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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5년 8월 14일 (목)
□ 진행 : 박귀빈 아나운서
□ 출연자 : 최홍일 미국변호사 (유해 봉환 소송 대리인)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 박귀빈 : 내일은 대한민국이 광복된 지 8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 흐르고 있는 이 곡조는 10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불렀던 애국가입니다. "조국은 반드시 독립된다. 내가 죽으면 내 뼈를 고국에 묻어달라." 타국 땅에서 애끓는 심정으로 애국가를 불렀을 애국지사 우운 문양목 지사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미국 캘리포니아에 묻혀 계셨는데요. 광복 80주년을 맞아서 정말 어렵게 고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어제 꿈에 그리던 조국 땅에 묻히셨습니다. 문 지사 유해를 모시고 온 최홍일 미국 변호사 오늘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오신 거죠?
◇ 최홍일 : 안녕하세요. 네 맞습니다.
◆ 박귀빈 : 어제 문양목 지사 유해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미국에서부터 대전 현충원까지 어떤 일정을 거치셨던 거예요?
◇ 최홍일 : 일단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에서 저희가 행사를 마치고 바로 1시에 대한항공 편으로 유해를 모시고 대한항공 측에 도움이 정말 컸어요. 그래서 고국에 12일 5시. 드디어 120년 만에 돌아오시게 되었습니다.
◆ 박귀빈 : 그리고 대전 현충원 자리에도 계셨다가 오늘도 엄청 바쁜 일정을 갖고 계신 걸로 알고 있어요.
◇ 최홍일 : 어떻게 되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 박귀빈 : 그래서 제가 인터뷰 전에 여쭤보니까 잠을 한숨도 못 주무셨다고 합니다. 귀중한 소식을 직접 알려주시기 위해 이렇게 인터뷰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현충원에 우리 문 지사님의 유해가 안장될 때 소회가 어떠셨어요?
◇ 최홍일 : 이런저런 난관들을 겪어내고 이장 되시는 걸 어제 보고 왔는데, 드디어 고국으로 모실 수 있구나라는 안도감하고, 문 지사님이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자기 고향 땅을 돌아가시고 나서야 올 수 있게 되나. 특히 나라를 위해서 헌신했다는 이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고국 땅을 못 밟으셨다는 게 많이 가슴이 아팠어요.
◆ 박귀빈 : 문양목지사가 어떤 분이신지 먼저 직접 소개 부탁드릴게요.
◇ 최홍일 : 문양목 지사님은 원래 동학운동에 참여하셨던 분이세요. 동학운동이 실패했죠. 실패한 후에 체포되셨다가 탈출하셨고, 후에 인천을 통해서 1905년에 하와이로 망명하셨습니다. 즉 이민 한인, 이민 1세신 거예요. 1906년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셨고, 1907년에 미주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보국회를 창립하셨어요. 1908년에는 스티븐스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망언을 하자 다른 민족 지도자 세 분과 함께 항의 방문하셨죠. 정명훈 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저격하자 재판 후원을 맡으셔서 구명 운동을 벌이셨고요. 박용만 선생이 소년병 학교를 설립하자 그를 또 적극 지원하셨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의 창립 멤버이시자 2대 한인회장이시고요. 제가 사는 세크라멘토 한인회의 전신인 스탁톤 한인회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신한민보 주필이셨고 동시에 샌프란시스코 맨티카 등의 한글 학교를 만드셔서 2세 교육에도 힘쓰셨어요. 평생 독립 자금을 모금하셨고 힘들게 사셨습니다.
◆ 박귀빈 : 그래서 1940년 71세를 일기로 순국하실 때까지 정말 먼 타국에서 독립 운동에 헌신하신 분이라고 저도 기사를 통해서 배웠는데요. 근데 미국 내에서 독립운동을 그렇게 평생을 거쳐 헌신하신 분인데 왜 이렇게 안 알려지신 것 같아서 그건 왜 그랬을까요?
◇ 최홍일 : 질문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가 중국에서 활동하신 선생님들하고 미국에서 활동하신 선생님들이 차이가 있어요. 사실 중국에서는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셨다고 그러면 미국에 계시던 선생님들께서는 대체로 일종의 보급 창고 역할을 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자금을 모아서 독립운동에 보탤 수 있는 곳이 사실 미국이었거든요. 전쟁을 피해 간 곳이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아무래도 드러나는 활동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활동, 어려운 과정 중에서도 한 푼 두 푼 모아서 독립 자금을 모으려는 노력들이 사실은 그렇게 뚜렷하게 보이기가 어려워요.
◆ 박귀빈 :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어찌 보면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는 일인데 생각해 보니 변호사님 말씀 들어보니까 정말 알려지기 어려운 일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알려지지 않았던 건데요. 어떻게 변호사님은 우리 문양목 지사에 대해서 처음 접하셨어요?
◇ 최홍일 : 제가 문양목 지사님 처음 접한 거는 사실 2023년에 소송을 시작하면서 처음 접하게 됐어요. 저도 참 부끄러운 일인데 소송 준비하면서 문양목 선생님 평전을 읽고 보훈부에서 준비해 주신 자료 읽고 그러면서 처음으로 문양목 선생님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고요. 제가 항상 잦은 추가 자료 요청한다고 보부의 정영진 서기관하고 안준범 주무관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귀빈 : 사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정의 90% 이상을 이렇게 미국 이민자와 미국 내 독립운동가들이 담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요. 처음에 변호사님이 소송에 임하시면서 절대 쉽지 않겠다 이렇게 생각하셨다면서요. 무료 변론을 결심하시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셨을까요?
◇ 최홍일 : 독립운동가라고 하시니까 그냥 해야지라고 생각했지. 특별하게 생각한 거는 없었어요. 그분도 바라고 나라를 위해서 희생한 거는 아니시잖아요. 근데 저도 당연히 그냥 해야지라고 생각한 거였죠.
◆ 박귀빈 : 근데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 선조인데 왜 소송까지 해야 하나?
◇ 최홍일 : 네 맞습니다. 우리 선조시니까 당연히 모셔올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질문이 정말 충분히 공감이 돼요. 일단 우리가 왜 모셔올 수 없냐를 생각해 본다면 법률적으로 유해에 대한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돼요. 제가 옆집 사람한테 당신 조부님의 산소를 좋은 뜻이 있으니까 당신의 뜻에 상관없이 파 가겠다고 하면 누가 가만히 있겠어요? 즉, 유해도 소유권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남의 물건을 함부로 못 가져가는 건 법의 기본이고, 사회의 근간이죠. 문 지사님같이 손자만 남은 경우는 어떻게 되느냐고 했을 때, 미국 법은 아들, 딸까지만 권리가 있고 손자부터는 너무 머니까 소유권이 묘지로 넘어간다고 한 거예요. 묘지의 소유권을 마음대로 뺏을 수 있게 법이 허용하면 법 해석이 자칫 남의 물건을 뺏는 거로 허용한다로 바뀌어요. 법원이 쉽게 허용을 해 줄 수가 없는 거예요.
◆ 박귀빈 : 법적인 부분에서도 그런 것 때문에 유해 봉환 절차가 어려웠던 것이고 그리고 유족분들 동의를 구하는 게 부분도 굉장히 어려우셨다고 들었거든요.
◇ 최홍일 : 맞습니다. 유족들의 동의는 문양목 기념사업회 이수현 상임이사가 자비로 미국을 오가면서 적극적으로 하셨어요. 거의 10년이 넘는 세월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유족들의 동의를 얻는 데 정말 큰 기여를 하셨죠.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어요. 유가족분들은 사실 이민 3세, 4세세요. 문 씨 성 혹은 외손인 경우에는 박 씨 성을 쓰고 계신데, 3세 4세면 그분들이 한국 문화하고 제도를 잘 아시는 게 아니에요. 그런 분들한테 당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쉽게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야 된다고 얘기하면 마음을 쉽게 열어주기가 힘들어요.
◆ 박귀빈 : 하긴 유족분들 입장에서는 저희도 중요한 순간에 가 뵙고 싶은데 그런 걸 못 하시는 거 아니에요? 고국으로 이렇게 저희가 모셔오면 맞습니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 최홍일 : 그래서 그분들의 동의를 얻는 게 사실은 시간이 걸렸죠.
◆ 박귀빈 : 그러셨군요. 사실 재판 과정도 굉장히 어렵지 않으셨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혹시 소송 통해서 유해 봉환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어떤 게 있었을까요?
◇ 최홍일 : 법원에서 했던 질문 중에 하나가 “문 지사님께서 한국을 돌아가고 싶다는 뜻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왜 80년이 넘는 동안 세월을 방치하고 난 다음에 이제냐.” 라는 질문이 있었어요. 굉장히 아픈 질문이죠. 근데 다행히 문 지사님 댁이 신한민보에도 실렸듯이 당시 너무 가난하셔서 한국을 오가실 비용이 없었어요. 실제로 돈이 있어도 이미 문양목 지사님 같은 경우에는 일제에 의해서 요주의 해외 조선인으로 등록되셨던 분이세요. 그래서 돈이 있으셔도 실제로 가기가 어려웠고, 제가 2004년 법원에 답변을 한 게 2004년에 기념사업회가 결성된 이후로 꾸준히 20년 넘게 매해 기념식하고, 학술회를 이어왔다는 점 그리고 우리나라 여러 언론들이 꾸준히 문양목 선생님을 보도해 온 자료들을 제출해서 설득을 했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고요.
◆ 박귀빈 : 당연히 지사님께서는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으셨을 것 같아요. 심정적으로 충분히 그러셨을 거다 생각은 되는데, 이거는 법적으로 다퉈야 되다 보니까 지사님이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으셨다는 마음을 확신을 해야 우리 변호사님도 변론을 하실 수 있는 거잖아요. 그 부분은 어떻게 확신하셨어요?
◇ 최홍일 : 최재학 선생님이 쓰신 문양목 평전을 읽다가 문양목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드님이신 한소와 합소를 불러놓고 말씀하신 부분이 있더라고요. 조국은 반드시 곧 광복이 되니 그때가 되면 반드시 조국으로 찾아달라는 유언이 있는 거를 제가 찾게 되었어요.
◆ 박귀빈 : 문양목 평전 안에 그게 적혀 있어요?
◇ 최홍일 : 맞습니다. 평전 안에 최재학 선생님께서 아드님들을 인터뷰하면서 찾아내신 증거죠. 법원은 이를 망자의 사후 고국 귀환 의지로 그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였어요.
◆ 박귀빈 : 그렇군요. 이번 재판이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게 미국 정부 유해 봉환 소송에서 승소한 첫 사례라면서요. 진짜 많은 분들의 도움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 최홍일 : 네 맞습니다. 단순하게 저 혼자서 했던 일도 아니고요. 우리 소송 중에는 사실 캘리포니아 북가주 6개의 한인 단체가 모두 동참하셨고요. 그리고 심지어 관련이 없는 네바다 리노 한인에도 동참을 하셔서 서명 운동을 동참해 주셨고 1천 개가 넘는 서명을 받아서
◆ 박귀빈 : 일반인들이 그렇게 해 주신 거예요?
◇ 최홍일 : 동포 한인들께서 그렇게 노력을 해 주셔서 법원에 제출했고, 법원은 이를 중요한 공공에 대한 이익, 저희가 또 주장했던 게 뭐냐 하면 이런 행사들을 통해서, 이런 일들을 통해서 저희 2세 교육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동포 2세 교육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그런 점을 강조했고 법원은 이를 좋게 받아들였습니다.
◆ 박귀빈 : 그렇군요. 승소 판결 이후에 교포 분들도 굉장히 벅찬 어떤 말씀을 하셨을 것 같아요.
◇ 최홍일 : 다들 너무 즐거워해 주셨죠. 또 우리 세크라멘토 한인회 임원아 회장님도 그렇고,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김한율 회장님도 그렇고 너무 벅차고 감격해 하시고, 행사도 정말 열심히 같이 준비해 주시고 길고 힘든 과정이었는데, 정말 다시 한 번 동포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박귀빈 : 사실 처음에 앞서 설명을 하셨지만 법리 다툼을 했어야 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 손조를 모셔오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변호사님이 굉장히 쉽지 않겠다. 이런 마음으로 시작을 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 딱 승소하고 나서 변호사님이 변론한 사건을 승소한 것 그것에 대한 의미도 있겠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특별히 우리 변호사님도 벅찬 감동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 최홍일 : 소송 과정에서 혹시나 제가 패소할까 싶어서 소송 자체가 난이도가 있는 소송이었어요.
◆ 박귀빈 : 쉽지 않은 소송이었겠어요.
◇ 최홍일 : 증거물 제출을 굉장히 강도 높게 요구하는 소송이었기 때문에 사실 폐소 가능성도 굉장히 높게 보고 있었거든요.
◆ 박귀빈 : 아 정말요?
◇ 최홍일 : 그래서 패소하게 되면 제가 사비를 들여서라도 비석이라도 세워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너무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승소를 했을 때 기쁨이라기보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죠. 어제 봉안식 행사할 때 드디어 돌아오셨구나. 힘든 이민 생활을 어떻게 버티다가 오셨나. 그런 마음이 많이 들었고 동시에 이제라도 고향 땅에 오신 모습을 보면서 또 많이 뿌듯했습니다.
◆ 박귀빈 : 정말 변호사님도 정말 고생 많으셨고 제가 더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네요. 그렇게 어려운 변론을 해 주셔서 그리고 승소를 이끌어내셨고, 혹시 안 되면 내가 사비를 들여 비석이라도 세워드려야 되겠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럼 문 지사님 비석이 없었나요?
◇ 최홍일 : 있었어요. 있었는데 정말 작아요. 작아서 잘 안 보이니까 우리가 파크뷰 묘지 신문에 몇 번 났었는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무릎 높이가 안 돼요. 근데 바로 맞은편에 일본인들 가족장이 있는데 정말 사람 키 높이만 한 비석들이 앞에 쫙 포진을 하고 있어요. 보고 있으면 가슴이 많이 아팠어요.
◆ 박귀빈 : 그래서 변호사님이 비석을 내가 세워드려야 되겠다. 혹시 내가 여기서 역할을 다 못하게 되면 이런 마음을 가지셨던 거군요. 어려운 과정 절차를 거쳐서 결국은 미국 정부 유해 봉환 소송에서 승소를 해서 우리 문 지사님을 고국으로 우리 대한민국 땅으로 모셔올 수 있게 됐습니다. 유족분들도 이번에 같이 오셨던가요?
◇ 최홍일 : 맞습니다. 아홉 분 같이 오셨어요.
◆ 박귀빈 : 이장 하시면서 어떤 말씀하시던가요?
◇ 최홍일 : 대표 유족이 손자이 분이 저한테 자꾸 감사하다, 고맙다고 하시면서 공치사를 하시는데 제가 혼자서 한 일이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변호사라는 직업이 법리 다툼을 하는 사람이지 사실관계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실관계는 여러분들이 만들어 주신 거예요. 동포 여러분들이 만들어 주셨고, 서명 운동하면서 최재학 선생님이라든가, 이수현 이사님이라든가 이런 분들이 만들어 주신 거기 때문에 저 혼자 한 일이 아닌데, 자꾸 너무 얼굴에 금칠을 해 주셔 가지고 많이 난감했어요.
◆ 박귀빈 : 아니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신 걸 것 같고요. 문양목 지사의 마지막 유언이 “내 뼈를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 말씀이셨다고 앞서서 제가 처음 시작할 때 말씀을 드렸는데 유언이 이번에 이루어진 거거든요. 유언이 이루어진 순간에 만약에 선생님께서 변호사님 옆에 계신다면 변호사님께 어떤 말씀해 주실 것 같으세요?
◇ 최홍일 : 아마 선생님께서 우리가 정말로 광복된 조국에 살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걸 너무 바라셨으니까요.
◆ 박귀빈 : 그러시군요. 어떤 말씀을 듣고 싶으세요? 그러면 이런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거요.
◇ 최홍일 : 그냥 ‘수고했다.’
◆ 박귀빈 : 정말 우리 변호사님 너무나 수고하셨을 것 같고요. 기사를 보니까 변호사님이 유해를 들고 계신 것도 제가 본 것 같아요.
◇ 최홍일 : 맞아요. 제가 법률 대리다 보니까 유예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법률 대리예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감사하게도 유예를 처음에 받았고, 그거를 보훈부에 넘겨드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 박귀빈 : 지사님의 유예를 잠깐 안고 계셨던 건데 그때 느낌이 어떠셨어요?
◇ 최홍일 : 믿어지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따뜻했어요.
◆ 박귀빈 : 정말요? 지사님께서도 따뜻함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우리 변호사님의 따뜻한 품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 최홍일 : 감사합니다.
◆ 박귀빈 : 정말 제가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이 울렁거려 가지고 자꾸 말을 못 잇게 되는데, 이번에 문양목 지사 유해 봉환 계기로 사실은 우리 후손들이 정말 많은 것들을 우리 지사님의 활동도 그렇고 기억을 하셨으면 좋겠는데, 특별히 우리 변호사님께서도 우리 국민들에게 이런 당부의 말씀 꼭 드리고 싶다 하는 거 있으실 것 같아요.
◇ 최홍일 : 일단 저희가 문양목 선생님의 발자취를 한번 생각해 볼 게 있을 것 같아요. 문양목 선생님께서 가난하다고 하시는 와중에도 우리 이민 2세들에게 한글과 고국을 가르치시려고 한글학교를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맨티카에 열어서 운영을 하셨어요. 정말 가난하셨겠죠. 왜냐하면 평생 독립 자금을 임정에 보내시랴, 가족도 건사하시랴 지금도 미국에는 우리 2세 아이들을 한글학교에서 3.1절 광복절 되면 독립을 가르치려고 아이들이 태극기 만들어서 수수깡에 붙여 갖고 이렇게 흔들고 그래요. 정말 예뻐요. 애들 가르치려고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1년에 고작 1만 5천 불, 2천만 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학교 운영들을 하고 계세요. 너무 어렵거든요. 저희 새크라멘토 한글학교하고, 우리 한국학교가 있는데 선생님들 너무 고생하시고 감사합니다. 멀리 있지만 부디 많은 관심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박귀빈 : 정말 말씀대로 문양목 지사의 발자취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고, 문 지사님 유해 봉환 통해서 첫 승소를 했고, 이번 소송 결과를 계기로 첫 번째니까 지금 타국에 묻혀 계신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계신 거잖아요. 우리가 못 모시고 오는 그분들이 돌아오실 수 있는 길이 하나의 길이 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우리 변호사님 혹시 다음 계획이 또 있으실지 궁금합니다.
◇ 최홍일 : 최근에 보부에서 발표를 해 주셨는데요. 안중근 의사님의 조카이신 안원생 지사님께서 아리조나에 묻혀 계신 거를 발견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유가족 설득 작업을 들어갈 거고요. 그래서 유가족들과 대화를 나눈 후에 현충원에 또 모실 계획을 가지고 있고, 저희 윌로우스 비행학교 또 졸업생이신 오이마 선생님 그분의 첫 공군이세요. 독립군 공군. 그분의 유해 이장도 저희가 계획 중입니다.
◆ 박귀빈 : 그렇군요. 안중근 선생의 친동생인 안정근 님의 장남 맞습니다. 안원생 이분이신데 이분의 유해 봉환에 대해서 또 준비를 하고 계시군요. 변호사님 내일이 8.15 광복절입니다. 어떻게 변호사님은 언제 미국 들어가세요? 29일 날 들어갑니다. 그럼 그동안 한국에 계속 계시는 거네요. 한국에 계시면서 어떤 활동들 일정이 잡혀 있으세요?
◇ 최홍일 : 개인적인 활동들입니다. 나머지는 보훈부에서 하는 활동이 행사가 17일까지 잡혀 있고요. 그리고 나면 유가족들 돌아가실 때 제가 한번 같이 만나서 인사하고 나머지는 오랜만에 못 뵀던 저희 부모님 가족들 뵙고 그리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 박귀빈 : 8.15 광복절 올해는 특별히 변호사님께도 물론 80주년 되는 뜻 깊은 해인 데다가 변호사님께 또 다른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내일 8.15 광복절에 우리 국민들이 우리 청취자분들이 이런 마음으로 하루 보내셨으면 좋겠네요.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 최홍일 : 우리가 독립운동가 선생님들을 기억하고 빛나게 해줘야 우리나라가 또 언제 어려움을 겪을지도 사실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그럴 때 누군가는 자기가 나서서 희생을 할 마음을 가지려고 하면 지금처럼 지사님들을 해외에서 모셔오고 역사에 빛나게 해 드리는 그런 과정들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박귀빈 : 말씀 새기고 저도 열심히 방송하면서 우리 독립운동가 분들 많이 알려주지 않는 분들 저희는 또 방송을 통해서 그분들의 발자취를 많은 분들께 알려야 되겠다. 이런 마음도 저도 하게 됐습니다. 문 지사님 대신에 우리 모든 국민을 대신해서 제가 대신할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듣고 싶었다던 말, 우리 듣고 싶으셨다고 아까 문 지사님께 이런 말씀 옆에서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변호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우운 문양목 지사의 유해 봉안 법률 대리인 최홍일 변호사였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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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일시 : 2025년 8월 14일 (목)
□ 진행 : 박귀빈 아나운서
□ 출연자 : 최홍일 미국변호사 (유해 봉환 소송 대리인)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 박귀빈 : 내일은 대한민국이 광복된 지 8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 흐르고 있는 이 곡조는 10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불렀던 애국가입니다. "조국은 반드시 독립된다. 내가 죽으면 내 뼈를 고국에 묻어달라." 타국 땅에서 애끓는 심정으로 애국가를 불렀을 애국지사 우운 문양목 지사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미국 캘리포니아에 묻혀 계셨는데요. 광복 80주년을 맞아서 정말 어렵게 고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어제 꿈에 그리던 조국 땅에 묻히셨습니다. 문 지사 유해를 모시고 온 최홍일 미국 변호사 오늘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오신 거죠?
◇ 최홍일 : 안녕하세요. 네 맞습니다.
◆ 박귀빈 : 어제 문양목 지사 유해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미국에서부터 대전 현충원까지 어떤 일정을 거치셨던 거예요?
◇ 최홍일 : 일단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에서 저희가 행사를 마치고 바로 1시에 대한항공 편으로 유해를 모시고 대한항공 측에 도움이 정말 컸어요. 그래서 고국에 12일 5시. 드디어 120년 만에 돌아오시게 되었습니다.
◆ 박귀빈 : 그리고 대전 현충원 자리에도 계셨다가 오늘도 엄청 바쁜 일정을 갖고 계신 걸로 알고 있어요.
◇ 최홍일 : 어떻게 되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 박귀빈 : 그래서 제가 인터뷰 전에 여쭤보니까 잠을 한숨도 못 주무셨다고 합니다. 귀중한 소식을 직접 알려주시기 위해 이렇게 인터뷰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현충원에 우리 문 지사님의 유해가 안장될 때 소회가 어떠셨어요?
◇ 최홍일 : 이런저런 난관들을 겪어내고 이장 되시는 걸 어제 보고 왔는데, 드디어 고국으로 모실 수 있구나라는 안도감하고, 문 지사님이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자기 고향 땅을 돌아가시고 나서야 올 수 있게 되나. 특히 나라를 위해서 헌신했다는 이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고국 땅을 못 밟으셨다는 게 많이 가슴이 아팠어요.
◆ 박귀빈 : 문양목지사가 어떤 분이신지 먼저 직접 소개 부탁드릴게요.
◇ 최홍일 : 문양목 지사님은 원래 동학운동에 참여하셨던 분이세요. 동학운동이 실패했죠. 실패한 후에 체포되셨다가 탈출하셨고, 후에 인천을 통해서 1905년에 하와이로 망명하셨습니다. 즉 이민 한인, 이민 1세신 거예요. 1906년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셨고, 1907년에 미주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보국회를 창립하셨어요. 1908년에는 스티븐스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망언을 하자 다른 민족 지도자 세 분과 함께 항의 방문하셨죠. 정명훈 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저격하자 재판 후원을 맡으셔서 구명 운동을 벌이셨고요. 박용만 선생이 소년병 학교를 설립하자 그를 또 적극 지원하셨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의 창립 멤버이시자 2대 한인회장이시고요. 제가 사는 세크라멘토 한인회의 전신인 스탁톤 한인회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신한민보 주필이셨고 동시에 샌프란시스코 맨티카 등의 한글 학교를 만드셔서 2세 교육에도 힘쓰셨어요. 평생 독립 자금을 모금하셨고 힘들게 사셨습니다.
◆ 박귀빈 : 그래서 1940년 71세를 일기로 순국하실 때까지 정말 먼 타국에서 독립 운동에 헌신하신 분이라고 저도 기사를 통해서 배웠는데요. 근데 미국 내에서 독립운동을 그렇게 평생을 거쳐 헌신하신 분인데 왜 이렇게 안 알려지신 것 같아서 그건 왜 그랬을까요?
◇ 최홍일 : 질문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가 중국에서 활동하신 선생님들하고 미국에서 활동하신 선생님들이 차이가 있어요. 사실 중국에서는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셨다고 그러면 미국에 계시던 선생님들께서는 대체로 일종의 보급 창고 역할을 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자금을 모아서 독립운동에 보탤 수 있는 곳이 사실 미국이었거든요. 전쟁을 피해 간 곳이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아무래도 드러나는 활동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활동, 어려운 과정 중에서도 한 푼 두 푼 모아서 독립 자금을 모으려는 노력들이 사실은 그렇게 뚜렷하게 보이기가 어려워요.
◆ 박귀빈 :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어찌 보면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는 일인데 생각해 보니 변호사님 말씀 들어보니까 정말 알려지기 어려운 일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알려지지 않았던 건데요. 어떻게 변호사님은 우리 문양목 지사에 대해서 처음 접하셨어요?
◇ 최홍일 : 제가 문양목 지사님 처음 접한 거는 사실 2023년에 소송을 시작하면서 처음 접하게 됐어요. 저도 참 부끄러운 일인데 소송 준비하면서 문양목 선생님 평전을 읽고 보훈부에서 준비해 주신 자료 읽고 그러면서 처음으로 문양목 선생님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고요. 제가 항상 잦은 추가 자료 요청한다고 보부의 정영진 서기관하고 안준범 주무관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귀빈 : 사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정의 90% 이상을 이렇게 미국 이민자와 미국 내 독립운동가들이 담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요. 처음에 변호사님이 소송에 임하시면서 절대 쉽지 않겠다 이렇게 생각하셨다면서요. 무료 변론을 결심하시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셨을까요?
◇ 최홍일 : 독립운동가라고 하시니까 그냥 해야지라고 생각했지. 특별하게 생각한 거는 없었어요. 그분도 바라고 나라를 위해서 희생한 거는 아니시잖아요. 근데 저도 당연히 그냥 해야지라고 생각한 거였죠.
◆ 박귀빈 : 근데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 선조인데 왜 소송까지 해야 하나?
◇ 최홍일 : 네 맞습니다. 우리 선조시니까 당연히 모셔올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질문이 정말 충분히 공감이 돼요. 일단 우리가 왜 모셔올 수 없냐를 생각해 본다면 법률적으로 유해에 대한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돼요. 제가 옆집 사람한테 당신 조부님의 산소를 좋은 뜻이 있으니까 당신의 뜻에 상관없이 파 가겠다고 하면 누가 가만히 있겠어요? 즉, 유해도 소유권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남의 물건을 함부로 못 가져가는 건 법의 기본이고, 사회의 근간이죠. 문 지사님같이 손자만 남은 경우는 어떻게 되느냐고 했을 때, 미국 법은 아들, 딸까지만 권리가 있고 손자부터는 너무 머니까 소유권이 묘지로 넘어간다고 한 거예요. 묘지의 소유권을 마음대로 뺏을 수 있게 법이 허용하면 법 해석이 자칫 남의 물건을 뺏는 거로 허용한다로 바뀌어요. 법원이 쉽게 허용을 해 줄 수가 없는 거예요.
◆ 박귀빈 : 법적인 부분에서도 그런 것 때문에 유해 봉환 절차가 어려웠던 것이고 그리고 유족분들 동의를 구하는 게 부분도 굉장히 어려우셨다고 들었거든요.
◇ 최홍일 : 맞습니다. 유족들의 동의는 문양목 기념사업회 이수현 상임이사가 자비로 미국을 오가면서 적극적으로 하셨어요. 거의 10년이 넘는 세월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유족들의 동의를 얻는 데 정말 큰 기여를 하셨죠.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어요. 유가족분들은 사실 이민 3세, 4세세요. 문 씨 성 혹은 외손인 경우에는 박 씨 성을 쓰고 계신데, 3세 4세면 그분들이 한국 문화하고 제도를 잘 아시는 게 아니에요. 그런 분들한테 당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쉽게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야 된다고 얘기하면 마음을 쉽게 열어주기가 힘들어요.
◆ 박귀빈 : 하긴 유족분들 입장에서는 저희도 중요한 순간에 가 뵙고 싶은데 그런 걸 못 하시는 거 아니에요? 고국으로 이렇게 저희가 모셔오면 맞습니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 최홍일 : 그래서 그분들의 동의를 얻는 게 사실은 시간이 걸렸죠.
◆ 박귀빈 : 그러셨군요. 사실 재판 과정도 굉장히 어렵지 않으셨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혹시 소송 통해서 유해 봉환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어떤 게 있었을까요?
◇ 최홍일 : 법원에서 했던 질문 중에 하나가 “문 지사님께서 한국을 돌아가고 싶다는 뜻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왜 80년이 넘는 동안 세월을 방치하고 난 다음에 이제냐.” 라는 질문이 있었어요. 굉장히 아픈 질문이죠. 근데 다행히 문 지사님 댁이 신한민보에도 실렸듯이 당시 너무 가난하셔서 한국을 오가실 비용이 없었어요. 실제로 돈이 있어도 이미 문양목 지사님 같은 경우에는 일제에 의해서 요주의 해외 조선인으로 등록되셨던 분이세요. 그래서 돈이 있으셔도 실제로 가기가 어려웠고, 제가 2004년 법원에 답변을 한 게 2004년에 기념사업회가 결성된 이후로 꾸준히 20년 넘게 매해 기념식하고, 학술회를 이어왔다는 점 그리고 우리나라 여러 언론들이 꾸준히 문양목 선생님을 보도해 온 자료들을 제출해서 설득을 했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고요.
◆ 박귀빈 : 당연히 지사님께서는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으셨을 것 같아요. 심정적으로 충분히 그러셨을 거다 생각은 되는데, 이거는 법적으로 다퉈야 되다 보니까 지사님이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으셨다는 마음을 확신을 해야 우리 변호사님도 변론을 하실 수 있는 거잖아요. 그 부분은 어떻게 확신하셨어요?
◇ 최홍일 : 최재학 선생님이 쓰신 문양목 평전을 읽다가 문양목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드님이신 한소와 합소를 불러놓고 말씀하신 부분이 있더라고요. 조국은 반드시 곧 광복이 되니 그때가 되면 반드시 조국으로 찾아달라는 유언이 있는 거를 제가 찾게 되었어요.
◆ 박귀빈 : 문양목 평전 안에 그게 적혀 있어요?
◇ 최홍일 : 맞습니다. 평전 안에 최재학 선생님께서 아드님들을 인터뷰하면서 찾아내신 증거죠. 법원은 이를 망자의 사후 고국 귀환 의지로 그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였어요.
◆ 박귀빈 : 그렇군요. 이번 재판이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게 미국 정부 유해 봉환 소송에서 승소한 첫 사례라면서요. 진짜 많은 분들의 도움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 최홍일 : 네 맞습니다. 단순하게 저 혼자서 했던 일도 아니고요. 우리 소송 중에는 사실 캘리포니아 북가주 6개의 한인 단체가 모두 동참하셨고요. 그리고 심지어 관련이 없는 네바다 리노 한인에도 동참을 하셔서 서명 운동을 동참해 주셨고 1천 개가 넘는 서명을 받아서
◆ 박귀빈 : 일반인들이 그렇게 해 주신 거예요?
◇ 최홍일 : 동포 한인들께서 그렇게 노력을 해 주셔서 법원에 제출했고, 법원은 이를 중요한 공공에 대한 이익, 저희가 또 주장했던 게 뭐냐 하면 이런 행사들을 통해서, 이런 일들을 통해서 저희 2세 교육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동포 2세 교육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그런 점을 강조했고 법원은 이를 좋게 받아들였습니다.
◆ 박귀빈 : 그렇군요. 승소 판결 이후에 교포 분들도 굉장히 벅찬 어떤 말씀을 하셨을 것 같아요.
◇ 최홍일 : 다들 너무 즐거워해 주셨죠. 또 우리 세크라멘토 한인회 임원아 회장님도 그렇고,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김한율 회장님도 그렇고 너무 벅차고 감격해 하시고, 행사도 정말 열심히 같이 준비해 주시고 길고 힘든 과정이었는데, 정말 다시 한 번 동포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박귀빈 : 사실 처음에 앞서 설명을 하셨지만 법리 다툼을 했어야 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 손조를 모셔오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변호사님이 굉장히 쉽지 않겠다. 이런 마음으로 시작을 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 딱 승소하고 나서 변호사님이 변론한 사건을 승소한 것 그것에 대한 의미도 있겠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특별히 우리 변호사님도 벅찬 감동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 최홍일 : 소송 과정에서 혹시나 제가 패소할까 싶어서 소송 자체가 난이도가 있는 소송이었어요.
◆ 박귀빈 : 쉽지 않은 소송이었겠어요.
◇ 최홍일 : 증거물 제출을 굉장히 강도 높게 요구하는 소송이었기 때문에 사실 폐소 가능성도 굉장히 높게 보고 있었거든요.
◆ 박귀빈 : 아 정말요?
◇ 최홍일 : 그래서 패소하게 되면 제가 사비를 들여서라도 비석이라도 세워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너무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승소를 했을 때 기쁨이라기보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죠. 어제 봉안식 행사할 때 드디어 돌아오셨구나. 힘든 이민 생활을 어떻게 버티다가 오셨나. 그런 마음이 많이 들었고 동시에 이제라도 고향 땅에 오신 모습을 보면서 또 많이 뿌듯했습니다.
◆ 박귀빈 : 정말 변호사님도 정말 고생 많으셨고 제가 더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네요. 그렇게 어려운 변론을 해 주셔서 그리고 승소를 이끌어내셨고, 혹시 안 되면 내가 사비를 들여 비석이라도 세워드려야 되겠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럼 문 지사님 비석이 없었나요?
◇ 최홍일 : 있었어요. 있었는데 정말 작아요. 작아서 잘 안 보이니까 우리가 파크뷰 묘지 신문에 몇 번 났었는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무릎 높이가 안 돼요. 근데 바로 맞은편에 일본인들 가족장이 있는데 정말 사람 키 높이만 한 비석들이 앞에 쫙 포진을 하고 있어요. 보고 있으면 가슴이 많이 아팠어요.
◆ 박귀빈 : 그래서 변호사님이 비석을 내가 세워드려야 되겠다. 혹시 내가 여기서 역할을 다 못하게 되면 이런 마음을 가지셨던 거군요. 어려운 과정 절차를 거쳐서 결국은 미국 정부 유해 봉환 소송에서 승소를 해서 우리 문 지사님을 고국으로 우리 대한민국 땅으로 모셔올 수 있게 됐습니다. 유족분들도 이번에 같이 오셨던가요?
◇ 최홍일 : 맞습니다. 아홉 분 같이 오셨어요.
◆ 박귀빈 : 이장 하시면서 어떤 말씀하시던가요?
◇ 최홍일 : 대표 유족이 손자이 분이 저한테 자꾸 감사하다, 고맙다고 하시면서 공치사를 하시는데 제가 혼자서 한 일이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변호사라는 직업이 법리 다툼을 하는 사람이지 사실관계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실관계는 여러분들이 만들어 주신 거예요. 동포 여러분들이 만들어 주셨고, 서명 운동하면서 최재학 선생님이라든가, 이수현 이사님이라든가 이런 분들이 만들어 주신 거기 때문에 저 혼자 한 일이 아닌데, 자꾸 너무 얼굴에 금칠을 해 주셔 가지고 많이 난감했어요.
◆ 박귀빈 : 아니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신 걸 것 같고요. 문양목 지사의 마지막 유언이 “내 뼈를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 말씀이셨다고 앞서서 제가 처음 시작할 때 말씀을 드렸는데 유언이 이번에 이루어진 거거든요. 유언이 이루어진 순간에 만약에 선생님께서 변호사님 옆에 계신다면 변호사님께 어떤 말씀해 주실 것 같으세요?
◇ 최홍일 : 아마 선생님께서 우리가 정말로 광복된 조국에 살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걸 너무 바라셨으니까요.
◆ 박귀빈 : 그러시군요. 어떤 말씀을 듣고 싶으세요? 그러면 이런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거요.
◇ 최홍일 : 그냥 ‘수고했다.’
◆ 박귀빈 : 정말 우리 변호사님 너무나 수고하셨을 것 같고요. 기사를 보니까 변호사님이 유해를 들고 계신 것도 제가 본 것 같아요.
◇ 최홍일 : 맞아요. 제가 법률 대리다 보니까 유예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법률 대리예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감사하게도 유예를 처음에 받았고, 그거를 보훈부에 넘겨드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 박귀빈 : 지사님의 유예를 잠깐 안고 계셨던 건데 그때 느낌이 어떠셨어요?
◇ 최홍일 : 믿어지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따뜻했어요.
◆ 박귀빈 : 정말요? 지사님께서도 따뜻함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우리 변호사님의 따뜻한 품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 최홍일 : 감사합니다.
◆ 박귀빈 : 정말 제가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이 울렁거려 가지고 자꾸 말을 못 잇게 되는데, 이번에 문양목 지사 유해 봉환 계기로 사실은 우리 후손들이 정말 많은 것들을 우리 지사님의 활동도 그렇고 기억을 하셨으면 좋겠는데, 특별히 우리 변호사님께서도 우리 국민들에게 이런 당부의 말씀 꼭 드리고 싶다 하는 거 있으실 것 같아요.
◇ 최홍일 : 일단 저희가 문양목 선생님의 발자취를 한번 생각해 볼 게 있을 것 같아요. 문양목 선생님께서 가난하다고 하시는 와중에도 우리 이민 2세들에게 한글과 고국을 가르치시려고 한글학교를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맨티카에 열어서 운영을 하셨어요. 정말 가난하셨겠죠. 왜냐하면 평생 독립 자금을 임정에 보내시랴, 가족도 건사하시랴 지금도 미국에는 우리 2세 아이들을 한글학교에서 3.1절 광복절 되면 독립을 가르치려고 아이들이 태극기 만들어서 수수깡에 붙여 갖고 이렇게 흔들고 그래요. 정말 예뻐요. 애들 가르치려고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1년에 고작 1만 5천 불, 2천만 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학교 운영들을 하고 계세요. 너무 어렵거든요. 저희 새크라멘토 한글학교하고, 우리 한국학교가 있는데 선생님들 너무 고생하시고 감사합니다. 멀리 있지만 부디 많은 관심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박귀빈 : 정말 말씀대로 문양목 지사의 발자취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고, 문 지사님 유해 봉환 통해서 첫 승소를 했고, 이번 소송 결과를 계기로 첫 번째니까 지금 타국에 묻혀 계신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계신 거잖아요. 우리가 못 모시고 오는 그분들이 돌아오실 수 있는 길이 하나의 길이 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우리 변호사님 혹시 다음 계획이 또 있으실지 궁금합니다.
◇ 최홍일 : 최근에 보부에서 발표를 해 주셨는데요. 안중근 의사님의 조카이신 안원생 지사님께서 아리조나에 묻혀 계신 거를 발견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유가족 설득 작업을 들어갈 거고요. 그래서 유가족들과 대화를 나눈 후에 현충원에 또 모실 계획을 가지고 있고, 저희 윌로우스 비행학교 또 졸업생이신 오이마 선생님 그분의 첫 공군이세요. 독립군 공군. 그분의 유해 이장도 저희가 계획 중입니다.
◆ 박귀빈 : 그렇군요. 안중근 선생의 친동생인 안정근 님의 장남 맞습니다. 안원생 이분이신데 이분의 유해 봉환에 대해서 또 준비를 하고 계시군요. 변호사님 내일이 8.15 광복절입니다. 어떻게 변호사님은 언제 미국 들어가세요? 29일 날 들어갑니다. 그럼 그동안 한국에 계속 계시는 거네요. 한국에 계시면서 어떤 활동들 일정이 잡혀 있으세요?
◇ 최홍일 : 개인적인 활동들입니다. 나머지는 보훈부에서 하는 활동이 행사가 17일까지 잡혀 있고요. 그리고 나면 유가족들 돌아가실 때 제가 한번 같이 만나서 인사하고 나머지는 오랜만에 못 뵀던 저희 부모님 가족들 뵙고 그리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 박귀빈 : 8.15 광복절 올해는 특별히 변호사님께도 물론 80주년 되는 뜻 깊은 해인 데다가 변호사님께 또 다른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내일 8.15 광복절에 우리 국민들이 우리 청취자분들이 이런 마음으로 하루 보내셨으면 좋겠네요.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 최홍일 : 우리가 독립운동가 선생님들을 기억하고 빛나게 해줘야 우리나라가 또 언제 어려움을 겪을지도 사실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그럴 때 누군가는 자기가 나서서 희생을 할 마음을 가지려고 하면 지금처럼 지사님들을 해외에서 모셔오고 역사에 빛나게 해 드리는 그런 과정들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박귀빈 : 말씀 새기고 저도 열심히 방송하면서 우리 독립운동가 분들 많이 알려주지 않는 분들 저희는 또 방송을 통해서 그분들의 발자취를 많은 분들께 알려야 되겠다. 이런 마음도 저도 하게 됐습니다. 문 지사님 대신에 우리 모든 국민을 대신해서 제가 대신할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듣고 싶었다던 말, 우리 듣고 싶으셨다고 아까 문 지사님께 이런 말씀 옆에서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변호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우운 문양목 지사의 유해 봉안 법률 대리인 최홍일 변호사였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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