧 출간할 예정입니다.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바로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찬호]
안녕하세요.
[앵커]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 오실 때 가족 분들과 함께 오셨는데 누구랑 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찬호]
사실 병원에서 있다가 치료받고 형이 휴가를 내서 여기까지 같이 오게 되었습니다.
[앵커]
오늘 저희 방송 때문에 형님께서 휴가까지 내신 거예요?
[이찬호]
아무래도 제가 혼자 거동이 좀 불편하니까 형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앵커]
그러면 죄송하지만 들어오실 때 보니까 일단 혼자 들어오셔가지고 많이 치료를 통해서 회복되셨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형님 도움이 필요할 정도면 아직은 좀 거동이나 이런 게 자유롭지 않은 건가요?
[이찬호]
일단은 거리가 멀면 또 어떤 돌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고 완전히 다 괜찮아진 게 아니라서 사실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이죠.
[앵커]
사고가 난 시간이 2017년 8월인데 여전히 병원에 계시는 거군요?
[이찬호]
네. 지금도 병원에서 치료를 다 받고 외출증을 끊고 왔습니다.
[앵커]
아무래도 외부 환경을 차단하기 위해서 집에서나 가정에서 통원치료가 안 되고 병원에 입원해 계신 건가요?
[이찬호]
사실 수술도 앞두고 있어서 지속적인 관리가 2년에서 3년 정도 필요하다고 병원에서 그렇게 얘기가 된 상태거든요.
[앵커]
2년에서 3년 정도. 그러면 지금 기준으로 해도 앞으로 더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신데 그러면 앞으로 어떤 치료 과정이 더 남아 있는 건가요?
[이찬호]
사실 제 피부를 보면 아직도 흉터들이 많습니다. 손가락이 펴지지가 않고 지문 자체도 없거든요. 옮으렸다 펴지지도 않을 뿐더러 일단 손의 기능이 가장 큰데 손의 기능을 먼저 살리는 수술을 할 것 같고요. 차차 흉터도 수술이나 시술을 통해서 치료할 것 같습니다.
[앵커]
이번에 받는 수술은 손과 관련된 수술이고. 제가 듣기로는 땀샘이나 이런 피지 이런 조절도 잘 안 돼서 신체적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이찬호]
맞아요. 사실상 피부가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는데 털도 제대로 안 나고 있고요. 땀구멍이라든지 피부가 하는 땀을 배출하면서 체온 조절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전혀 안 되고 있는 상태라서 많은 관리가 필요한 상태죠.
[앵커]
저희 YTN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스탠바이미에도 음성출연하신 것을 제가 봤는데 그때 당시에 진행자도 좀 질문드리기가 조심스러워 하는 게 느껴졌습니다마는 그날의 상황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찬호]
그때 2017년 8월 18일이었는데요. 그 전날에 사실 위문공연을 보고 되게 들떠 있는 기분으로, 또 주말에는 외박을 나갈 상황이어서 빨리 끝내고 싶었는데 총 6발 사격 중에 세 번째 탄에서 폐쇄기가 제대로 닫히지 않은 상황에서 스파크라든지 불꽃, 연기가 들어와서는 안 되는데 들어옴으로써 안에 있던 화약들을 다 연소시키면서 엄청난 큰 폭발을 일으켰거든요. 정말 전쟁터를 방불케 했고요. 불바다였죠.
[앵커]
그 사고 이전에라도 관련해서 K-9 자주포 관련 그때 그 훈련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 같고요.
[이찬호]
저는 그때 사수로서 임무를 하고 있었는데요. 실제 사격은 사실상 되게 많이 해서 긴장 없이 하는 훈련이었는데 그때는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그 안에서.
[앵커]
혹시 사고 이전에라도 관련 훈련 하면서 아, 이것 좀 위험할 수 있겠다, 이런 건 감지한 적이 있으십니까?
[이찬호]
사실 저희 친형이 ROTC 장교 포병 장교 출신이에요. 그래서 저한테 항상 화포 조심해라. 정말 위험한 무기를 다루고 화력을 주무기로 사용을 하기 때문에 정말 위험하다. 그런 말들을 항상 했거든요. 이렇게 사고가 날 줄은 몰랐죠, 그때는.
[앵커]
형 말고 부대 내에서는 그런 얘기를 해 주는 상사라든지 누가 있지는 않았습니까?
[이찬호]
사실 엄청난 사건, 사고들이 되게 많이 일어나는데 이렇게까지 크게 일어나거나 알려진 적이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사건, 사고 같은 것들을 알려주면서 이런 사례들을 방지하고자 그런 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큰 사고가 있지는 않았었죠.
[앵커]
그 사고 이후 부대 내에 있던 후임들도 좀 비슷하게 트라우마를 겪거나 그래서 전역을 서두른 동료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이찬호]
제 후임이었는데요. 저희 부대에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런데 제가 사고가 난 걸 알고서 되게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선임이 그 화포에서 하고 있던 일을 자기가 하려니까 겁이 나서 제가 알기로는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의과사를 한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앵커]
그러면 지금도 혹시 관련해서 들은 게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해 봐야 되겠습니다마는 어떠세요, 군대 내에는 지금 K-9 자주포 훈련을 하고 있겠죠. 관련해서 지금 분위기가 달라졌다거나 그런 얘기를 들으신 적 있으세요, 최근에?
[이찬호]
분위기가 초반에는 상당히 조심스럽고 중단까지 한 상황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시 사격 훈련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또 그러한 사고가 작년 10월인가 11월쯤에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항상 위험하죠.
[앵커]
그러면 지금 단계에서는 군대 내에서 교육이나 이런 쪽에 방점을 찍고 더 훈련이나 이런 쪽에 강화해야 된다고 생각하세요? 뭐가 제일 시급할까요?
[이찬호]
교육이 과연 문제일까요? 정말 짧은 시간이었고요. 그 좁은 곳에서 도망칠 곳도 없었고요. 과연 교육이라든지 불에 안 타는 전투복이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봐야 될 것 같아요. 저는 다른 것에 초점을 잡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앵커]
교육보다는 조금 더 안전과 관련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야 된다 이런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사실 이찬호 씨를 우리가 이찬호 병장으로 여전히 부르고 있더라고요. 이찬호 씨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해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올라오면서 다시 한 번 이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는데 그때 얘기를 다시 해 주세요.
[이찬호]
일단 국민청원을 제가 올린 게 아니고 국민분 중에서 올려주셨는데 사실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정말 저는 너무 힘들었고 제가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많은 국민들이 도움을 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셔서 청원 30만까지 된 것 같고 제가 국가유공자도 되고. 그런데 아쉬운 게 있다면 보훈처에서 제 등급이 상당히 낮게 나와서 유공자 등급을 재신체검사를 통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아무래도 보훈처는 보훈처 병원에서 일반 외과 선생님들이 등급을 매기다 보니까 그래서 이번에 재심사할 때는 화상외과 전문의 세 분한테 신체감정을 받아서 제출한 상황이고요.
[앵커]
말씀을 하신 유공자의 등급이라고 하셨나요. 그 등급별로 어떤 게 달라지는 건가요?
[이찬호]
일단 1등급부터 7등급이 있게 되는데 아무래도 연금 액수가 많이 차이가 나고요. 디테일하게 1등급부터 3등급, 3등급부터 7등급 이런 식으로 혜택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많이 다르게 적용되고 있고.
[앵커]
그래서 지금은 어느 단계까지 받으셨는데...
[이찬호]
사실은 제가 전신 55% 화상이고 지금 화상 신체 받은 게 흉상, 추상이 42%에서 50%까지 최대로 받은 상태인데 제가 3등급의 기준에도 못 미치는 거예요. 3등급이 40% 이상만 돼도 3등급이 되는데 그 기준에도 못 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앵커]
그 기준에 못 미치는 건 앞서 말씀하신 일반의가 진단을 했기 때문이고 이번에는 화상 전문의가 해서 조금 더 재조정을 받을 계획이라고 이해를 하면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사실 내가 아픈 것을 증명해야 된다라는 것도 또 다른 아픔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얘기를 또다시 해보겠습니다. 사고 얘기는 많이 하셔가지고 사실 또 거듭 여쭤보기가 죄송스럽고 실례가 되는데 저희가 듣기로는 원래의 꿈은 배우셨다고 들었거든요. 지금은 좀 꿈이 바뀌셨겠죠?
[이찬호]
사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배우의 꿈을 키워왔었어요. 고등학교도 예술고등학교 들어가고 대학교도 연극영화과를 다니고 있었고요. 지금은 배우라는 꿈을 잠시나마 저 멀리 한편에 담아두고는 있는데요. 배우를 할 수가 없는 게 일단은 흉터가 너무 많습니다. 제 사진이나 보셨다시피 흉터가 너무 많기 때문에 어떤 걸 할 수가 없더라고요.
[앵커]
앞으로 치료 과정을 통해서 좀 개선이 되고 하면 그런 상황을 감안해서 그 꿈을 이루었다고 보시는거군요.
[이찬호]
지금 완치라는 게 없어요, 화상에는. 그래서 기회가 되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앵커]
혹시 가까운 미래에서 가까운 장래에 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이거 좀 해 보고 싶다.
[이찬호]
일단 책을 내고 싶었는데요. 책을 이번 1월 중순쯤에 내게 되는데요. 그거 말고도 지금 생각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되게 많이 있어요.
[앵커]
하나씩 소개 좀 해 주세요.
[이찬호]
일단 제가 여름에 생각 중인 사진전을 기획 중에 있어요. 저 말고도 또 다른 흉터라든지 아픔을 가진 그런 공감적인 부분을 다룰 것 같고요. 봉사활동을 꾸준히 아무래도 이번 년도에는 많이 할 것 같아요.
[앵커]
그러면 지금 현재 건강상태로 또 남을 도와주는 봉사활동까지 가능한 것인가가 우려스러운데 어떠세요?
[이찬호]
많은 분들이 사실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저를 모르시는 분들이 저에게 많은 도움의 손길을 주셨고 많은 분들의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국민청원까지 될 수 있었다라고 생각하고 더 노력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자연스럽게 그냥 행동으로 보여지는 것 같아요.
[앵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것만으로도 대단한 결정이었고 아마 많이 보시는 분들께서 오히려 힘을 얻어 가실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마침 책 이야기 말씀하셨는데 직접 어떤 책인지 듣기로는 사진을 담은 포토 에세이라고 들었거든요. 왜 책을 내게 된 것인지 구체적으로 좀 더 설명을 해 주세요.
[이찬호]
일단 1년, 2년 계속 잊혀져만 가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고요. 화마와 싸우면서도 계속 저는 다른 것과 싸움을 하고 있었어야 했어요. 잊혀지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너무 컸고요. 그래서 책이라는 걸 수단으로써 이제 알리게 되었는데요.
[앵커]
잊혀지면 안 된다는 건 그때 사고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아니면...
[이찬호]
그때 사고도 그렇고 아직 잘 해결되지가 않았어요.
[앵커]
진상규명이라든지 이런 부분들이죠.
[이찬호]
네, 어떠한 부분이 잘 해결이 안 돼 있고 저 혼자 병원에 있고 아무도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아요. 저는 제일 많이 다쳤고 저도 죽다가 살아났지만 목소리를 내야 된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무래도 책이라든지 그런 수단을 통해서 나온 것 같아요.
[앵커]
일단 그런 현재의 상황을 알려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든지 해서 앞으로 진상규명이라든지 책임자처벌까지 요구하는 그런 목소리를 담고 싶은 건가요?
[이찬호]
일단 보시는 분들마다 다른 것 같은데요. 그런 내용도 있고 많은 내용들이 있거든요. 유쾌하면서도 감성적이면서도 또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의 이야기예요. 그런 많은 것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마다 독자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앵커]
이 책을 출간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크라우딩 펀딩이라고 하죠. 그런 방식으로 또 모금도 하셨다고 하는데 그 과정도 스스로에게는 어떤 감동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찬호]
사실은 모금액이 500만 원 정도였는데 지금 끝난 지 조금 됐는데 한 1100만 원 정도 모금이 됐더라고요. 사실 이렇게까지 크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약 2배 정도가 높게 됐는데 저는 정말 기쁘더라고요. 많은 분들한테 도움을 줄 수 있고 많은 분들한테 이런 일들을 알릴 수 있어서 정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드리고 싶어요.
[앵커]
오히려 지금 미소를 띌 수 있을 정도로 남을 걱정하는 여유까지 생기셨다고, 여유라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볼 때는 사고 이전과 사고 이후 이찬호 씨가 바라보는 약자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좀 내가 돌봐야 될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었다면 지금은 좀 어떤 사람들에게 시선이 갑니까?
[이찬호]
그때도 변한 건 크지 않은데 저도 사실 운동을 하게 된 이유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운동을 했었고. 지금은 제가 약자가 됐고 신체적으로도 많이 힘들다 보니까 더 많은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앵커]
어떤 게 보이셨어요?
[이찬호]
저보다 더 힘드신 분들도 계시고 제가 더 노력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이 보여서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앵커]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흉터가 상처의 극복이라고 표현을 하셨더라고요. 저는 이 표현을 왜 쓰셨는지 직접 듣고 싶었는데 좀 설명해 주세요.
[이찬호]
흉터가 사실 저도 많지만 많은 분들한테 흉터가 되게 많을 거예요. 마음의 흉터든 몸의 흉터든 그런 흉터들이 잘 아물기를 바라면서 그런 글들을 제가 SNS에 게시했었던 것 같은데요. 많은 분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었고요.
[앵커]
직접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러 나오셨는데 직접 말씀 못 하신 부분 한 가지가 뭐냐 하면 자서전 포토 에세이 수익금은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쓸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늘 나와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오늘 말씀 잘들었습니다.
[이찬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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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 : 이찬호 K-9 자주포 폭발 피해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앵커]
지난 2017년 8월의 일입니다. 강원도 철원에서 K-9 자주포 사격 훈련 중에 폭발사고가 발생해 군인 3명이 사망하고 4명이 크게 다친 사고였습니다. 여전히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계실 것 같은데요. 당시 생존자 중의 한 명이신 이찬호 씨가 사고 후 치료 과정을 담은 에세이를 곧 출간할 예정입니다.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바로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찬호]
안녕하세요.
[앵커]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 오실 때 가족 분들과 함께 오셨는데 누구랑 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찬호]
사실 병원에서 있다가 치료받고 형이 휴가를 내서 여기까지 같이 오게 되었습니다.
[앵커]
오늘 저희 방송 때문에 형님께서 휴가까지 내신 거예요?
[이찬호]
아무래도 제가 혼자 거동이 좀 불편하니까 형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앵커]
그러면 죄송하지만 들어오실 때 보니까 일단 혼자 들어오셔가지고 많이 치료를 통해서 회복되셨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형님 도움이 필요할 정도면 아직은 좀 거동이나 이런 게 자유롭지 않은 건가요?
[이찬호]
일단은 거리가 멀면 또 어떤 돌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고 완전히 다 괜찮아진 게 아니라서 사실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이죠.
[앵커]
사고가 난 시간이 2017년 8월인데 여전히 병원에 계시는 거군요?
[이찬호]
네. 지금도 병원에서 치료를 다 받고 외출증을 끊고 왔습니다.
[앵커]
아무래도 외부 환경을 차단하기 위해서 집에서나 가정에서 통원치료가 안 되고 병원에 입원해 계신 건가요?
[이찬호]
사실 수술도 앞두고 있어서 지속적인 관리가 2년에서 3년 정도 필요하다고 병원에서 그렇게 얘기가 된 상태거든요.
[앵커]
2년에서 3년 정도. 그러면 지금 기준으로 해도 앞으로 더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신데 그러면 앞으로 어떤 치료 과정이 더 남아 있는 건가요?
[이찬호]
사실 제 피부를 보면 아직도 흉터들이 많습니다. 손가락이 펴지지가 않고 지문 자체도 없거든요. 옮으렸다 펴지지도 않을 뿐더러 일단 손의 기능이 가장 큰데 손의 기능을 먼저 살리는 수술을 할 것 같고요. 차차 흉터도 수술이나 시술을 통해서 치료할 것 같습니다.
[앵커]
이번에 받는 수술은 손과 관련된 수술이고. 제가 듣기로는 땀샘이나 이런 피지 이런 조절도 잘 안 돼서 신체적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이찬호]
맞아요. 사실상 피부가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는데 털도 제대로 안 나고 있고요. 땀구멍이라든지 피부가 하는 땀을 배출하면서 체온 조절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전혀 안 되고 있는 상태라서 많은 관리가 필요한 상태죠.
[앵커]
저희 YTN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스탠바이미에도 음성출연하신 것을 제가 봤는데 그때 당시에 진행자도 좀 질문드리기가 조심스러워 하는 게 느껴졌습니다마는 그날의 상황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찬호]
그때 2017년 8월 18일이었는데요. 그 전날에 사실 위문공연을 보고 되게 들떠 있는 기분으로, 또 주말에는 외박을 나갈 상황이어서 빨리 끝내고 싶었는데 총 6발 사격 중에 세 번째 탄에서 폐쇄기가 제대로 닫히지 않은 상황에서 스파크라든지 불꽃, 연기가 들어와서는 안 되는데 들어옴으로써 안에 있던 화약들을 다 연소시키면서 엄청난 큰 폭발을 일으켰거든요. 정말 전쟁터를 방불케 했고요. 불바다였죠.
[앵커]
그 사고 이전에라도 관련해서 K-9 자주포 관련 그때 그 훈련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 같고요.
[이찬호]
저는 그때 사수로서 임무를 하고 있었는데요. 실제 사격은 사실상 되게 많이 해서 긴장 없이 하는 훈련이었는데 그때는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그 안에서.
[앵커]
혹시 사고 이전에라도 관련 훈련 하면서 아, 이것 좀 위험할 수 있겠다, 이런 건 감지한 적이 있으십니까?
[이찬호]
사실 저희 친형이 ROTC 장교 포병 장교 출신이에요. 그래서 저한테 항상 화포 조심해라. 정말 위험한 무기를 다루고 화력을 주무기로 사용을 하기 때문에 정말 위험하다. 그런 말들을 항상 했거든요. 이렇게 사고가 날 줄은 몰랐죠, 그때는.
[앵커]
형 말고 부대 내에서는 그런 얘기를 해 주는 상사라든지 누가 있지는 않았습니까?
[이찬호]
사실 엄청난 사건, 사고들이 되게 많이 일어나는데 이렇게까지 크게 일어나거나 알려진 적이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사건, 사고 같은 것들을 알려주면서 이런 사례들을 방지하고자 그런 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큰 사고가 있지는 않았었죠.
[앵커]
그 사고 이후 부대 내에 있던 후임들도 좀 비슷하게 트라우마를 겪거나 그래서 전역을 서두른 동료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이찬호]
제 후임이었는데요. 저희 부대에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런데 제가 사고가 난 걸 알고서 되게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선임이 그 화포에서 하고 있던 일을 자기가 하려니까 겁이 나서 제가 알기로는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의과사를 한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앵커]
그러면 지금도 혹시 관련해서 들은 게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해 봐야 되겠습니다마는 어떠세요, 군대 내에는 지금 K-9 자주포 훈련을 하고 있겠죠. 관련해서 지금 분위기가 달라졌다거나 그런 얘기를 들으신 적 있으세요, 최근에?
[이찬호]
분위기가 초반에는 상당히 조심스럽고 중단까지 한 상황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시 사격 훈련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또 그러한 사고가 작년 10월인가 11월쯤에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항상 위험하죠.
[앵커]
그러면 지금 단계에서는 군대 내에서 교육이나 이런 쪽에 방점을 찍고 더 훈련이나 이런 쪽에 강화해야 된다고 생각하세요? 뭐가 제일 시급할까요?
[이찬호]
교육이 과연 문제일까요? 정말 짧은 시간이었고요. 그 좁은 곳에서 도망칠 곳도 없었고요. 과연 교육이라든지 불에 안 타는 전투복이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봐야 될 것 같아요. 저는 다른 것에 초점을 잡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앵커]
교육보다는 조금 더 안전과 관련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야 된다 이런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사실 이찬호 씨를 우리가 이찬호 병장으로 여전히 부르고 있더라고요. 이찬호 씨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해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올라오면서 다시 한 번 이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는데 그때 얘기를 다시 해 주세요.
[이찬호]
일단 국민청원을 제가 올린 게 아니고 국민분 중에서 올려주셨는데 사실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정말 저는 너무 힘들었고 제가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많은 국민들이 도움을 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셔서 청원 30만까지 된 것 같고 제가 국가유공자도 되고. 그런데 아쉬운 게 있다면 보훈처에서 제 등급이 상당히 낮게 나와서 유공자 등급을 재신체검사를 통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아무래도 보훈처는 보훈처 병원에서 일반 외과 선생님들이 등급을 매기다 보니까 그래서 이번에 재심사할 때는 화상외과 전문의 세 분한테 신체감정을 받아서 제출한 상황이고요.
[앵커]
말씀을 하신 유공자의 등급이라고 하셨나요. 그 등급별로 어떤 게 달라지는 건가요?
[이찬호]
일단 1등급부터 7등급이 있게 되는데 아무래도 연금 액수가 많이 차이가 나고요. 디테일하게 1등급부터 3등급, 3등급부터 7등급 이런 식으로 혜택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많이 다르게 적용되고 있고.
[앵커]
그래서 지금은 어느 단계까지 받으셨는데...
[이찬호]
사실은 제가 전신 55% 화상이고 지금 화상 신체 받은 게 흉상, 추상이 42%에서 50%까지 최대로 받은 상태인데 제가 3등급의 기준에도 못 미치는 거예요. 3등급이 40% 이상만 돼도 3등급이 되는데 그 기준에도 못 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앵커]
그 기준에 못 미치는 건 앞서 말씀하신 일반의가 진단을 했기 때문이고 이번에는 화상 전문의가 해서 조금 더 재조정을 받을 계획이라고 이해를 하면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사실 내가 아픈 것을 증명해야 된다라는 것도 또 다른 아픔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얘기를 또다시 해보겠습니다. 사고 얘기는 많이 하셔가지고 사실 또 거듭 여쭤보기가 죄송스럽고 실례가 되는데 저희가 듣기로는 원래의 꿈은 배우셨다고 들었거든요. 지금은 좀 꿈이 바뀌셨겠죠?
[이찬호]
사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배우의 꿈을 키워왔었어요. 고등학교도 예술고등학교 들어가고 대학교도 연극영화과를 다니고 있었고요. 지금은 배우라는 꿈을 잠시나마 저 멀리 한편에 담아두고는 있는데요. 배우를 할 수가 없는 게 일단은 흉터가 너무 많습니다. 제 사진이나 보셨다시피 흉터가 너무 많기 때문에 어떤 걸 할 수가 없더라고요.
[앵커]
앞으로 치료 과정을 통해서 좀 개선이 되고 하면 그런 상황을 감안해서 그 꿈을 이루었다고 보시는거군요.
[이찬호]
지금 완치라는 게 없어요, 화상에는. 그래서 기회가 되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앵커]
혹시 가까운 미래에서 가까운 장래에 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이거 좀 해 보고 싶다.
[이찬호]
일단 책을 내고 싶었는데요. 책을 이번 1월 중순쯤에 내게 되는데요. 그거 말고도 지금 생각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되게 많이 있어요.
[앵커]
하나씩 소개 좀 해 주세요.
[이찬호]
일단 제가 여름에 생각 중인 사진전을 기획 중에 있어요. 저 말고도 또 다른 흉터라든지 아픔을 가진 그런 공감적인 부분을 다룰 것 같고요. 봉사활동을 꾸준히 아무래도 이번 년도에는 많이 할 것 같아요.
[앵커]
그러면 지금 현재 건강상태로 또 남을 도와주는 봉사활동까지 가능한 것인가가 우려스러운데 어떠세요?
[이찬호]
많은 분들이 사실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저를 모르시는 분들이 저에게 많은 도움의 손길을 주셨고 많은 분들의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국민청원까지 될 수 있었다라고 생각하고 더 노력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자연스럽게 그냥 행동으로 보여지는 것 같아요.
[앵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것만으로도 대단한 결정이었고 아마 많이 보시는 분들께서 오히려 힘을 얻어 가실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마침 책 이야기 말씀하셨는데 직접 어떤 책인지 듣기로는 사진을 담은 포토 에세이라고 들었거든요. 왜 책을 내게 된 것인지 구체적으로 좀 더 설명을 해 주세요.
[이찬호]
일단 1년, 2년 계속 잊혀져만 가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고요. 화마와 싸우면서도 계속 저는 다른 것과 싸움을 하고 있었어야 했어요. 잊혀지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너무 컸고요. 그래서 책이라는 걸 수단으로써 이제 알리게 되었는데요.
[앵커]
잊혀지면 안 된다는 건 그때 사고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아니면...
[이찬호]
그때 사고도 그렇고 아직 잘 해결되지가 않았어요.
[앵커]
진상규명이라든지 이런 부분들이죠.
[이찬호]
네, 어떠한 부분이 잘 해결이 안 돼 있고 저 혼자 병원에 있고 아무도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아요. 저는 제일 많이 다쳤고 저도 죽다가 살아났지만 목소리를 내야 된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무래도 책이라든지 그런 수단을 통해서 나온 것 같아요.
[앵커]
일단 그런 현재의 상황을 알려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든지 해서 앞으로 진상규명이라든지 책임자처벌까지 요구하는 그런 목소리를 담고 싶은 건가요?
[이찬호]
일단 보시는 분들마다 다른 것 같은데요. 그런 내용도 있고 많은 내용들이 있거든요. 유쾌하면서도 감성적이면서도 또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의 이야기예요. 그런 많은 것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마다 독자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앵커]
이 책을 출간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크라우딩 펀딩이라고 하죠. 그런 방식으로 또 모금도 하셨다고 하는데 그 과정도 스스로에게는 어떤 감동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찬호]
사실은 모금액이 500만 원 정도였는데 지금 끝난 지 조금 됐는데 한 1100만 원 정도 모금이 됐더라고요. 사실 이렇게까지 크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약 2배 정도가 높게 됐는데 저는 정말 기쁘더라고요. 많은 분들한테 도움을 줄 수 있고 많은 분들한테 이런 일들을 알릴 수 있어서 정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드리고 싶어요.
[앵커]
오히려 지금 미소를 띌 수 있을 정도로 남을 걱정하는 여유까지 생기셨다고, 여유라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볼 때는 사고 이전과 사고 이후 이찬호 씨가 바라보는 약자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좀 내가 돌봐야 될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었다면 지금은 좀 어떤 사람들에게 시선이 갑니까?
[이찬호]
그때도 변한 건 크지 않은데 저도 사실 운동을 하게 된 이유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운동을 했었고. 지금은 제가 약자가 됐고 신체적으로도 많이 힘들다 보니까 더 많은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앵커]
어떤 게 보이셨어요?
[이찬호]
저보다 더 힘드신 분들도 계시고 제가 더 노력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이 보여서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앵커]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흉터가 상처의 극복이라고 표현을 하셨더라고요. 저는 이 표현을 왜 쓰셨는지 직접 듣고 싶었는데 좀 설명해 주세요.
[이찬호]
흉터가 사실 저도 많지만 많은 분들한테 흉터가 되게 많을 거예요. 마음의 흉터든 몸의 흉터든 그런 흉터들이 잘 아물기를 바라면서 그런 글들을 제가 SNS에 게시했었던 것 같은데요. 많은 분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었고요.
[앵커]
직접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러 나오셨는데 직접 말씀 못 하신 부분 한 가지가 뭐냐 하면 자서전 포토 에세이 수익금은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쓸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늘 나와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오늘 말씀 잘들었습니다.
[이찬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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