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라이브] 6·25 정전협정 70주년...'참전용사' 위로하는 15살 소녀

[뉴스라이브] 6·25 정전협정 70주년...'참전용사' 위로하는 15살 소녀

2023.07.06. 오전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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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호준석 앵커
■ 출연 : 캠벨 에이시아 유엔 참전용사 손녀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용 시 [YTN 뉴스LIVE]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7월 27일이 이제 6.25전쟁 정전 70주년입니다. 참전용사들의 손녀다, 민관 외교관이다 불리는 부산의 여고생입니다. 캠벨 에이시아 양을 저희가 초대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캠벨 에이시아]
안녕하세요.

[앵커]
고등학교 지금 1학년?

[캠벨 에이시아]
네.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앵커]
오늘 학교는 어떻게?

[캠벨 에이시아]
사실 제가 미국 고등학교를 온라인으로 다니고 있어요. 이런 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까 결석을 너무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이런 활동을 계속 더 열심히 하고, 그리고 또 하고 싶은 것을 더 깊이 배우기 위해서 그래서 온라인으로 다니고 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국적은 한국?

[캠벨 에이시아]
네, 한국인입니다. 부산 토박이.

[앵커]
어머님은 한국인이시고 아버님은 캐나다인이시고. 부산에서 나서 부산에서 쭉 자라셨고요?

[캠벨 에이시아]
네, 완전 부산 토박이입니다.

[앵커]
이름은 캠벨 에이시아고 한국 이름은 따로 없고요?

[캠벨 에이시아]
네, 그냥 에이시아 그대로예요. 다들 시아라고 불러요.

[앵커]
시아야, 이렇게 부르는군요. 출생신고가 캠벨 에이시아 이렇게 되나 보죠, 우리나라가?

[캠벨 에이시아]
네, 되더라고요.

[앵커]
그래서 참전용사들의 손녀다. 실제 참전용사의 손녀인 것은 아닌데 참전용사들의 손녀다 이렇게 불리지 않습니까? 언제,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건가요?

[캠벨 에이시아]
처음에는 6.25 전쟁 참전용사님들께 감사 편지 쓰고 말하기 대회에 나섰었어요. 그래서 2년 연속 대상을 타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래서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에 가서 직접 참전용사님들을 만나뵀어요. 그때 만나뵌 이후로 계속 연락도 주고 받고 참전용사님들이 오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거든요. 그렇게 해서 참전용사님들의 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앵커]
처음에 그 참전용사들한테 감사편지 쓰기, 거기에는 어떤 마음으로 참가하시면 된 거예요?

[캠벨 에이시아]
제가 UN기념공원에 한 10분 거리에 살아요. 정말 가까워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자주 갔었고 제일 처음에 갔었던 기억이 전사하신 참전용사님들의 성함이 다 적혀 있는 벽이 있어요. 거기에 저희 아빠 이름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보고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조금씩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앵커]
그러니까 아버님이랑 같은 이름인데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다가 전사하신 분들 이름이 거기 있었군요?

[캠벨 에이시아]
네.

[앵커]
집 근처에 바로 UN 기념공원, 거기가 참전용사들이 지금 묻혀 계신 곳인 거죠?

[캠벨 에이시아]
네, 맞습니다.

[앵커]
그래서 그걸 계기로 해서 직접 해외에 나가서 만나시게 됐는데 제일 처음 만났던 참전용사 기억이 나나요?

[캠벨 에이시아]
네, 미국의 할아버지신데요. 할아버지께서는 전쟁 후 스트레스로 PTSD로 계속 악몽을 꾸셨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직접 다녀오고 저랑도 얘기하고 한국이 이렇게 발전된 모습을 보신 뒤에는 PTSD가 좀 더 나아지셨다고 해요.

[앵커]
우리나라에 오셨군요, 그분이?

[캠벨 에이시아]
네, 용산전쟁기념관에서 6월 25일에 뵀었어요.

[앵커]
그분들이 제가 듣기로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와서 그 끔찍한 전쟁을 겪으시고 굉장히 그 고통을 많이 받으셨는데 그 이후에도 한국에 와서 이렇게 발전된 나라를 보고 많이 위로가 되셨다고 하더라고요.

[캠벨 에이시아]
맞아요. 그리고 어떤 분들은 그때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런데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또 한국의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훨씬 더 괜찮아지신다고 하세요.

[앵커]
70년이 지났지만 그 순간을 아직도 못 잊고 계시는 거군요, 그분들이?

[캠벨 에이시아]
네, 옆에서 바로 돌아가셨던 전우도 이름이랑 군번까지 다 기억하고 계세요.

[앵커]
그래서 에이시아 양이 가서 나 한국 소녀인데 만나러 왔다고 하면 어떤 반응들을 보이세요?

[캠벨 에이시아]
엄청 좋아하시죠. 특히 저는 2017년도에 갔었을 때 군복을 입고 갔었어요. 제가 군복을 입은 모습을 보시니까 진짜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제 기억에 초등학교 3학년 때였으니까 제 기억으로는 저를 안아주시면서 우시는 분도 계셨고 또 언어가 안 통하는 참전용사님들을 만나도 마음의 언어가 통한다고 해야 되나요? 그랬었어요.

[앵커]
6.25전쟁에 대해서는 척척박사다. 맞습니까?

[캠벨 에이시아]
그렇게 불리죠. 그런데 한 번도 6.25전쟁을 공부해야겠다 해서 공부한 것은 아니고 참전용사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참전용사님께서 나 가평전투 참전했어 하면 나중에 집 가서 가평전투 검색해 보고 그 정도거든요. 그런데 초등학교 3, 4학년 때 만나다 보니까 참전용사님들께서는 전쟁의 참혹함보다는 전쟁 속에 있었던 따뜻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세요.

예를 들어서 임진강 위에서 캐나다 참전용사님들이 캐나다가 그리운 거예요. 그래서 얼은 임진강 위에서 아이스하키 게임을 했던 얘기라든가 아니면 길강아지를 주워서 배에서 같이 키웠던 얘기나 이웃주민이 처음 김치를 줬었을 때, 그리고 한국에 있는 학생들이 뭐라고 도와주고 싶어서 총 닦아주고 짐 날라줄 때, 그런 이야기 많이 해 주셨어요.

[앵커]
그 끔찍한 전쟁의 전장 속에서도 그런 인간의 따뜻한 사랑 그런 것들도 피어났었던 거군요?

[캠벨 에이시아]
네, 맞습니다.

[앵커]
6.25전쟁에 대해서 70년 지났지 않습니까? 지금 정전된 지만 70년이 지났는데 아마 또래 친구들은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친구들도 많을 텐데 6.25전쟁을 우리가 왜 기억해야 되는지 친구들한테 얘기해 준다면 뭐라고 얘기하겠습니까?

[캠벨 에이시아]
친구들은 지금 고등학생이잖아요. 그러니까 저희랑 얼마 차이 나지 않은, 그리고 또 어렸을 때 참전하신 분은 18살, 17살이었던 참전용사님들도 계시거든요. 저랑 친한 참전용사님께서는 16살에 참전하셨어요. 딱 제 나이 때 참전을 하셨단 말이에요. 이처럼 참전용사님들을 역사 속에 있는 영웅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아빠이자 누군가의 오빠이자 또 누군가의 아들이잖아요.

그래서 참전용사님들이 한 분이라도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감사하는 마음을 직접 전하는 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6.25전쟁을 배우는 것도 정말 중요하지만 일단 참전용사님들한테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분들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저희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았을지 정말 몰랐을 거잖아요. 그래서 꼭 기억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그래서 그 참전용사들 가면 일단 반가워하시고 너무너무 감사하다라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 어떤 얘기들을 하세요?

[캠벨 에이시아]
우세요. 저를 안아주시면서 우시고 오히려 저한테 고맙다고 말씀하시거든요. 그러면 제가 아니라고 제가 너무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그때 이후로 계속 연락하고.

[앵커]
6.25전쟁 척척박사니까 우리나라에 왔었던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16개 나라. 몇 명 정도가 오신 거죠?

[캠벨 에이시아]
저도 사실 정확히는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6.25전쟁에 대해서 검색을 해 보시면 정말 많이 나오니까. 그런데 6.25전쟁 참전용사님들의 이야기, 많이 검색해 주시기 바랍니다. 숫자보다는 진짜 그 이야기를 많이 검색해 주세요.

[앵커]
숫자는 제가 그래서 검색을 해 왔습니다.

[캠벨 에이시아]
감사합니다.

[앵커]
22개 나라 청년. 그래서 16개 참전국 말고도 전체가 22개 나라. 의료 지원까지. 22개 나라 청년 195만 7733명이 참전했고, 목숨을 잃은 분이 무려 3만 7902명이 우리나라에서 전사를 했고 그중에 UN 기념공원에 지금도 묻혀 있는 분들이 많고. 그분들을 위해서 지금 열심히 뛰고 있는 캠벨 에이시아 양을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습니다.
바로 집 근처가 UN 기념공원.

[캠벨 에이시아]
네, 그리고 저는 UN 기념공원 홍보대사이기도 합니다.

[앵커]
홍보대사입니까?

[캠벨 에이시아]
그래서 UN 기념공원이 가깝다 보니까 참전용사 전우의 묘에 헌화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나 그분들의 생일에도 찾아봬서 헌화를 하고 그리고 또 유가족분들에게 오늘 다녀왔어요. 제가 꼭 참전용사님들 take care 할게요라고 편지도 보내고 사진도 보내고 있어요.

[앵커]
1년에 몇 번씩은 꼭 간 거군요.

[캠벨 에이시아]
한 달에 한 번은 가는 것 같습니다. 더 갈 때도 있고.

[앵커]
6.25전쟁의 전투 찾아본 것 중에 제일 기억나는 전투는 어떤 건가요?

[캠벨 에이시아]
정말 많은 전투가 기억나지만 그래도 아빠가 캐나다인이니까 가평전투를 뽑고 싶습니다. 가평전투 같은 경우에는 제가 데니스 무어라는 참전용사분이 계세요. 그분이 직접 가평전투에 참전하셨고 그리고 빈센트 할아버지라고 혹시 턴 투어드 부산이라고 들어보셨어요? 11월 11일 오전 11시에 전 세계에서 부산을 향해서 1년간 묵념하는 날인데, 그날을 빈센트 커트니 할아버지께서 직접 제안하신 날이거든요. 그래서 가평전투는 그때가 중공군이 개입했을 때였어요. 그래서 모두가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마지막까지 지켰던 나라가 바로 캐나다였어요. 그러니까 캐나다의 역할은 후퇴하는 우리 국군, 미군, 호주. 이렇게 영연방군을 지키는 역할을 했었어요. 그런데 그때 중공군은 정말 너무 많은 인원이 있었고 캐나다군은 정말 몇 명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캐나다군이 끝까지 지켜서 이겨낸 그런 전투라고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앵커]
1950년 아마 겨울쯤이었겠군요. 아주 추운 날씨 속에서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아버님의 나라인 캐나다 군인들이 거기서 목숨을 바치기도 한 가평전투. UN 기념공원 자주 가신다고 했는데 지난번에 엑스포 실사단이 왔을 때도 거기 안내하셨다면서요?

[캠벨 에이시아]
네, 맞습니다. 그때 UN 기념공원 안내도 하고 또 미래세대 오찬에서 스피치도 했었어요. 그때 열심히 부산을 어필했습니다.

[앵커]
지금 화면 보여드리려고 하는데 그분들이 부산 UN 기념공원에 와서. 지금 옆에 에이시아 양이 발랄하게 뭔가를 안내를 해 주고 있고요. 저분들이 설명해 주니까 어떤 반응들이었어요?

[캠벨 에이시아]
일단 실사단분들이 UN 기념공원에 온 것 자체가 저한테는 너무 큰 의미였어요. 왜냐하면 정말 부산의 많은 곳들 중에서 UN 기념공원에 와서 그리고 6.25전쟁 참전용사님들의 희생, 그리고 평화의 유산이 남겨져 있는 곳에 와서 직접 참전용사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신 거잖아요.

그래서 그 부분에서 의미가 정말 컸고 그리고 정말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렇게 많은 분들의 성함을 보시면서 헌화도 하시고 묵념도 하시고 숙연해지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점은 저희가 70년 전에, 그러니까 73년 전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73년 전에 UN군의 도움을 받았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죠. 정말 빠른 시간 안에 좋은 나라,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성장을 했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돌려줄 차례다. 우리는 도움을 받았으니까 이제 우리가 도움을 줄 차례다. 우리는 기술이나 혁신, 그런 장소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모두 모여서 UN군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 예를 들어서 기후위기, 보건, 불평등의 문제를 국가 다 함께 협력해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자라는 것. 부산이 최적의 도시다라는 얘기를 했었어요. 부산 사람이다 보니까 부산 자랑할 때 갑자기 신이 나네요.

[앵커]
제가 실사단원이면 그냥 무조건 부산에 한 표 찍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 들으면. 파리에서 작년 말에 PT할 때 우리가 3차 PT. 얼마 전에 윤석열 대통령 참석했던 게 4차 PT였고 그전 3차 PT 때 그때 연사로 가셨었다면서요. 그때도 그런 얘기하신 거군요?

[캠벨 에이시아]
맞아요. 그때도 부산이 최적의 도시다. 그러니까 글로벌 플랫폼이 될 최적의 도시다라고 얘기했었던 것 같아요.

[앵커]
반응이 어땠어요, 그때는?

[캠벨 에이시아]
그때는 정말 반응이 좋았어요. 정말 한국이 반응이 제일 좋았습니다. 진짜예요. 제가 현장에 가었잖아요. 제가 연설을 했었을 때 아무도 폰을 보고 있지도 않고. 제가 사실 한 분, 한 분 제 이야기를 모두 다 듣게 만들겠다는 마인드로 한 분 한 분 눈을 다 쳐다보면서 얘기를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고개를 다 드시고 사진이나 영상을 찍으시는 분도 계시고 저랑 눈 마주치시면서 웃어주시는 분도 계시고 박수 소리도 제일 컸습니다.

[앵커]
잘 될 것 같습니까?

[캠벨 에이시아]
네. 이번에 윤석열 대통령님께서도 부산 이즈 레디. 부산은 준비가 되었다라고 말씀을 해 주셨잖아요. 그리고 부산 시민들도 이번에 실사단 오셨을 때 정말 환호성 보셨나요? 정말 대단했었거든요. 그래서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앵커]
부산 사람들이 원래 이렇게 뜨겁잖아요. 그렇죠?

[캠벨 에이시아]
그렇죠. 부산 사나이죠.

[앵커]
부산 기질이 좀 있는 것 같은데요.

[캠벨 에이시아]
네, 부산 사람이니까.

[앵커]
2030년에 만약에 엑스포가 유치되면 그때 7년 뒤니까 23살?

[캠벨 에이시아]
네, 22살, 23살.

[앵커]
그때 뭐하고 있을까요, 에이시아 양은?

[캠벨 에이시아]
그러게요. 뭘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도 6.25 전쟁 참전용사님들의 이야기도 널리 알리고 그리고 부산에서 엑스포가 유치되었으니까 일자리도 정말 많이 생겨나겠네요. 어쨌든 열심히 뭐든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앵커]
이렇게 바쁘게 활동하고 또 방송도 하고 또 특히 전쟁에 대해서 알리고 하는 것. 이걸 부모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캠벨 에이시아]
되게 응원해 주세요. 참전용사님들을 부모님이 다 같이 만나다 보니까 온 가족이 느낀다고 해야 되나요? 또 심지어 캐나다 할머니, 할아버지, 사촌언니, 그리고 사촌언니 남자친구까지 한국에 왔었을 때 6.25 전쟁 참전용사님들의 이야기를 알리자라는 캐나다 사진전을 했었어요. 그때 열심히 도와주셨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에이시아 양이 쓴 편지도 있더라고요. 글씨도 되게 예쁘던데 잠깐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읽는 것보다 에이시아 양이 읽는 게 더 생생할 것 같습니다. 글자가 잘 안 보이나?

[캠벨 에이시아]
읽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꼬마 민간 외교관. 참전용사님들의 손녀라는 별명을 가진 캠벨 에이시아입니다.

6.25 참전용사님들의 용기와 헌신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이들에게 평화로운 고향을 선사해 주셨습니다.

꿈과 희망을 품고 도전하여 성장할 수 있는 현재와 미래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평화는 바로 6.25 전쟁 참전용사님 가족분들의 크나큰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진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덧 정전이 된 지 70년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과 성공은.

바로 여러분, 영웅들의 희생의 증거입니다.

우리 후손들은 여러분의 희생으로 만들어낸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고 공유하며 미래세대에도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참전용사님들은 저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계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앵커]
이게 저희들의 마음이 기도해서 마지막 부분은 제가 읽었습니다. 모니터가 작아서 글자가 잘 안 보였습니다. 한덕수 총리하고, PT 마치신 다음에 한덕수 총리가 그다음 연사석에 하이파이브하는 장면도 화제였는데 그게 원래 계획했었던 건가요?

[캠벨 에이시아]
네, 제가 PT 마지막에 질문을 하면 한덕수 총리님께서 그 부분에 대답을 하시는 파트였는데 연결을 해야 되는데 뭔가 쭈뼛쭈뼛 어색한 거예요. 그래서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의논을 해서 제 하이파이브에 제 에너지를 다 담아서 힘차게 착! 했습니다.

[앵커]
깜짝 놀라셨겠는데요, 너무 세서.

[캠벨 에이시아]
그런데 만만치... 둘 다 쌍방이었기 때문에.

[앵커]
알겠습니다. 지금 그러면 대학 진학 준비도 해야 되겠네요?

[캠벨 에이시아]
대학 진학을 해야죠.

[앵커]
진로는 생각한 게 있습니까?

[캠벨 에이시아]
사실 직업은 계속 바뀌어서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궁극적인 목적이나 목표는 무엇을 하든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주고 또 선한 영향력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커서 어떤 직업을 갖게 되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직업을 하고 싶습니다.

[앵커]
제일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또는 나의 좌우명 그런 게 혹시 있나요?

[캠벨 에이시아]
방금 말한 그 좌우명입니다. 저만의 좌우명이죠.

[앵커]
다른 사람들한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캠벨 에이시아]
선한 영향력. 영감을 주고 싶습니다.

[앵커]
지금 삶은 만족스럽습니다, 지금까지는?

[캠벨 에이시아]
네, 정말 만족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앵커]
노래도 되게 잘하신다면서요?

[캠벨 에이시아]
그런가요?

[앵커]
무슨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굉장히 잘하셨다고 들었는데.

[캠벨 에이시아]
KBS 불후의 명곡. 말해도 되나요? 거기서 나왔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나왔었습니다.

[앵커]
지금도 계속 노래는 잘하시고요?

[캠벨 에이시아]
모르겠습니다.

[앵커]
한 소절 듣고 싶지만 갑자기 청하면 좀 당황하실 것 같아서.

[캠벨 에이시아]
지금 딱 생각나는 곡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이런 노래밖에 없어서.

[앵커]
굳세어라 금순아. 6.25 전쟁 노래군요, 역시. 알겠습니다. 그 스토리가 궁금하신 분들은 검색해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정전 70주년, 7월 27일입니다. 맞아서 캠벨 에이시아 양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캠벨 에이시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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