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돈 안 되는' 서점을 짓다...교보문고 이야기 [이게머니]

광화문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돈 안 되는' 서점을 짓다...교보문고 이야기 [이게머니]

2025.08.18. 오후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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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돈 안 되는' 서점을 짓다...교보문고 이야기 [이게머니]
1983년 7월 11일 교보문고를 둘러보는 신용호 창립자 / 사진=교보생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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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광복을 위해 힘썼던 한 청년 사업가, 그가 선택한 길은 돈이 아닌 '교육'이었습니다. 배움의 힘으로 조국을 일으켜야 한다고 믿었고, 결국 서울에서 가장 비싼 땅에 모두가 말리던 사업을 시작했죠. 광화문 한복판, 매년 적자를 내면서도 묵묵히 문을 여는 공간. 그 안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신념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 교보문고입니다.
사진=연합뉴스

■ "교보문고, 끝까지 지원하라"...故 신용호 회장의 당부

계절마다 바뀌는 짧은 문장으로 시민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광화문글판'. 한 번쯤 본 적 있으시죠? 저는 그중에서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요.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서 따온 이 문구는 지난 2015년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글귀 1위'로 뽑히기도 했죠. 한 시민은 "8년간 다니던 회사에 가족 몰래 사직서를 내고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광화문을 지나는 버스 안에서 이 글귀를 보고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생각나 많이 울었다"라면서 "다시 일어설 힘이 됐다"라고 전해 큰 울림을 줬습니다.

광화문글판은 1991년부터 교보생명 사옥에 걸리기 시작해 벌써 그 역사가 30년을 훌쩍 넘었습니다. 처음엔 당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해 경제 성장과 관련한 메시지가 대부분이었다고 해요. 그러다 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로 국민들이 큰 고통을 겪자, 교보생명 창립자 故 신용호 회장이 "기업홍보는 생각하지 말고, 시민에게 위안을 주는 글판으로 운영하자"라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따뜻한 철학은 같은 창립자 아래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기업, 교보문고에도 그대로 이어졌죠.
그래픽=강소윤 디자이너

▲초등학생에게도 존댓말을 쓸 것 ▲한곳에 오래 서서 책을 읽더라도 그냥 둘 것 ▲책을 이것저것 빼보기만 하고 사지 않더라도 눈총 주지 말 것 ▲책을 노트에 베끼더라도 그냥 둘 것 ▲책을 훔쳐 가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서 좋은 말로 타이를 것. 도서관에 걸려있을 법한 이것, 교보문고의 다섯 가지 운영 지침인데요. 그래서일까요? 교보문고는 단순한 서점을 넘어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하게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교보문고조차 책을 찾는 발길이 줄어드는 현실을 피할 순 없었습니다. 교보문고는 2022년 139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2013년 이후 9년 만에 적자로 전환했고요, 2023년에는 그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360억 원의 손실을 냈어요. 교보문고 측은 대규모 희망퇴직에 따른 퇴직금 지출, 자동화 물류센터 구축 등 투자로 인한 일시적 손실이라고 설명했지만, 문제는 단순한 손익 계산서 너머에 있습니다. 이제 서점 사업 자체가 구조적으로 수익을 내기 어려운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교보문고가 문 닫을 걱정은 없어 보입니다. 바로 모기업 교보생명이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실제로 교보생명은 2021년에 1,500억 원, 2022년에는 약 39억 원의 자금을 교보문고에 유상증자 형태로 투입했습니다. 사실 이 모든 지원의 배경에는 창립자 신 회장의 철학이 담겨있는데요. 신 회장은 '돈은 보험으로 벌고, 서점을 통해 사회에 환원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교보문고가 적자를 보더라도 끝까지 지원하라"는 유지를 남겼거든요. 이러한 원칙의 시작은, 신용호 회장의 삶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청년 시절 대산 신용호(가운데)의 형제들. 셋째 형 신용원(왼쪽), 넷째 형 신용복(오른쪽) / 사진=교보생명 제공

■ 독립자금 대던 청년, 세계 최초의 교육보험을 설계하다

신용호 회장은 1917년 전남 영암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아버지 신예범은 농민 수탈에 항거하는 소작쟁의를 주도해 7년간 옥고를 치렀다고 해요. 큰형 신용국도 3.1 운동과 농민 항일운동으로 수차례 옥살이를 했고, 셋째 형 신용원은 항일 음악가로 활동하며 일제의 핍박을 받았죠.

가난한 형편에 폐병까지 앓으며 학교에 다니지 못한 신 회장은 '열흘에 책 한 권'이라는 목표로 천 일 동안 독서에 매진하며 학문에 대한 갈증을 채웠습니다. 독학으로 중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중국으로 건너가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그곳에서 집안 어른 신갑범 선생의 소개로 독립운동가 이육사 시인을 만나게 됩니다. 신 회장은 이육사를 평생의 스승으로 여기며 민족 자본가로서의 꿈을 키웠고요, 곡물 유통 사업으로 번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이육사는 "광복군 열 명, 스무 명 몫을 혼자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라며 고마움을 전했다고 하죠.

중국에서 학업을 이어가려던 신 회장은 광복을 계기로 만 30세이던 1946년,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이후 출판사와 제철 회사 등 여러 사업에 도전했지만, 해방 이후의 혼란과 6.25 전쟁 등으로 잇따라 좌절을 겪게 되죠. 그러나 그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국민교육 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이라는 큰 뜻을 품은 신 회장은 한국인 특유의 뜨거운 교육열에 주목했어요. 당시 우리 민족에게는 일제 치하에서 억눌렸던 '배움'에 대한 뿌리 깊은 한이 남아 있었거든요. 신 회장은 "조국 재건의 기초는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라는 신념으로 교육과 보험을 접목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사진=교보생명 제공

그렇게 신 회장은 1958년, 교보생명의 전신인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 상품을 내놨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가 채 안 되던 시절이었어요. 당연히 보험은 사치품 취급을 받았고요, 교육보험이라는 개념 자체도 생소했죠. 신 회장은 흡연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보험에 가입하면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라며 설득했고요. 임직원들에게도 "매사에 따뜻한, 땀내 나는 잔정을 베풀면 상대방이 오래 있게 된다"라며 고객을 직접 만나는 '맨투맨 영업' 방식을 강조했습니다.

신 회장은 현재 보험설계사 제도의 기틀을 만든 주인공이기도 한데요, 전국 주요 도시에 지사를 설치하고, 지사장에게 전권을 주는 방식이었죠. 여기서 성과가 나면 해당 지사의 구성원들에게 '인센티브'가 할당됐다고 해요. 지금 봐도 꽤 현대적인 시스템이죠? 어쨌든 이렇게 사장까지 직접 영업에 뛰어든 열정 덕에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는 공무원과 군 단체 계약에서도 연이어 성과를 내며 창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시대를 바꾸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교육보험 덕에 30년 동안 약 300만 명의 학생이 학업의 꿈을 이어갈 수 있었고요, 이들은 훗날 산업화 시대의 주역이 되었죠. 또 학부모들이 맡긴 보험금은 국민자본이 되어 도로, 항만 등 국가 기간산업을 구축하는 데 쓰였어요. '헐벗은 동포를 돕는 민족자본가가 되겠다'라던 청년의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된 겁니다.
1983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 사진=e영상역사관

■ 서울 종로 1번지 '금싸라기 땅'에 교보문고가 생긴 이유

"오늘, 이 개업식이 초라하다고 서글퍼하지 맙시다. 25년 이내에 우리 회사를 세계적인 회사로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제일 좋은 자리에 사옥을 짓겠습니다."

교보생명 창립 당시 신용호 회장이 임직원들 앞에서 한 약속인데요. 그리고 1980년, 종로 1번지에 대한교육보험 본사 사옥이 들어섰죠.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개업 당시의 약속을 3년이나 앞당긴 겁니다. 자, 이제 으리으리한 회사 사옥도 지었겠다, 지하 1층에 어떤 상점이 들어올까? 기대가 되잖아요. 여기 입지가 얼마나 좋았냐면요, 당시 세종대로 사거리에는 건널목이 없어서 건너편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하도를 지나야 했거든요? 건물이 완공되기도 전에 임대 문의와 청탁이 쇄도했을 정도였죠. 그런데 신 회장은 이곳에 서점을 짓겠다고 선언합니다. 평소 외국의 대형 서점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는 풍경을 보며 "우리나라에도 이런 공간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내부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회사 고위 간부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땅에 상가를 지으면 막대한 수익을 낼 수 있는데, 왜 돈이 안 되는 서점을 하느냐"라며 반대했고, 재무부마저 "적자가 나면 교보생명 전체에 부담이 될 수 있다"라며 허가를 꺼렸습니다. 그러자 신 회장은 "이 값진 땅에 서점을 열어 시민과 청소년이 자유롭게 이용하게 한다면, 그 효과가 얼마나 클지 상상해 보라"라며 임원들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1981년, 매장 678평, 장서 60만 권을 갖춘 국내 최대 규모의 서점 교보문고가 문을 열었는데요. 개장 기념식에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직접 찾아와 신 회장의 손을 붙잡고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대신 해줘서 고맙다"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죠.

현재 교보문고는 회원 수 1,800만 명, 연간 방문객 5,000만 명에 이르는 명실상부한 '국민서점'이 됐고요. 국민의 교육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하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이 자리에 서점이 아닌 상가가 들어섰다면, 지금 서울의 풍경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이 되나요?

■ 교보문고 지킬 수 있을까?…지주사 전환 앞두고 고민

교보문고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교보생명이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인데요. 그렇게 되면 2년 안에 교보문고의 지분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사진=교보생명 제공

배경을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현재 교보생명은 교보문고의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근데 사실 이것도 법적으로는 조금 애매해요. 현행 보험업법상 보험사는 보험사와 관련이 없는 업종을 자회사로 둘 수 없거든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는 괜찮았냐면요, 교보문고가 이 법이 생기기(1998년) 한참 전(1980년)에 설립됐기 때문입니다. 금융당국은 2005년 교보생명이 유상증자를 통해 교보문고의 자본금을 늘릴 때도 출자를 허용해 줬어요. 대신 "가능하면 교보문고를 분리하는 게 좋겠다"라고 권고만 했죠. 교보문고의 공익적 목적이 크고, 법이 개정되기 전에 회사가 설립됐다는 점을 고려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교보생명이 지주사로 전환되면 금융지주회사법의 적용을 받게 되기 때문인데요. 이 법에 따르면 금융지주사는 비금융회사의 주식을 소유하지 못하고, 보유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2년 이내에 처분해야 해요. 다시 말해, 지금처럼 출자 방식으로 교보문고를 직접 지원하는 건 불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럼 "적자가 나더라도 끝까지 지원하라"고 당부했던 창립자의 유지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걸까요? 제가 전문가한테 직접 물어봤더니요, "아직 금융당국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알 수 없지만, 만일 교보문고 지분을 매각하더라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차원에서 파트너십, 투자 등의 방식으로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다"라고 하더라고요. 형태는 달라지더라도, 가치를 이어갈 방법은 충분하다는 거죠.

오늘은 신용호 회장의 오랜 꿈이 담긴 공간, 교보문고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알면 돈이 되는 경제 이야기 '이게머니', 40년 넘는 시간 동안 한자리에서 책과 사람을 이어온 교보문고. 그곳에 쌓여온 시간과 의미만큼은 앞으로도 우리 곁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https://youtu.be/VOlkCyBLnJc?si=Tquc21VcQWsar-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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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digital 서미량 (tjalfid@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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