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었던 말” 형제복지원 조사한 박준영 변호사가 남긴 뒷이야기

“꼭 하고 싶었던 말” 형제복지원 조사한 박준영 변호사가 남긴 뒷이야기

2018.11.21. 오후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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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하고 싶었던 말” 형제복지원 조사한 박준영 변호사가 남긴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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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8년 11월 21일 (수요일)
■ 대담 : 박준영 검찰 과거사위원회 진상조사단 위원



“꼭 하고 싶었던 말” 형제복지원 조사한 박준영 변호사가 남긴 뒷이야기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어제 문무일 검찰총장이 군사정권 시절 대표적 인권유린 사례로 꼽히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에 문제가 있다며 비상상고를 청구했습니다. 거의 30년 만에 진상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건데요. 검찰 과거사위원회 진상조사단 위원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조사하고 비상상고를 주장해 온 박준영 변호사 연결해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박준영 검찰 과거사위원회 진상조사단 위원(이하 박준영)> 네, 안녕하세요.

◇ 이동형> 검찰의 비상상고 청구. 그동안 유죄를 무죄로 바꾸는 비상상고는 있었지만, 무죄를 유죄로 바꾸는 비상상고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는데, 맞습니까?

◆ 박준영> 판결이 확정된 이후에 그것을 바로잡는 절차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재심이 있고, 비상상고가 있는데요. 재심은 잘못된 유죄판결은 무죄로 바꾸는 거고요. 그런데 무죄를 유죄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비상상고는 판결이 법령 위반 사실이 있는 경우에 다시 유죄로 바꾸면서 형은 선고 못 하지만, 사실상 유죄 취지의 판결을 할 수 있는 게 비상상고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는 이번에 처음입니다.

◇ 이동형> 나름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고 보이는데요. 당시 법원이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에게 특수 감금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이 비상상고를 선고했지만, 특수 감금 피해자들 중에서 연락이 닿는 분이 없다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 박준영> 당시 부산 형제복지원 수용인들 중에서 168명이 울주에 있는 작업장에서 축사에 갇힌 채로 작업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특수 감금의 피해자들은 총 168명인데요. 그분들과 한 분도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수사기록부상 그분들의 인적 사항이 주민번호 앞자리만 있고, 뒷자리가 다 없었고요. 그리고 또 그분들의 이름조차도 제대로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경우도 있었어요. 당시 수사를 제가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김용원 검사가 열심히 수사하셨고, 수사관도 열심히 수사하셨는데, 정해진 시간에 한정된 인력으로 하다 보니까, 그리고 많은 수용인들을 조사하다 보니까 그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요. 또 그분들이 지금 30년 이상 지난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는지도 의문이기는 합니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라는 것이 저희가 개인정보에 대한 조회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강제 수사권이 없는 상황이고, 그러다 보니까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국가 차원의 조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 이동형> 비상상고를 한다는 것은 재판을 다시 한다는 이야기로 해석하면 되는 거예요?

◆ 박준영> 맞습니다. 판결이 확정됐지만, 그 판결에 중대한 법령 위반이 있다는 이유로 대법원이 단심으로 사건을 다시 재판하는 겁니다.

◇ 이동형> 그런데 피해자들하고 연락이 안 닿는다고 하면, 진실을 밝히는 데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 박준영> 그것은 아닙니다. 일단은 이 사건의 피고인은 박인근이기 때문에요. 그리고 그 당시 피해자분들의 진술은 기록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특수 감금의 사실 자체가 달라지지 않고, 다만 잘못된 법을 적용하는 바람에 무죄가 선고됐기 때문에 피해자분들과 연락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판결할 수 있습니다.

◇ 이동형> 당시 담당 검사가 꽤 노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결국 재판에서 뒤집어진 것이요.

◆ 박준영> 당시 김용원 검사님께서 고생 많이 하셨죠. 외압이 굉장히 많았지만 수사를 굉장히 열심히 하셨거든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재판에 넘겼는데, 재판과정에서 대법원판결이 세 번이나 있는, 한 사건으로 일곱 번의 재판이 있었던 사건입니다. 고등법원에서 유죄로 판결하면, 대법원에서 무죄로 돌려보낸 일이 반복됐거든요. 그래서 결국 말도 안 되는 재판이 있었던 겁니다.

◇ 이동형> 수사 과정, 재판 과정에서도 외압이 있었다고 보시는 겁니까?

◆ 박준영> 그것은 제가 수사 과정에서의 외압은 분명합니다. 수사 과정에서 검찰 지휘부나 또 그 당시 청와대의 외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당시 김용원 검사가 수사 과정에서 작성한 정보 보고. 수사 기록에는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수사의 상황, 그리고 위의 지시 사항을 알 수 있는 정보 보고가 청와대까지 보고됐었거든요. 그리고 정보 보고의 내용이 사실상 어떤 명에 의해서 수사를 중단했다, 또 명에 의해서 공소장을 이렇게 변경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수사에 외압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다만 재판 과정에서 어떠한 외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죠. 그리고 그것은 어떤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 이동형> 검찰 지휘부에서 외압이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박희태 전 국회의장 이름이 오르내리더라고요. 과거사 위원회에서도 박희태 전 의장을 조사하지 않았습니까?

◆ 박준영> 했습니다. 이 사건이 부산지검에서, 그 당시에 울산지청 관할이었고요. 부산지검이 상급관청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부산지검장이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었기 때문에요. 그리고 외압 과정에서 작성된 보고서의 경유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분을 조사했죠. 그런데 잘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는 취지로 얘기했는데, 그것은 말이 안 되죠. 왜냐하면, 정보 보고가 수십 건이 본인을 거쳐서 올라갔고, 이 사건이 1987년에 부산지검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는데, 이것을 몰랐다고 얘기하는 것은 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과거사 위원으로 활동하시면서 형제복지원 기록물 22권을 보셨다고 하는데요. 그 기록물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었습니까?

◆ 박준영> 기록에는 형제복지원 수사 과정, 울주 작업장 168명에 대한 감금, 가혹행위, 그리고 박인근 원장의 횡령, 외환관리법 위반, 이런 여러 범죄사실에 대한 자료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이잖아요? 가난하고, 약자들인데, 이분들이 기록에서도 소외받았어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분들의 인적사항을 확인할 수 없어서 지금 이분들을 찾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또 재판과정에서는 국고보조금 수억 원을 횡령했는데, 10억 원 넘는 돈을 횡령했을 겁니다. 그런데 기소도 축소되어서 기소됐고, 재판 과정에서도 당시 변호인들이 횡령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거래장부 같은 것을 제출했는데, 당시에는 지금 이렇게 계좌추적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거래장부에 이 돈을 어떻게 썼다고 기재하면, 그게 횡령이 아닌 것으로 되는 시대였던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변명이나 자료를 만들어서 정말 많은 액수의 횡령이 무죄 판결받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 이동형> 이번 조사 과정에서 피해 생존자분들도 만나보셨잖아요?

◆ 박준영> 만나봤죠.

◇ 이동형> 그중에서 특별히 가슴 아팠던 사연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사연입니까?

◆ 박준영> 많은 분들의 사연이 다 가슴 아팠어요. 한 50여 분 만났는데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이 다 가슴 아팠습니다. 어느 하나를 꼽기 힘들 정도였어요. 공통적으로 30년 이상 지난 지금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정신과 약으로 사는 분도 있고, 술이 의지해서 사는 분도 있고요. 밤에 불을 켜놓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분들, 그리고 지금도 자살 시도를 생각하시는 분들, 일정한 직장,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 있고, 또 혼자 살고 있는 분들도 굉장히 많았어요. 그 당시에 육체적이나 정신적 고통, 장애에 대해서 치유도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 이동형> 당시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미성년자들도 상당수 된다고 하던데요?

◆ 박준영> 정말 많았죠. 형제복지원 생존자 대표인 한종선 씨 같은 경우는 9살 때 들어갔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난한 집 아이들도 많이 들어갔지만, 어떤 경우도 있었냐면, 이사한 집을 찾지 못해서 헤매고 있는 아이들까지 그냥 형제복지원에 보내버렸어요. 그러다 보니까 실종 신고를 내고 그 아이를 찾는 부모가 있었고, 그 아이는 또 형제복지원 내에서 이름을 개명 당해서 정말 고아가 되어 버리고요. 말도 안 되는 사례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 이동형> 미성년자를 상대로 인권유린 작태가 벌어졌고, 또 걱정도 되고, 염려도 되는 것이 당시에 끌려갔던 여자아이들, 또 젊은 여성들이 성적으로 유린당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거든요?

◆ 박준영> 네, 그런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한 질문을 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그게 또 그분들의 상처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다만 또 남자분들 중에서도 성폭행을 당한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많은 남자들을 한 곳에 몰아넣다 보니까 나이 든 사람들, 그 당시에 어른들이 어린아이들, 예쁘장하게 생긴 어린아이들을 밤에 품에 안고 잠을 많이 잤어요. 그래서 성폭행이 만연했고, 그러다 보니까 어린 나이에 거의 매일 성폭행을 당하다 보니까 형제복지원을 나온 이후에 본인의 성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분도 계세요. 그 트라우마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요.

◇ 이동형> 당시 형제복지원 원장이었던 박인근 원장. 지금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 박준영> 네, 사망했습니다.

◇ 이동형> 사망했는데, 재판을 다시 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 박준영> 사망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 판결에 대해서 파기, 무죄 판결이 잘못됐다, 특수 감금이 무죄로 선고된 것은 잘못됐다는 것을 주문에서 분명히 밝힐 것이고요. 물론 무죄가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유죄를 선고하면서 형을 선고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이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피고인한테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박인근이 사실상 가해자로 확정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적어도 박인근의 불법 행위로 인해서 수많은 피해자가 있는 상황에서 박인근의 엄청난 재산을 상속인들이 물려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재산에 대해서 어떤 국가 차원에서 환수조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국가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에 대해서 배상과 보상을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이동형> 네, 하나하나 따져보죠. 방금 변호사님이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하셨는데, 어쨌든 박인근 씨가 사망했기 때문에 박인근이 유죄로 확정된다고 하더라도 박인근에게 손해배상청구는 못 하는 것 아닙니까?

◆ 박준영> 박인근은 죽었기 때문에 박인근을 상대로 뭘 할 수는 없지만, 박인근의 잘못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박인근의 재산을 상속받은 사람들한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봐야죠.

◇ 이동형> 유죄 판결이 난다는 가정하에서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 박준영> 물론 난관이라는 게 있죠. 하지만 그래도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에 대한 불법행위의 책임을 지금 상속인들에게 묻고, 박인근에 책임을 묻는 거죠. 그리고 또 상속인들의 재산이 사실상 박인근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뭔가 저는 머리를 짜내면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이동형> 재판하고 판결이 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텐데요. 그 사이 상속자들이 상속받은 많은 재산들을 다른 곳으로 빼돌린다거나 팔거나, 이런 경우도 생길 것 아니에요?

◆ 박준영> ‘SBS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형제복지원 원장의 재산이 해외로 빼돌려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그런데 워낙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재산을 하루아침에 처분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고, 이런 특별법 제정으로 인한 진상조사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서 박인근 일가의 재산에 대해서 국가 차원에서 환수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 이동형> 피해자들은 비상상고 결정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 박준영> 일단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형제복지원 사건, 그 당시 울지 작업장 사건의 168명 피해자와는 한 분도 연락이 안 되기 때문에 그분들의 입장은 알 수 없죠. 다만 그 형제복지원 사건 비상상고로 인해서 부산 형제복지원 본원에 수용됐다가 고통을 당하신 분들은 뭔가 특별법의 실마리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까지 특별법 얘기가 몇 년 전부터 나왔는데, 아직까지 진척이 안 되고 있으니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거죠. 잘 되기를 바라면서요.

◇ 이동형> 변호사님 말씀처럼 결국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특별법 제정 아니겠어요? 결국은 국회에서 일을 해야겠네요?

◆ 박준영> 국회에서 해야죠. 국회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고, 하루빨리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분들의 고통은 하루, 하루 잔인한 고통이 계속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비상상고 이야기를 너무 축소해서 해석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비상상고로 인해서 무죄 판결이 파기되면 당시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사람들의 수용 근거가 됐던 내무부 훈령이 위헌임이 확인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무부 훈령으로 수용됐던 사람이 부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픈 역사 중에서 과거사 청산이 많이 됐다고 하지만 이렇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죽음이나 국가폭력에 대해서는 청산이 제대로 안 됐거든요. 이번 기회에 그런 분들의 인권 침해에 대해서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 이동형> 지금 많은 청취자분들이 도대체 왜 국회에서 특별법이 안 되냐는 질문을 많이 하고 계시거든요? 3년째 계류 중이죠?

◆ 박준영> 그렇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주목하고 싶어요. 형제복지원 사건 기록을 보다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1987년에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 형제복지원에서 2년 6개월 동안 있다가 나온 사람이 검찰청에 진정서를 냈는데, 진정의 내용인즉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1987년에 있었거든요. 그 사건 터지면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묻혀버렸습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뭐라고 얘기했냐면, 박종철 군은 서울대를 나온 지성인이고, 우리는 부랑인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권리는 평등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와 지금, 30년이 지났지만, 우리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정말 그분들의 고통에 대해서 정말 우리가 진지하게 오랫동안 연대하고 있나?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또 국회에서 특별법 제정을 미루는 이유 중 이것도 있습니다. 형제복지원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 전국에 그 당시 부랑인 시설이 수십 군데가 있었는데, 형평성의 문제를 또 제기하는 것 같기는 해요. 법에 대해서 신중하자는 입장에서는요. 그런데 그러다 보면 그러면 못하는 거죠. 일단 한 곳이라도 시작하고, 이런 피해 사실을 더 전국적으로 확인하는 게 중요하지 않나, 그리고 형제복지원을 거쳐 간 수만 명의 피해자들 중에서 지금 대책위와 연락이 닿는 피해자는 260명에 불과해요. 30~40년 전에 발생했던 이 인권침해 피해자들이 지금도 생존하고 계신 분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국가의 재정을 얘기하는데, 피해자들을 찾아서 하루빨리 그분들의 트라우마 치료나 이런 것을 하는 것이 시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 이동형> 결국은 국가가 사과하고, 특별법 제정을 통해서 배,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 박준영> 맞습니다.

◇ 이동형> 그것만이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고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박준영>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형제복지원을 부랑인 수용 시설이라고 많이들 알고 있는데,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사람들은 부랑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물론 부랑인이라고 해서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형제복지원 피해자라고 그분들이 나서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뭐냐면, 형제복지원 갔다 왔다고 하면 그 시절에 부랑인이라고 낙인 찍힐까 봐. 그래서 말을 못 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아요. 부랑인이 아닌 분들도 상당히 많이 그곳을 거쳐 갔어요.

◇ 이동형> 그런데 당시 전두환 정권이 내무부 훈령을 통해서 그런 식으로 죄 없는 사람들 강제 수용해서 일을 시키고 한 것이 88올림픽을 위해서라는 얘기도 있던데, 맞습니까?

◆ 박준영> 물론 70, 80년대에 우리가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했고, 이주 과정에서 도시에 정착하지 못한 분들이 부랑인이 된 것 같아요. 그런데 88올림픽, 86아시안게임이 81년도에 개최 확정되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그 당시 정권에서는 외국인이 많이 올 텐데, 우리 대한민국 이미지가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고 거리를 청소한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보냈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이번 검찰 과거사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시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점이 아쉽습니까?

◆ 박준영> 아쉽죠. 일단은 비상근입니다, 저희가. 비상근이어서 상근이라면 더 열심히 조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그리고 개인적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황에서 접하다 보니까 저도 공부를 해가면서 했어야 했고요. 그래서 역량이나 능력 부족으로 인한 소홀했던 지점에 대한 아쉬움이 많아요. 특별법이 제정되면 진상조사 부분에 있어서도 조금 더 인력이나 재원을 보강해서 체계적으로 조사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동형> 피해자 대표로 활동하시는 한종선 씨가 책을 썼다고 하는데요. 책 제목이 ‘살아남은 아이.’ 어떤 책입니까?

◆ 박준영> 일단 청취자분들 많이 이 책 구입하셔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형제복지원 대표 한종선 씨가 9살 때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들어갔거든요. 거기서 겪었던 인권 유린 참상이 아주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책 보면 눈물 날 거예요. 그리고 전규찬 교수, 박래군 인권활동가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나름 분석한 글들이 담겨 있습니다.

◇ 이동형> 비상상고 결정이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될 수도 있겠죠?

◆ 박준영> 네,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고요. 대법원에서 정의로운 결정을 내려줄 것으로 믿고 있고요. 한 말씀 더 드리자면 검찰총장께서 의미 있는 결단을 해주셨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가 박수칠 것은 박수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마지막으로 우리 청취자 여러분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주시길 바랍니다.

◆ 박준영> 관심과 연대가 중요합니다. 말도 안 되는 사건이었거든요. 끝까지 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됐는지 지켜봐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정의롭게 해결되고, 국회의원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이동형> 알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고요.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박준영> 네, 감사합니다.

◇ 이동형> 지금까지 박준영 변호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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