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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요" 신논현역 근처에서 만난 직장인 문 모 씨의 말이다. 문 씨는 무엇이 개선됐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1년 전인 2016년 5월 17일, 무고한 여성이 무참하게 살해당했던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이후로 무엇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강남역 신분당선부터 신논현역까지 약 1km의 거리에 있는 화장실들을 들여다봤다. 지도상 '개방 화장실'로 안내되는 13곳의 화장실과 인근 상가 내 18곳, 총 31곳의 화장실이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
(▲ 사건 현장 모습. 지난 2016년 5월 17일, 23세 여성 A 씨는 조현병을 앓던 김 모 씨(35)에게 살해당했다)
참혹했던 당시의 기억은 말끔히 잊혀진 듯 현장에는 노랫소리와 담배 냄새가 가득했다. 화장실 곳곳에는 '여성 안심 화장실'이라는 큼직한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있었다. CCTV 촬영 중이라는 문구와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문구도 눈에 띄었다.
(▲ CCTV와 비상벨 등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관리 상태는 미흡해 보였다)
'제발 발로 차지 말아 달라'라는 남자 화장실 문에는 주먹 하나가 족히 들어갈 법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여자 화장실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키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라는 안내문이 무색해 보였다.
"깨끗한 환경과 청결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안전하기나 했으면 좋겠어요" 사건 현장 바로 앞에서 만난 두 여성은 힘주어 말했다. 그들은 술집에 가면 여전히 남녀공용 화장실이 많아 불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 개방 화장실 안내 문구가 부착된 건물은 극소수였다)
사건 근처 개방 화장실은 어떨까? 화장실은 찾기부터 쉽지 않았다. 개방 화장실로 지정되면 필수적으로 표지판을 부착해야 하지만, 표지판을 부착한 곳은 13곳 중 4곳에 불과했다. 그중 한 곳의 안내문은 너무 낡아 빛이 바래 안내문을 확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 개방 화장실 중 폐지나 사용 금지 알림을 알리는 안내 문구가 붙은 곳도 눈에 띄었다)
그나마 있는 안내문들도 너무 작거나 눈에 띄지 않았다.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지도를 보며 일일이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찾은 화장실 중에는 개방 화장실 폐지 알림 안내문과 함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곳도 있었다.
(▲ 위급 상황 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비상벨. 부착된 곳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CCTV는 물론이고 비상벨조차 없었다. 비상벨이 설치된 곳은 강남역 내 화장실을 포함해 총 6곳에 불과했다. "비상벨이 뭐에요? 무슨 버튼이 있긴 하던데" 여성 중에는 비상벨의 설치 여부를 모르는 이도 많았다.
교복을 입은 어린 여학생 4명은 "이런 버튼은 처음 본다"라며 "버튼을 누르면 경찰이 진짜 오냐"라고 되물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당황한다면 그나마 있는 비상벨조차도 사용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들은 친구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공중 화장실을 절대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남녀 분리 없이 공용으로 사용되는 화장실이 여전히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 건물의 관리인과 경비원들도 한목소리로 입을 모았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뭐 변한 게 없어요" 같은 건물에서 4년째 경비원으로 근무한다는 최 모 씨는 강남역 사건 이후 겁이 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했다.
"우리가 화장실만 들여다보고 있을 순 없잖아요" 관리인들은 시간에 맞춰 수시로 순찰을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어쩔 수 없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개방 화장실의 경우 해당 구청에서 관리비와 운영비 일부를 지원해주거나, 휴지 등 물품을 지급해주지만, 비상벨 설치는 법적 강제력이 없다.
서울시 시민건강국 생활보건과 관계자는 "개방 화장실로 지정된 이상 공중화장실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시민의 안전을 위해 비상벨을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구의 재정상태와 기관장의 의지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새로 건축하는 건물의 경우 공중화장실 관련 법령에 따라 남녀 화장실 분리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2004년 이전 지어진 건물은 해당하지 않는다. 서울시 관계자는 "전문가와 시민단체가 모여 회의를 거듭하고 있지만, 공간과 비용 등 현실적인 문제가 현실적인 장벽"이라고 말했다.
(▲ 여성 안심 화장실의 경우 비상벨과 함께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다)
현재 서울 시내 공중화장실은 3,872개, 개방 화장실은 1,143개. 서울시 관계자에 따르면 공원 내 공중화장실의 비상벨 설치율은 100%다. 그러나 각 개방 화장실의 경우 비상벨, CCTV 설치 등의 세부 사항은 모두 자치구 전담이기 때문에, 시에서는 전체적인 통계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다.
취재 중 만난 한 여성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살인 사건이 일어나도 바뀌지 않는데, 내가 말한다고 바뀌겠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날 강남역 인근 31곳의 화장실을 취재하며 건물 관계자에게 제지당한 것은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 1년 전 묻지마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의 모습)
누구든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화장실이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많아 보이지 않았다.
YTN PLUS 김성현 기자 (jamkim@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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