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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여준, 前 환경부 장관
[앵커]
문민정부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 또 환경부장관을 지낸 윤여준 전 장관과 함께 자세한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오늘 아침 비보를 듣고 많이 놀라셨겠어요.
[인터뷰]
연세가 있으시고 또 최근에 병세가 안 좋으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마음속으로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마는 막상 새벽에 5시에 YTN 뉴스를 보고 알았어요. 깜짝 놀라고 좀 비감한 생각이 들더만요. 모시고 일할 때 생각이 많이 나고.
[앵커]
오늘 아침 빈소를 다녀오셨나요?
[인터뷰]
다녀왔습니다.
[앵커]
어땠습니까?
[인터뷰]
제가 갔을 때는 아직 빈소가 준비가 안 돼 있어서 조문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님이 오신 것을 보고 왔습니다.
[앵커]
만감이 교차하실 것 같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가깝게 지내셨고 공보수석을 몇 년 하셨었죠, 그때?
[인터뷰]
문민정부에 공보수석이 4명이 있었는데요. 제가 세 번째 거든요. 제가 2년 7개월을 했습니다.
[앵커]
거의 3년을 하셨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가깝게 여러 가지 업적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일을 같이 겪으셨다고 볼 수 있는데...
[인터뷰]
특히 김 대통령께서는 대변인의 역할을 굉장히 중시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일하는 여건을 많이 만들어주시고 또 대통령께서 공보수석의 역할을 중시하시는 게 주변에 알려지니까 주변에서도 일하는 것을 많이 도와주시고 해서 김 대통령 모시고 일한 2년 7개월에 저한테는 제 공직생활 중 가장 헌신적이고 가장 의욕적으로 일한 기간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하죠.
[앵커]
이렇게 문민정부에서 함께 일하셨는데 최근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 언제 또 뵈셨는지요?
[인터뷰]
뵌 지는 몇 년 됩니다. 왜 그러냐하면 편찮으신 초에는 많이 뵀는데요. 나중에는 당신의 편찮으신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시지 않는다고 하셔서 그래서 굳이 가 뵙는 것은 안 했습니다.
[앵커]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인터뷰]
특별한 인연은 없고요. 다만 야당 총재로 계실 때 제가 출입기자를 해서 그때부터 인연이 있었으나 그것은 잘 기억을 못하시는 것 같았고. 제가 안기부에서 언론특보를 하고 있었을 때 남북정상회담을 김일성 주석하고 하시기로 하셔서.
[앵커]
94년에 추진됐었죠?
[인터뷰]
판문점에서 교섭을 하게 되는데 우리 대표단이 3명이 있는데 수석대표가 이홍구 통일부총리, 또 한 분은 청와대 정종욱 외교안보수석 이렇게 저까지 셋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전날 청와대로 부르셔서 지침을 주시고 한 게 기억이 나는데 제가 그 회담에 가서 북한측 대표와 두 차례인가 회담을 별도로 했어요.
그것을 지켜보시고 나서 저를 굉장히 인상깊게 생각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공보수석으로 발탁된 게 아닌가, 그렇게 짐작을 합니다.
[앵커]
회담을 이끌어나가는 과정을 인상깊게 보셨다.
[인터뷰]
저는 남북대화를 해 본 사람이 아니고 상대방은 노련한 대화꾼이었는데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보시고서 상당히 잘한다고 생각을 하셨나 봐요.
[앵커]
마침 그 얘기가 나왔으니까 그 얘기 좀더 나눠보겠습니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결국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했잖아요.
[인터뷰]
그게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안타깝죠.
[앵커]
어디까지 진행이 됐습니까, 남북정상회담이.
[인터뷰]
선발대가 평양에 가서 회담 준비를 구체적으로 해야 하는데 선발대를 제가 인솔하기로 돼 있었거든요. 원래 다른 사람이 하게 되어 있는데 대통령께서 저한테 가라고 하셔서 제가 가기로 했었는데. 출발하기 일주일 전인가 김일성 주석이 돌아가셨죠.
[앵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도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하셨다고요.
[인터뷰]
물론이죠. 그 회담하러 가기 전 날 청와대에서 불러서 들어가셨을 때 그때 정부에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김일성 주석은 남북 간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고 김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분이니까 두 분이 회담하다 혹시 김 대통령께서 실수하면 어떡할까 그런 걱정을 했었는데.
저도 그것을 걱정한 사람 중에 하나였죠. 청와대 들어가서 말씀을 들어보니까 그건 불필요한 걱정이다, 나름대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셨고 아주 단단한 각오와 결의를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만약에 회담이 성사가 됐으면 남북관계는 큰 전환점을 맞았을 겁니다.
[앵커]
지금 화면에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나오는데요. 클린턴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이후 처음 한국을 찾았었죠. 그때 그 장면이 나오고 있고요. 의원님이 보시기에 김 전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인터뷰]
제가 보기에는 우선 굉장히 통이 크신 분이고요. 굉장히 담대하시고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직관력을 가진 분이에요.
[앵커]
정신력과 직관력. 사례를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예를 들면 무슨 일이 생겨서 판단하실 때 우리는 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점검하고 논리적으로 결론을 도출하잖아요. 그런데 김 전 대통령께서는 딱 대강의 상황만으로도 파악하고 바로 직감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한다, 이렇게. 이게 굉장히 무섭다고요.
직관력이라는 게 논리적인 경우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경우가 많거든요. 제가 걱정했던 것은 간혹 뵈면 대통령께서 자신의 직관력을 너무 과신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될 때가 있어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직관으로 판단하시되 최종 결정하시기 전에 논리적인 검토를 한번 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실수를 안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린 일이 있습니다.
[앵커]
밀어붙이는 원동력이 있던 대통령으로 기억하시는 것 같은데요.
[인터뷰]
추진력 대단한 분입니다.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거제 거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만 25살, 최연소로 국회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짚어주시죠.
[인터뷰]
그 기록을 아직도 깬 사람이 없죠, 아마. 그걸 늘 굉장히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어요.
[앵커]
평소에도요?
[인터뷰]
재임 중에도 가끔 수석들과 저녁 드시고 하실 때 꼭 옛날 얘기하실 때 그것을 늘 상기시켜주시고 해서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계시다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민주화 그 후에 역정이라는 게 워낙 험난했죠. 초산테러도 받으시고. 그리고 가택연금에다 의원직 제명에다가.
그런데도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런 어려움을 뚫고 나간다는 게 쉽지 않았을 거거든요. 그런데 재임 중에도 모시고 일해 보니까 어떤 뜻밖의 일이 터져도 동요하시는 일이 없어요.
[앵커]
재임 시절 말씀을 하셨는데 92년부터 97년, 그러니까 93년 2월부터 임기가 시작이 됐는데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이 바로 있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도 굉장히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고요?
[인터뷰]
물론이죠. 항상 하나회 숙청과 금융실명제는 다른 사람 같으면 못했다고 생각을 하시는 거죠. 그런데 그것은 맞죠.
[앵커]
그 당시에 기자생활을 하고 계셨을 때입니까?
[인터뷰]
아닙니다. 저는 그때 다른 기관에 있었죠, 정부의. 그런데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분 같았으면 못했습니다.
[앵커]
그때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인터뷰]
그렇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특히 김 대통령께서는 하나회 해체를 굉장히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왜냐하면 다시는 군이 정치에 개입 못하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를 위해서는 굉장히 중요하죠.
[앵커]
하나회가 육사 출신으로 구성이 되고 정치뿐만 아니라 각계 인사권을 좌지우지하셨지 않습니까?
[인터뷰]
그렇습니다. 권력집단이었죠.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못하게 하겠다라는 결심으로 하신 것인데 막상 대통령에 당선된 분이 그것 하기가, 제가 보기에는 다른 사람은 못했을 것 같은데요.
[앵커]
쉽지 않았다라는 말씀이시고. 김영삼 대통령 때 재임 시절에 유독 큰 사건이 많았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도 있었고요.
[인터뷰]
성수대교, 삼풍백화점사고, 대구지하철 공사장 폭파 사건이 있었죠. 그런 일을 겪었는데 저도 성수대교 무너지고 삼풍백화점 무너진 날이 기억이 나요. 상당히 어이없어하시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냐.
[앵커]
아침 출근길에 성수대교가 무너지면서 버스가 밑으로 떨어지고.
[인터뷰]
그렇죠. 어린 학생들이 많이 희생이 됐습니다. 인명이 희생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중에 특히 어린 여학생들이 많이 희생된 것을 그렇게 가슴 아파 하시고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도 한편으로 어처구니 없어 하시면서도 어쨌든 잘 수습을 해야 되니까 바로 수습을 진두지휘하시다시피 하셨어요.
그때 보니까 역시 지도자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뜻밖에 당하더라도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한 게 참모들은 놀라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는데 딱 지도자라는 분이 산처럼 동요하지 않으면서 딱딱 지침을 주시니까 조직이 금방 안정이 되잖아요. 그것 보고 저도 참 놀랐습니다.
[앵커]
그런 사건사고와 함께 IMF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당시 그 부분이 정부가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지지율이 많이 떨어지는 데 한몫했거든요.
[인터뷰]
그렇죠. 저는 지금도 그 부분 때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업적이 객관적인 평가를 못받는다고 생각을 하죠. 시간이 많이 지나면 그럴 날이 올 거라고 믿지만. 사실 제가 모시고 일하면서도 그런 걱정을 좀 했었습니다.
뭐냐하면 상대적으로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전문성이 떨어지시는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관심의 정도가 덜하죠. 그러면 사실 경제분야의 고위공직자들이 더 열심히 경제를 챙겼어야 됩니다.
사람이라는 게 대통령이 예민한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느슨해지기 쉽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런 분위기를 보면서 저희 내부적으로 제가 문제제기를 했었습니다. 경제, 괜찮겠냐. 밖에 나가서 민간전문가들 얘기를 들어보면 굉장히 어려워질 거라고 하는데 대통령 보고 받으신 거 보면 다 장밋빛 보고만 받으시고. 이거 나중에 누가 책임지냐라고 그 당시에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앵커]
그당시 우리나라 경제에서 핏줄 역할을 하는 그런 금융쪽, 특히 종금사들이 해외에서 싼 이자로 돈을 많이 빌려오면서 환율이 급등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잖아요.
[인터뷰]
그걸 다 민간 전문가들이 많이 걱정을 했다고요. 저도 많이 들었어요. 저도 경제에 대해서 전문성이 없는 사람입니다마는. 그런데 보고받으시는 것을 배석해서 보면 한국 경제가 이미 연착륙을 했다. 세계각국이...
[앵커]
보고를 잘못 받으신 거네요.
[인터뷰]
이렇게 보고를 받으셨어요, 몇 달 전까지도. 그래서 제가 그것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수석들간에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이거 나중에 누가 책임지냐, 이러면 안 된다는 문제제기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워요. 그 부분이.
[앵커]
공보수석 시절 김 전 대통령과의 여러 기억이 많으실 텐데 어떤 에피소드가 가장 기억에 남으십니까?
[인터뷰]
저한테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남북정상회담 교섭하러 가기 전에 두 가지 지침을 주시더라고요. 김일성 주석은 서울 못 온다, 나는 평양 갈 수 있다. 그러니까 회담 장소를 서울로 너무 고집하지 마라. 장소를 고집해서 회담을 깨는 일은 없어야 한다라고 그 말씀을 하시고 나는 김일성 주석과 이번에 담판을 하고 올 텐데 김 주석이 노령이고 건강이 안 좋아서 두 차례 정도 회담을 하면 결론이 안 날 수도 있다.
그러면 내가 하루를 더 묵더라도 결론을 내고 올 테니까 회담 횟수로 못박지 마라. 딱 두 가지 지침을 주시는데 그때 말씀하실 때 표정이나 어조를 보면 단단한 결의와 각오를 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혼자 아, 내가 쓸데 없는 걱정을 했구나. 이 회담은 정말 성사를 시켜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앵커]
그리고 6년 뒤에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평양에서 갖게 됩니다. 두 김 전 대통령, 두 분의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인 동지였습니다마는 또 경쟁자였었고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통령 재직 시절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인터뷰]
괜찮았습니다. 영수회담이라고 그때 불렀죠. 여야 영수회담을 하러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가 청와대 공보수석할 때 2번 들어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김영삼 대통령한테 하시는 게 깍듯해요. 예절을 갖추는 게 저희가 놀랄 정도로. 저 양반이 저렇게까지 저 양반이 예절을 갖추느냐 할 정도로 예절을 갖추더라고요.
단독회담 하시지 않았어요. 김 대통령은 들어오실 때 항상 노란 봉투를 들고 들어오시거든요. 그러면 카메라가 찍으면 저 속에 뭐가 들었냐라고 얘기하고 그랬잖아요. 회담 끝나시고 나면 제가 들어가서 말씀하신 것을 제가 받아야 되니까 그러면 저한테 물어보세요.
발표를 어떻게 할래, 그래서 제 생각에는 김대중 총재께서 당사에 돌아가셔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사가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라.
[앵커]
요즘도 그렇게 하잖아요.
[인터뷰]
그래서 그렇게 했어요. 그랬는데 제가 나중에 통신기사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지 않은 대목들이 있거든요. 올라가서 확인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 맞습니까라고 그러면 아니, 내가 그렇게 얘기는 안 했는데. 그러면 시정할까요, 그러면 내버려 둬라. 야당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냐.
[앵커]
그런 얘기가 어떤 게 있었습니까?
[인터뷰]
대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구체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현안 문제에 대해서 대통령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지 않은데, 그래서 올라가서 여쭤보면 그렇게 얘기 안 했지만 야당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니냐, 내버려둬라.
[앵커]
통큰 면도 있으셨군요. 두 전직 대통령은 항상 라이벌로 많이 보여졌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전에 직접 병문안을 가셨잖아요.
[인터뷰]
두 분 관계가 김 전 대통령이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이런 관계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독특한 인연을 가진 분들이죠. 그래도 마지막에 가셔서 그렇게 푸신 것은 정말 제가 언론 보도를 보면서 흐뭇하더라고요.
[앵커]
후에 후일담을 그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병원 방문 얘기?
[인터뷰]
아니오, 못 들었습니다.
[앵커]
그리고 화면 잠깐 나왔었는데요. 3당 합당 때 어떻게 보면 그동안 야당 대표 또 야당 대통령 후보였어요. 그런데 3당 합당을 하면서 여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변신을 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상당히 많았는데 본인은 이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라고 얘기했었죠?
[인터뷰]
그렇죠. 왜 그러냐하면 민주화운동을 하신 분들 중에는 투항이다, 변절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 전 대통령 생각은 어쨌든 문민정부를 빨리 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죠.
현실적으로는 이 길밖에 없으니까 내가 그런 오해를 받고 욕을 먹더라도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문민정부를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하셔서 그 길로 가신 것이죠.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록들이 아직까지도 많이 회자가 되고 있는데 저희가 앞서 소개해 드렸지만 닭의 모가리를 비틀어도 새벽은 운다. 우째, 이런 일이. 확실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멘트들이 많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 기억에 남는 대사, 멘트가 있을까요?
[인터뷰]
저도 기억에 딱 남아 있는 게 그거예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앵커]
1979년이었죠.
[앵커]
국회의원에서 제명이 돼서.
[인터뷰]
그럼요. 그게 정말 명언이죠. 그대로 됐고.
[앵커]
평소에도 이렇게 확실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말을 많이 쓰셨는지.
[인터뷰]
그럼요. 김 대통령이 특출나신 게 사람의 심리를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세요. 그리고 한마디로 핵심을 찌르는 게 탁월하시더라고요. 제가 직접 경험을 했는데 제가 일이 격무이니까 피곤해 보이실 때가 있나 봐요,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가 나올 때. 집무실 방이 크거든요.
중간쯤 갔을 때 부르세요, 윤 수석, 제가 네 그러고 돌아서면 그 천진난만한 미소가 있습니다. 천진난만한 미소로 내가 너 고생하는 거 안다하는 표시를 딱 하신다고요. 그러면 참모 입장에서는 문을 닫고 나올 때 어깨의 피로가 싹 가십니다. 그것을 느껴요.
[앵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해외순방 같이 다니셨잖아요. 그런데 해외순방 가셔도 꼭 조깅을 하셨던 것 같아요.
[인터뷰]
반드시 새벽에 하시죠.
[앵커]
건강을 굉장히 챙기셨죠?
[인터뷰]
그럼요. 조깅을 안 하시면 일과를 시작을 안 하신다고 봐야 됐으니까요, 어디를 가시든지. 하여간 시차가 있어서 밤낮이 뒤집히는 미국에 가셔서도 도착하시자마자 조깅을 하신다는 거죠.그게 시차적응에 좋다고 하시면서. 미국 도착하시자마자 바로 조깅하신다고 하고 하셨어요.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 하면 차남이죠, 현철 씨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비리사건에 연루되면서 임기 말에 많은 비판도 있었는데.
[인터뷰]
그런데 사실은 결과적으로는 그게 대단한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됐는데. 한보사건 난 직후에는 마치 작은 자제가 모든 인사와 모든 이권에 개입했다는 식으로 국민에게 알려져 있었잖아요. 그것을 굉장히 답답하게 생각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를 보고 몇 번 그 말씀을 하시길래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죠. 저도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어차피 지금은 국민이 믿고 있으니까 그게 진실이라고 전제를 하시고 수습을 하셔야지 국민을 향해서 내 아들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면 타는 불에 기름 붓는 격이어서 그러시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나는데요 어쨌든 굉장히 안타까워하셨어요.
[앵커]
알겠습니다. 문민정부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 지내셨고 환경부 장관을 지낸 윤여준 전 의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인터뷰]
수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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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문민정부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 또 환경부장관을 지낸 윤여준 전 장관과 함께 자세한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오늘 아침 비보를 듣고 많이 놀라셨겠어요.
[인터뷰]
연세가 있으시고 또 최근에 병세가 안 좋으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마음속으로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마는 막상 새벽에 5시에 YTN 뉴스를 보고 알았어요. 깜짝 놀라고 좀 비감한 생각이 들더만요. 모시고 일할 때 생각이 많이 나고.
[앵커]
오늘 아침 빈소를 다녀오셨나요?
[인터뷰]
다녀왔습니다.
[앵커]
어땠습니까?
[인터뷰]
제가 갔을 때는 아직 빈소가 준비가 안 돼 있어서 조문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님이 오신 것을 보고 왔습니다.
[앵커]
만감이 교차하실 것 같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가깝게 지내셨고 공보수석을 몇 년 하셨었죠, 그때?
[인터뷰]
문민정부에 공보수석이 4명이 있었는데요. 제가 세 번째 거든요. 제가 2년 7개월을 했습니다.
[앵커]
거의 3년을 하셨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가깝게 여러 가지 업적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일을 같이 겪으셨다고 볼 수 있는데...
[인터뷰]
특히 김 대통령께서는 대변인의 역할을 굉장히 중시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일하는 여건을 많이 만들어주시고 또 대통령께서 공보수석의 역할을 중시하시는 게 주변에 알려지니까 주변에서도 일하는 것을 많이 도와주시고 해서 김 대통령 모시고 일한 2년 7개월에 저한테는 제 공직생활 중 가장 헌신적이고 가장 의욕적으로 일한 기간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하죠.
[앵커]
이렇게 문민정부에서 함께 일하셨는데 최근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 언제 또 뵈셨는지요?
[인터뷰]
뵌 지는 몇 년 됩니다. 왜 그러냐하면 편찮으신 초에는 많이 뵀는데요. 나중에는 당신의 편찮으신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시지 않는다고 하셔서 그래서 굳이 가 뵙는 것은 안 했습니다.
[앵커]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인터뷰]
특별한 인연은 없고요. 다만 야당 총재로 계실 때 제가 출입기자를 해서 그때부터 인연이 있었으나 그것은 잘 기억을 못하시는 것 같았고. 제가 안기부에서 언론특보를 하고 있었을 때 남북정상회담을 김일성 주석하고 하시기로 하셔서.
[앵커]
94년에 추진됐었죠?
[인터뷰]
판문점에서 교섭을 하게 되는데 우리 대표단이 3명이 있는데 수석대표가 이홍구 통일부총리, 또 한 분은 청와대 정종욱 외교안보수석 이렇게 저까지 셋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전날 청와대로 부르셔서 지침을 주시고 한 게 기억이 나는데 제가 그 회담에 가서 북한측 대표와 두 차례인가 회담을 별도로 했어요.
그것을 지켜보시고 나서 저를 굉장히 인상깊게 생각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공보수석으로 발탁된 게 아닌가, 그렇게 짐작을 합니다.
[앵커]
회담을 이끌어나가는 과정을 인상깊게 보셨다.
[인터뷰]
저는 남북대화를 해 본 사람이 아니고 상대방은 노련한 대화꾼이었는데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보시고서 상당히 잘한다고 생각을 하셨나 봐요.
[앵커]
마침 그 얘기가 나왔으니까 그 얘기 좀더 나눠보겠습니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결국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했잖아요.
[인터뷰]
그게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안타깝죠.
[앵커]
어디까지 진행이 됐습니까, 남북정상회담이.
[인터뷰]
선발대가 평양에 가서 회담 준비를 구체적으로 해야 하는데 선발대를 제가 인솔하기로 돼 있었거든요. 원래 다른 사람이 하게 되어 있는데 대통령께서 저한테 가라고 하셔서 제가 가기로 했었는데. 출발하기 일주일 전인가 김일성 주석이 돌아가셨죠.
[앵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도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하셨다고요.
[인터뷰]
물론이죠. 그 회담하러 가기 전 날 청와대에서 불러서 들어가셨을 때 그때 정부에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김일성 주석은 남북 간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고 김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분이니까 두 분이 회담하다 혹시 김 대통령께서 실수하면 어떡할까 그런 걱정을 했었는데.
저도 그것을 걱정한 사람 중에 하나였죠. 청와대 들어가서 말씀을 들어보니까 그건 불필요한 걱정이다, 나름대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셨고 아주 단단한 각오와 결의를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만약에 회담이 성사가 됐으면 남북관계는 큰 전환점을 맞았을 겁니다.
[앵커]
지금 화면에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나오는데요. 클린턴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이후 처음 한국을 찾았었죠. 그때 그 장면이 나오고 있고요. 의원님이 보시기에 김 전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인터뷰]
제가 보기에는 우선 굉장히 통이 크신 분이고요. 굉장히 담대하시고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직관력을 가진 분이에요.
[앵커]
정신력과 직관력. 사례를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예를 들면 무슨 일이 생겨서 판단하실 때 우리는 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점검하고 논리적으로 결론을 도출하잖아요. 그런데 김 전 대통령께서는 딱 대강의 상황만으로도 파악하고 바로 직감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한다, 이렇게. 이게 굉장히 무섭다고요.
직관력이라는 게 논리적인 경우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경우가 많거든요. 제가 걱정했던 것은 간혹 뵈면 대통령께서 자신의 직관력을 너무 과신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될 때가 있어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직관으로 판단하시되 최종 결정하시기 전에 논리적인 검토를 한번 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실수를 안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린 일이 있습니다.
[앵커]
밀어붙이는 원동력이 있던 대통령으로 기억하시는 것 같은데요.
[인터뷰]
추진력 대단한 분입니다.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거제 거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만 25살, 최연소로 국회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짚어주시죠.
[인터뷰]
그 기록을 아직도 깬 사람이 없죠, 아마. 그걸 늘 굉장히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어요.
[앵커]
평소에도요?
[인터뷰]
재임 중에도 가끔 수석들과 저녁 드시고 하실 때 꼭 옛날 얘기하실 때 그것을 늘 상기시켜주시고 해서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계시다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민주화 그 후에 역정이라는 게 워낙 험난했죠. 초산테러도 받으시고. 그리고 가택연금에다 의원직 제명에다가.
그런데도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런 어려움을 뚫고 나간다는 게 쉽지 않았을 거거든요. 그런데 재임 중에도 모시고 일해 보니까 어떤 뜻밖의 일이 터져도 동요하시는 일이 없어요.
[앵커]
재임 시절 말씀을 하셨는데 92년부터 97년, 그러니까 93년 2월부터 임기가 시작이 됐는데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이 바로 있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도 굉장히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고요?
[인터뷰]
물론이죠. 항상 하나회 숙청과 금융실명제는 다른 사람 같으면 못했다고 생각을 하시는 거죠. 그런데 그것은 맞죠.
[앵커]
그 당시에 기자생활을 하고 계셨을 때입니까?
[인터뷰]
아닙니다. 저는 그때 다른 기관에 있었죠, 정부의. 그런데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분 같았으면 못했습니다.
[앵커]
그때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인터뷰]
그렇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특히 김 대통령께서는 하나회 해체를 굉장히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왜냐하면 다시는 군이 정치에 개입 못하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를 위해서는 굉장히 중요하죠.
[앵커]
하나회가 육사 출신으로 구성이 되고 정치뿐만 아니라 각계 인사권을 좌지우지하셨지 않습니까?
[인터뷰]
그렇습니다. 권력집단이었죠.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못하게 하겠다라는 결심으로 하신 것인데 막상 대통령에 당선된 분이 그것 하기가, 제가 보기에는 다른 사람은 못했을 것 같은데요.
[앵커]
쉽지 않았다라는 말씀이시고. 김영삼 대통령 때 재임 시절에 유독 큰 사건이 많았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도 있었고요.
[인터뷰]
성수대교, 삼풍백화점사고, 대구지하철 공사장 폭파 사건이 있었죠. 그런 일을 겪었는데 저도 성수대교 무너지고 삼풍백화점 무너진 날이 기억이 나요. 상당히 어이없어하시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냐.
[앵커]
아침 출근길에 성수대교가 무너지면서 버스가 밑으로 떨어지고.
[인터뷰]
그렇죠. 어린 학생들이 많이 희생이 됐습니다. 인명이 희생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중에 특히 어린 여학생들이 많이 희생된 것을 그렇게 가슴 아파 하시고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도 한편으로 어처구니 없어 하시면서도 어쨌든 잘 수습을 해야 되니까 바로 수습을 진두지휘하시다시피 하셨어요.
그때 보니까 역시 지도자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뜻밖에 당하더라도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한 게 참모들은 놀라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는데 딱 지도자라는 분이 산처럼 동요하지 않으면서 딱딱 지침을 주시니까 조직이 금방 안정이 되잖아요. 그것 보고 저도 참 놀랐습니다.
[앵커]
그런 사건사고와 함께 IMF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당시 그 부분이 정부가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지지율이 많이 떨어지는 데 한몫했거든요.
[인터뷰]
그렇죠. 저는 지금도 그 부분 때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업적이 객관적인 평가를 못받는다고 생각을 하죠. 시간이 많이 지나면 그럴 날이 올 거라고 믿지만. 사실 제가 모시고 일하면서도 그런 걱정을 좀 했었습니다.
뭐냐하면 상대적으로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전문성이 떨어지시는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관심의 정도가 덜하죠. 그러면 사실 경제분야의 고위공직자들이 더 열심히 경제를 챙겼어야 됩니다.
사람이라는 게 대통령이 예민한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느슨해지기 쉽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런 분위기를 보면서 저희 내부적으로 제가 문제제기를 했었습니다. 경제, 괜찮겠냐. 밖에 나가서 민간전문가들 얘기를 들어보면 굉장히 어려워질 거라고 하는데 대통령 보고 받으신 거 보면 다 장밋빛 보고만 받으시고. 이거 나중에 누가 책임지냐라고 그 당시에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앵커]
그당시 우리나라 경제에서 핏줄 역할을 하는 그런 금융쪽, 특히 종금사들이 해외에서 싼 이자로 돈을 많이 빌려오면서 환율이 급등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잖아요.
[인터뷰]
그걸 다 민간 전문가들이 많이 걱정을 했다고요. 저도 많이 들었어요. 저도 경제에 대해서 전문성이 없는 사람입니다마는. 그런데 보고받으시는 것을 배석해서 보면 한국 경제가 이미 연착륙을 했다. 세계각국이...
[앵커]
보고를 잘못 받으신 거네요.
[인터뷰]
이렇게 보고를 받으셨어요, 몇 달 전까지도. 그래서 제가 그것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수석들간에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이거 나중에 누가 책임지냐, 이러면 안 된다는 문제제기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워요. 그 부분이.
[앵커]
공보수석 시절 김 전 대통령과의 여러 기억이 많으실 텐데 어떤 에피소드가 가장 기억에 남으십니까?
[인터뷰]
저한테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남북정상회담 교섭하러 가기 전에 두 가지 지침을 주시더라고요. 김일성 주석은 서울 못 온다, 나는 평양 갈 수 있다. 그러니까 회담 장소를 서울로 너무 고집하지 마라. 장소를 고집해서 회담을 깨는 일은 없어야 한다라고 그 말씀을 하시고 나는 김일성 주석과 이번에 담판을 하고 올 텐데 김 주석이 노령이고 건강이 안 좋아서 두 차례 정도 회담을 하면 결론이 안 날 수도 있다.
그러면 내가 하루를 더 묵더라도 결론을 내고 올 테니까 회담 횟수로 못박지 마라. 딱 두 가지 지침을 주시는데 그때 말씀하실 때 표정이나 어조를 보면 단단한 결의와 각오를 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혼자 아, 내가 쓸데 없는 걱정을 했구나. 이 회담은 정말 성사를 시켜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앵커]
그리고 6년 뒤에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평양에서 갖게 됩니다. 두 김 전 대통령, 두 분의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인 동지였습니다마는 또 경쟁자였었고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통령 재직 시절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인터뷰]
괜찮았습니다. 영수회담이라고 그때 불렀죠. 여야 영수회담을 하러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가 청와대 공보수석할 때 2번 들어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김영삼 대통령한테 하시는 게 깍듯해요. 예절을 갖추는 게 저희가 놀랄 정도로. 저 양반이 저렇게까지 저 양반이 예절을 갖추느냐 할 정도로 예절을 갖추더라고요.
단독회담 하시지 않았어요. 김 대통령은 들어오실 때 항상 노란 봉투를 들고 들어오시거든요. 그러면 카메라가 찍으면 저 속에 뭐가 들었냐라고 얘기하고 그랬잖아요. 회담 끝나시고 나면 제가 들어가서 말씀하신 것을 제가 받아야 되니까 그러면 저한테 물어보세요.
발표를 어떻게 할래, 그래서 제 생각에는 김대중 총재께서 당사에 돌아가셔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사가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라.
[앵커]
요즘도 그렇게 하잖아요.
[인터뷰]
그래서 그렇게 했어요. 그랬는데 제가 나중에 통신기사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지 않은 대목들이 있거든요. 올라가서 확인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 맞습니까라고 그러면 아니, 내가 그렇게 얘기는 안 했는데. 그러면 시정할까요, 그러면 내버려 둬라. 야당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냐.
[앵커]
그런 얘기가 어떤 게 있었습니까?
[인터뷰]
대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구체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현안 문제에 대해서 대통령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지 않은데, 그래서 올라가서 여쭤보면 그렇게 얘기 안 했지만 야당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니냐, 내버려둬라.
[앵커]
통큰 면도 있으셨군요. 두 전직 대통령은 항상 라이벌로 많이 보여졌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전에 직접 병문안을 가셨잖아요.
[인터뷰]
두 분 관계가 김 전 대통령이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이런 관계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독특한 인연을 가진 분들이죠. 그래도 마지막에 가셔서 그렇게 푸신 것은 정말 제가 언론 보도를 보면서 흐뭇하더라고요.
[앵커]
후에 후일담을 그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병원 방문 얘기?
[인터뷰]
아니오, 못 들었습니다.
[앵커]
그리고 화면 잠깐 나왔었는데요. 3당 합당 때 어떻게 보면 그동안 야당 대표 또 야당 대통령 후보였어요. 그런데 3당 합당을 하면서 여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변신을 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상당히 많았는데 본인은 이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라고 얘기했었죠?
[인터뷰]
그렇죠. 왜 그러냐하면 민주화운동을 하신 분들 중에는 투항이다, 변절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 전 대통령 생각은 어쨌든 문민정부를 빨리 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죠.
현실적으로는 이 길밖에 없으니까 내가 그런 오해를 받고 욕을 먹더라도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문민정부를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하셔서 그 길로 가신 것이죠.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록들이 아직까지도 많이 회자가 되고 있는데 저희가 앞서 소개해 드렸지만 닭의 모가리를 비틀어도 새벽은 운다. 우째, 이런 일이. 확실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멘트들이 많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 기억에 남는 대사, 멘트가 있을까요?
[인터뷰]
저도 기억에 딱 남아 있는 게 그거예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앵커]
1979년이었죠.
[앵커]
국회의원에서 제명이 돼서.
[인터뷰]
그럼요. 그게 정말 명언이죠. 그대로 됐고.
[앵커]
평소에도 이렇게 확실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말을 많이 쓰셨는지.
[인터뷰]
그럼요. 김 대통령이 특출나신 게 사람의 심리를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세요. 그리고 한마디로 핵심을 찌르는 게 탁월하시더라고요. 제가 직접 경험을 했는데 제가 일이 격무이니까 피곤해 보이실 때가 있나 봐요,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가 나올 때. 집무실 방이 크거든요.
중간쯤 갔을 때 부르세요, 윤 수석, 제가 네 그러고 돌아서면 그 천진난만한 미소가 있습니다. 천진난만한 미소로 내가 너 고생하는 거 안다하는 표시를 딱 하신다고요. 그러면 참모 입장에서는 문을 닫고 나올 때 어깨의 피로가 싹 가십니다. 그것을 느껴요.
[앵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해외순방 같이 다니셨잖아요. 그런데 해외순방 가셔도 꼭 조깅을 하셨던 것 같아요.
[인터뷰]
반드시 새벽에 하시죠.
[앵커]
건강을 굉장히 챙기셨죠?
[인터뷰]
그럼요. 조깅을 안 하시면 일과를 시작을 안 하신다고 봐야 됐으니까요, 어디를 가시든지. 하여간 시차가 있어서 밤낮이 뒤집히는 미국에 가셔서도 도착하시자마자 조깅을 하신다는 거죠.그게 시차적응에 좋다고 하시면서. 미국 도착하시자마자 바로 조깅하신다고 하고 하셨어요.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 하면 차남이죠, 현철 씨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비리사건에 연루되면서 임기 말에 많은 비판도 있었는데.
[인터뷰]
그런데 사실은 결과적으로는 그게 대단한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됐는데. 한보사건 난 직후에는 마치 작은 자제가 모든 인사와 모든 이권에 개입했다는 식으로 국민에게 알려져 있었잖아요. 그것을 굉장히 답답하게 생각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를 보고 몇 번 그 말씀을 하시길래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죠. 저도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어차피 지금은 국민이 믿고 있으니까 그게 진실이라고 전제를 하시고 수습을 하셔야지 국민을 향해서 내 아들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면 타는 불에 기름 붓는 격이어서 그러시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나는데요 어쨌든 굉장히 안타까워하셨어요.
[앵커]
알겠습니다. 문민정부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 지내셨고 환경부 장관을 지낸 윤여준 전 의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인터뷰]
수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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