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되어 돌아온 5인의 '히말라야 원정대'

산이 되어 돌아온 5인의 '히말라야 원정대'

2018.10.17. 오후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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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오동건 / 앵커
■ 출연 : 이성원 /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원정대장

[앵커]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던 미지의 험산에 코리안 웨이를 개척하고자 했던 한국 원정대원 다섯 명의 시신이 오늘 오전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비록 그들의 도전은 모진 대자연의 힘 앞에 막혔지만 산 사나이들의 용기와 정신은 오래오래 기억되길 바랍니다. 뉴스인, 오늘 이 시간에는 2005년 히말라야 낭가파르밧 루팔벽 원정 당시에 고 김창호 대장과 함께 등정을 했던 이성원 원정대장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인터뷰입니다. 지금도 앞에 준비한 영상을 보고 눈시울이 많이 붉어진 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요. 오늘 오전에 일단 다녀오셨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인터뷰]
정말 새삼스럽게 느꼈던 것은 불과 며칠 전에 기쁨으로써 서로가 이야기 나눴던,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쁨과 슬픔 모두 멀지 않은 눈물 근처에 있더라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했습니다.

[앵커]
특히 산악인에게 생과 사, 의미하는 것이 참 클 것 같고요. 또 많은 후배들을 보내셨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실 것 같은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한 명, 한 명 갈 때마다 저희가 마지막 김창호 대장을 보낼 때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얼굴이라도 살았을 때 한 번 보자 하고 9월 1일, 2일간 양이틀 같이 산행을 하면서 얼굴을 봤는데 그때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앵커]
저희가 지금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이 당시의 분위기는 정말 화목했던 것 같고요. 지금 술을 함께 나눴던 건가요, 이 자리에서요? 어떤 자리였습니까?

[인터뷰]
그때 김미곤 대원이 14좌를 완등하기도 했었고 또 김창호 대장이 이번 구르자히말로 떠나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그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지금 현재 대원은 14좌를 준비하고 있는 김홍빈 장애인 대장입니다.

[앵커]
오전에 저희가 소개를 하면서 말씀드렸던 분이고요. 지금 동그라미 표시가 된 김창호 대장, 머리가 좀 짧아졌군요. 머리를 짧게.

[인터뷰]
원형탈모도 조금 일어나고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더라고요, 이번 등반에 대해서요.

[앵커]
이미 등반에 대해서 많이... 그러면 이 자리에서 이번 등반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셨습니까?

[인터뷰]
이야기는 많이 나눴는데요. 어차피 이 산에 대해서는 김창호 대장만큼 아는 사람이 없어요.

[앵커]
전 세계를 통틀어서요?

[인터뷰]
네, 그래서 항상 그게 김창호 대장의 큰 위대함인데. 항상 김창호 대장은 어떤 지역에 우리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에 탐험하고 또 가서 탐구하고. 그래서 그다음 등반해서 등정을 하고 그다음에 세상에 알리는 이런 훌륭한 산악인이었거든요.

[앵커]
그렇군요. 오늘 이 자리에서 충분히 김창호 대장을 추억하고 그분의 위대함을 시청자 여러분들과 충분히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저희들이 보내드리는 방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함께했던 네 분에 대한 이야기도 시간이 있으면 함께 나누고.

그런데 어쨌든 김창호 대장과 인연이 가장 깊으시기 때문에 김창호 대장 이야기를 중심으로 좀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김창호 대장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궁금한데요.

[인터뷰]
2000년 새천년 기념 영호남 합동원정대가 꾸려져서 K2를 등정을 목적으로 파키스탄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거기에서 우리나라 거벽 등반의 대가라고 하면 당대의 젊은이 중에 문종국, 김창호 두 명이 있었는데 거기에 김창호 대원이 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서로 거기에서 만나게 됐죠, 조우하게 됐고. 저는 그때 김창호 대장은 처음이었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이제 선배로서 후배를 만난 그 자리였군요.

[인터뷰]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파키스탄 쪽 히말라야는 거기가 8000m 봉이 5개가 있는데 굉장히 치안 질서가 아직 잡혀있지 않고 현재나 역사적으로나 항상 혼란스러운 지역이었죠. 그래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인도와 지금 현재도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고 지금도 안정되어 있지 않고 언제 강도로 돌변할지 모르는 그런 지역입니다. 거기에서 혼자 탐구하고, 탐험하고 있더라고요.

[앵커]
혼자 탐험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31살의 김창호 대장이었는데요. 그 당시에 혼자 탐험하고 있는 청년을 만났을 때 받으신 인상 같은 게 어땠습니까?

[인터뷰]
그때 그 친구가 저한테 처음 한 말이 이 위험한 데서 너 혼자 그렇게 다녀도 좋냐 그랬더니 자기는 알렉산더 대왕을 존경한대요.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정복하고 33세에 정복하고 34세에 아마 죽었을 건데 자기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그때까지만 하고 죽어도 자기는 상관이 없다. 그때까지 자기가 하고 다니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그래서 그때 우리가 가지 못했던 미답봉, 그런 8000m, 7000m급 등에 대한 위치라든가 난이도, 이런 것들을 다 연구하고 있더라고요.

[앵커]
연구를 계속 하고 있었군요.

[인터뷰]
이 친구 정말 대단하구나. 기회가 된다면 이 친구를 한번 정말 우리나라의 필요한 국보급 산악인으로 꼭 우리가 키우는 데 내 자신이 할 수 있으면 일조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앵커]
그럼 그 14좌를 다 등정한 것은 이후에 2007년, 2008년 정도가 되나요?

[인터뷰]
아니요. 14좌 완정은 13년도입니다.

[앵커]
그 과정이 쭉 있었고요. 그 과정 안에서 2005년도에 이제 히말라야 중에서도 어렵기로 정평이 난 어렵습니다, 발음이.

[인터뷰]
낭가파르밧 루팔벽이라는 곳인데요.

[앵커]
그곳에 대자연으로서 대원으로 참가를 시킨 거죠?

[인터뷰]
제가 그때 2000년에 연을 맺고 나서 2003년에 창호 그다음 너 루팔벽 한번 해 보고 싶은 마음 없느냐. 그래서 그전까지는 6~7000m급의 거봉들, 거벽들만을 위주로 등반했기 때문에 8000m 이상의 자이언트급 그런 산들은 사실 창호가 등반한 경험이 없었어요. 그래서 조금 망설이더라고요. 그러나 루팔벽은 전체가 4200m가 직벽으로 되어 있어요.

[앵커]
시청자 여러분께 이해가 쉽도록, 그러니까 경사가 높다는? 직각으로 되어 있다는.

[인터뷰]
직각 암벽으로 되어 있는 산이기 때문에 지구상에서 가장 큰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입니다. 그래서 거기 산이 그러니까 너한테 맞지 않냐, 가자 그랬더니 네, 알겠습니다 대장님 그래서 2003년도에 제가 처음 김창호 대장한테 거기를 네가 가서 정찰하고 자세히 알아보고 와라, 그렇게 보는 눈은, 국내에서는 제 생각할 때는 당대 최고였으니까 그래서 본인이 2003년도에 가서 정찰을 하고 돌아왔고 그다음에 2004년도에 낭가파르밧 루팔벽만큼 힘든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바로 옆에 로체남벽이라는 벽이 있어요. 거기도 약 3800m 정도가 거의 수직 직벽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를 원정대원으로 참가시키죠. 그때도 마찬가지 경남의 산악 선배님과 호남의 산악 선배님들이 그 원정을 준비를 했었어요. 그런데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고요, 그 원정대 자체가. 그래서 다시 2005년도에 그다음에 저는 루팔벽을 간다고 그전부터 이야기를 했었고 김창호 대장이랑 같이 갔었죠.

[앵커]
그렇군요. 지금 시청자 여러분께 설명을 드리기 위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히말라야는 14봉우리가, 이렇게 표현해야 됩니까?

[인터뷰]
14좌라는 봉은 8000m 이상 되는 봉우리가 14개가 있다는 뜻입니다.

[앵커]
가장 유명한 곳이 에베레스트죠?

[인터뷰]
에베레스트고 그다음에 K2. 칸첸중가, 이렇게 되어 있는데...

[앵커]
그렇게 보면 이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망률로써 난이도를 얘기하시는 것 같은데 지금 다녀오신 낭가파르밧 그곳은 사망률로 볼 때도 한 3위, 가장 어려운 곳 중의 하나라고 알려져 있던데요.

[인터뷰]
과거에는 사망률이 가장 높았었고요. 그다음에 이제 K2 그랬었는데 지금은 그런 사망률이 옛날보다는 비교적 많이 떨어졌죠.

[앵커]
많이 이제 루트가 개발이 되고 그러면서 조금씩 떨어졌군요.

[인터뷰]
알려졌고 또한 대원들의 기량도 많이 향상됐고요.

[앵커]
2005년도 기사를 제가 보니까 낭가파르밧 루팔벽 원정대원이 총 12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정상에 오른 사람 딱 둘뿐이었다고 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인터뷰]
저희가 일반인들이 생각하실 때 그 산을 가면 모든 사람이 다 등정하는 걸로 생각하시거든요. 그런데 실제 그 산의 원정팀이 10명이 되든 20명이 되든 한 사람이 다 등정을 하면 전체가 다 등정한 걸로 저희는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탑을 쌓듯이 밑에서부터 쌓아올라야만이 누군가가 정점에 설 수 있죠.

[앵커]
그렇죠. 반드시 이 사람들이 있어야지만 한 사람이 나올 수 있으니까.

[인터뷰]
그 밑에 있는 누군가를 빼버리면 그 전체는 다 무너지죠. 그래서 마지막 정상에 올라갔던 사람이 그때 김창호 대원과 이현조 대원이 두 명이 올라갔던 거죠.

[앵커]
그 두 명을 선정을 하신 게 바로 원정대장이셨기 때문에 직접 하셨을 텐데 선정한 어떤 기준이 있었습니까?

[인터뷰]
그렇죠. 그 원정에서 마지막 결정은 마지막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산은 더구나 엄청나게 힘들고 그전에 등반했던 사람들 중에서 거의 35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거의 불가능한 산으로 낙인되어 있던 산인데. 그때 김창호 대장이나 이현조 대원을 제가 선정했던 것은 사실 두 대원은 자이언트급 산에 대해서 경험이 사실 많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그 산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우리가 로프, 안전한 루프를 중간중간 깔아서 올라가는데 다음을 내려오기 위한 대비를 하기 위해서. 그다음에 다음에 올라갈 때 편하게 가기 위해서 줄을 깝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줄을 깔 수가 없죠. 그때 줄이 없이 그 길을 올라갈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가진 사람.

[앵커]
실력과 모든 걸 갖춘...

[인터뷰]
그다음에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 본인이 또한 강력하게 가고자 하는 의지, 이런 게 있는 사람을 선정해야 되는데 그때 그 두 명이 가장 적합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그러니까 김창호 대장은 그 당시부터 아주 실력과 산에 대한 어떤 감각, 산에 대한 집념 같은 게 남달랐다는 것이 보여주는 이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안타깝게도 같이 올라갔던 이현조 대원이 바로 2년 뒤에 숨졌죠.

[인터뷰]
그 이후에 잘 아실 거예요. 박영석 대장과 함께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등반하다가.

[앵커]
내려오는 도중에?

[인터뷰]
아니요. 정상을 못 가고 그날 또 눈이 많이 와서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눈이 통째로 무너져버렸어요, 산이. 그래서 사망을 했는데. 그 당시에 또 물론 저희들이 가장 아꼈던 이현조 대원이 거기에서 죽었던 것도 안타깝지만 또 김창호 대장한테는 바로 내일이면 에베레스트 정상을 공격해야 되는 시점이었는데 그 소식을 접하고 바로 내려왔죠.

[앵커]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이현조 대원이 실종된 것을 알고 김창호 대장은 지금 다른 루트로 가던 길을 멈추고 포기하고 수색작업에 함께했었던 것이죠?

[인터뷰]
합류한 거죠.

[앵커]
그렇습니다.

[인터뷰]
그게 김창호입니다.

[앵커]
그렇습니다. 사실 하나를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돈도 들 뿐 아니라 모든 에너지와 몇 년간의 준비가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동료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컸다, 이렇게 볼 수 있을까요? 참 말을 잇기도 힘든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김창호 대장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황금피켈상이라는 걸 받았습니다. 이게 어떤 상인지 의미를 말씀해 주시죠.

[인터뷰]
황금피켈상은 피켈이라는 게 눈을 찍고 올라가는 도구 중에 가장 처음 나왔었고 가장 지금 현재 필요한 필수품이죠. 고산 등반에서. 그것은 말 그대로 황금으로 도금한 피켈을 준 건데 그것은 산악인으로서 최고를 정하는...

[앵커]
그러니까 최고다?

[인터뷰]
인정하는 징표입니다.

[앵커]
이 분야에서 최고다라는 상을 두 번을 받았군요?

[인터뷰]
세계에서 한 번 받고 아시아에서 한 번 받고요.

[앵커]
세계에서 받고 아시아에서 받고.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 산악계에서 가장 강한 어떻게 보면 가장.

[인터뷰]
현재 활동했던 사람 중에...

[앵커]
가장 강력했던 산악인을 산으로 보내주는 중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여쭤보고 싶은 부분은 사고 원인입니다. 지금 최초의 사고가 났을 때 계속 보도됐던 것은 눈사태다, 이런 얘기가 많았는데 실제로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서 현장을 가봤더니 눈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인터뷰]
눈사태도 아니고 그다음에 또 나온 말이 토네이도나 돌풍이다라는 말도 나오는데요. 그 당시 기후나 위치상으로 봤을 때 토네이도는 그쪽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하고요. 강풍에 1km를 날아갔으면 그 정도 시신이 그 상태로 온전할리가 없고 결국 제가 생각했을 때는 지구온난화에 의한 지금 사실 동절기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들지 못하고 습설이, 그러니까 습기를 많이 머금은 눈이, 무거운 눈이 많이 내렸고 그게 물처럼, 죽처럼 그러거든요. 그게 이제 밀려 내려오면서 캠프지를 쓸고 지나갔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됩니다.

[앵커]
베이스캠프라는 곳이 지금 3500m 정도에 세워졌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베이스캠프라는 것이 일반인들, 우리 시청자들이 느낄 때는 그렇게 막 튼튼한 시멘트 건물일 것 같고,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죠.

[인터뷰]
그렇지 않고요. 베이스캠프는 그 산을 등반하기 전에 가장 거주성이 좋고 안전한 지역의 마지막 지점입니다.

[앵커]
모든 코스를 봤을 때...

[인터뷰]
가장 높은 지점에다가 요소를 갖춘 지점에다가 찍는 거죠.

[앵커]
그럼 베이스캠프라는 곳은 텐트를 치는 겁니까?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어떤 공간을 마련해 놓고 거기에서 식사도 할 수 있고 잠도 잘 수 있는 그런 곳이죠?

[인터뷰]
등반에 필요한 모든 보급품이나 그다음에 휴식이나 모든 게 거기에서 다 이뤄지죠.

[앵커]
그렇다면 베이스킴프가 아예 지금 저희는 사고 이후의 장면을 가지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 베이스캠프 자체가 아예 옮겨졌다, 날아갔다, 이렇게 보는 거잖아요.

[인터뷰]
그러니까 죽처럼 생긴 눈이 우리가 마그마가 화산이 폭발하면 마그마가 분출되면서 막 흘러내리지 않습니까, 용암이? 그것과 똑같아요. 그레이샤 눈이. 그래서 그것이 방대한 지역은 훑고 지나가거든요. 그래서 넓은 지역을 쓸고 내려갔지 않느냐. 그렇지 않고는 조금 설명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앵커]
이런 사례, 베이스캠프가 이 정도 위치에 차려져 있었던 베이스캠프 자체가 날아간 사례가 그동안 역사가 있었습니까?

[인터뷰]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간혹 눈사태 후폭풍으로 베이스캠프에 영향을 미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그런 사고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앵커]
단 한 번도 없었던 사고가 일어났던 거군요.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계속해서 도전을 할 텐데요. 히말라야 산부터. 이런 사례를 기반으로 해서 앞으로 조금 더 조심을 해야 되고 말씀하신 그런 지구온난화에 따른 부분까지 감안을 해서 모든 걸 준비해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인터뷰]
아까 말씀하신 대로 결국 김창호 대장은 그런 모든 분야에서 선구자였기 때문에 그런 어떤 새로운 곳, 어떻게 보면 본인의 죽음까지 앗아갔지만 생명까지 앗아갔지만 그 새로움을 또한 경험하게 된 거죠. 이런 베이스캠프에서 이런 사고도 있을 수 있구나. 앞으로는 이런 것까지 대비해야 되겠구나라는 것을 제시해 준 거죠, 그의 죽음으로.

[앵커]
그렇군요. 이제 미래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지금 안타까운 우리의 산악 영웅을 잃은 것은 잃은 것이고요.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어떻게 이것을 대비하고 준비해 나가야 되느냐. 일단 이 부분을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등로주의라는 게 있더라고요. 이게 어떤 것인지 좀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인터뷰]
김창호 대장도 그랬었고요. 저희 또한 김창호 대장하고 같이 등반을 하게 됐던 것들이 추구하는 목적이 같았기 때문에 그랬거든요. 등로주의는 어떤 산을 국내에서도 보면 만약에 서울에 있는 인수봉을 올라간다고 할 때 앞에 뒤에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뒤쪽 길로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고 또 앞에 정면에 있는 벽을, 암벽을 통해서 올라갈 수도 있고 그 길은 여러 가지죠.

그러나 등로주의라는 것은 과연 내가 얼마만큼 저기에서 어려운 길을 내가 선택해서 올라갈 것이냐라는 것을 결정하는 게 등로주의죠. 그래서 거기에서 나오는 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길을 선택해서 올랐던 게 김창호 대장의 지금까지 등반 행위였죠.

[앵커]
새로운 길, 안 가 본 길. 전에 제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인터뷰 내용, 김창호 대장의 인터뷰 내용과 강의 이런 걸 보니까 설렌다고 하더라고요. 가보지 않는 길, 어려운 길을 보면 설렌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보통 요즘 앞으로 산악 추세가 이런 쪽으로 등로주의로 가는 겁니까?

[인터뷰]
지금 일반적인 기류는 거의가 다 등정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과연 얼마만큼 난이도가 높은 길을 올라갈 수 있느냐라는 게 관점인 것 같아요.

[앵커]
그렇다면 문제는 이 등로주의라는 것이 너무 위험한 것 아니냐, 이런 얘기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루트가 없는 길, 어떤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도 그렇지만 예상할 수 없었던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인터뷰]
물론 이번에는 예상할 수 없었지만 이걸 계기로 다음은 또 거기에 대한 준비를 하고 예상할 수 있는 거죠.

[앵커]
다음에 또 할 수 있다? 어떻습니까? 지금 후배들, 산악인들 준비하는 어떤 것들도 다 보고 계실 텐데 김창호 대장이 끼친 영향력 상당할 것 같은데요.

[인터뷰]
엄청나죠. 저희들은 또 걱정될 수 있는 것이 산악계에 많은 위축을 가져올 수도 있고 또 지금 계속 고난이도의 등반을 하고 있는 그 대원들이 등반을 마쳤을 때 뭔가를 추구하기 위해서 계속 할 때에 그 사람들의 정신적인 자세. 그런 부분에서 조금은 바뀌어져야 될 것 같다.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가진 나이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어떻게 보면 가정으로 좀 돌아가야 되고 또 이제는 봉사활동과 후진 양성을 위한 그쪽으로 방향을 선회해야 되지 않느냐.

물론 지금 과거 14좌를 완등했던 엄홍길 대장, 네팔에서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계시고요. 또 부산에 있는 김재수 대장, 후진 양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있거든요. 반드시 해야 될 일이 이제는 그분들이 꼭 산에만 가서 뭔가를 새롭게 개척하는 것보다 후진 양성을 위해서 더욱더 노력해야 될 때이지 않느냐 생각됩니다.

[앵커]
그도 그럴 것이 저희는 너무 많은 영웅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떻게 보면 이름을 세계의 산악에 알렸던 우리 아주 대표적인 산악인들 중에서 이름이 기억나는 분들 중에서 우리가 너무 많이 잃어버린 거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많았죠.

[인터뷰]
아까 이현조 대장하고 같이 잃었던 박영석 대장 같은 경우도 너무 안타까운 죽음이고요.

[앵커]
그렇습니다. 이제 모든 어떤 상황 속에서 미래를 생각하면서 조금씩 변화도 이끌어야 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눠봤고요. 마지막으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후배들 5명 떠나보내면서 개인적으로 말씀을 물론, 그 영결식장에서 하셨을 텐데요. 이 자리를 빌려서 후배들과 또한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우리 후배들에게 한말씀만 해 주시죠.

[인터뷰]
특히 이제 우리 김창호 대장 같은 경우 어떻게 보면 훌륭한 가장으로서 아니면 멋진 남자로서 그 삶보다는 진정한 산악인 김창호가 되고 싶어 했다는 거죠. 그러나 이제는 가족으로 돌아갈 나이들이 된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그 대원들이 이제는 멋있는 산악인도 중요하지만 그런 본인이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를 후배들에게 교육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본인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쪽으로 좀 더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앵커]
네, 알겠습니다. 오늘 저희가 이렇게 제목을 뽑았습니다. 산이 되어 돌아온 다섯 명. 그들은 지금 어쨌든 저희 곁에 있지 않지만 산 그 자체가 되어서 후배들이 배우고 따르고 어떻게 보면 등반해야 될 또 새로운 아주 거대한 영웅이 된 것 같습니다. 오늘 힘든 자리인데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성원 원정대장님과 함께 김창호 대장에 대해서 추억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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