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과 영향은?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과 영향은?

2015.11.22. 오전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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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렬, 용인대 교수 / 추은호, YTN 해설위원 (YS 정부 청와대 출입기자)

[앵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6년여 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불어 한국 현대 정치사의 '양김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어떤 인물이었고 김 전 대통령의 서거가 우리 정치사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YTN 객원 해설위원이신 최창렬 용인대 교수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추은호 해설위원도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청와대가 오전에 애도를 표할 예정입니다. 정치권에서도 잇따라 애도를 표하고 있죠?

[인터뷰]
YS,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저는 접하면서, 새벽에. 정말 이 시대가 한시대가 가고 있구나라고 느꼈어요. 그야말로 우리 사회에 지금도 여전히 진영화의 논리가 있는데 민주화와 산업화의 대립이라는 것들. 그것들이 또 어우러지면서 그것이 떠올려지면서 민주화의 큰 별은 갔구나. DJ는 6년 전에 돌아가셨고….

우리가 이른바 3김 시대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사실상 양김 시대였죠.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 조금 결을 달리했던 부분이 있으니까. 그래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면서 여러 가지 우리 한국 사회의 한 시대의 막을 내림과 동시에 지금의 갈등과 중첩되면서 이 시대가 정말로 화해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방금 화면에 2009년도 8월에 YS가 DJ에게 방문해서 YS가 이제는 화해할 때가 됐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사회가 이제는 한 시대가 가고 민주화와 산업화가 이제는 어떤 변증법적인 발전이 될 때가 됐다. 더 이상 대립하면 안 된다는 총평이라고 할까 그런 게 스쳐지나갔습니다.

[앵커]
화해할 때가 됐다. 지금 그렇게 평가를 하셨거든요. 추은호 해설위원께서는 지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가 우리 정치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거라고 보시나요?

[인터뷰]
일단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함으로써 DJ, YS라고 하는 시대가 다 끝났는데 그 시대가 이른바 87체제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현행 헌법이죠. 현행 헌법이라는 게 6. 10민주항쟁을 통해서 구축된 체제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당시에 노태우 전 대통령, 김영삼, 김대중 그다음에 김종필 이렇게.

물론 정치체제도 바뀌었지만 지역구도도 그때 고착화되고 한 측면이 있는데 이제 앞으로는 87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정치권에서 논의가 보다 구체화되지 않겠느냐. 또 이제는 나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 본격화 될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 최연소로 국회의원을 시작하셨는데요. 27살 때 처음 정치를 시작하셨다고 하셨죠.

[인터뷰]
그러니까 우리가 김영삼 전 대통령 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중학교 때부터 대통령이 꿈이었다라고 하는 분이잖아요. 그리고 만 25세, 27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고. 9선의 다선. 역대 최다 다선의원이죠. 그리고 여러 가지 기록이 많죠.

그리고 또 87년도도 그렇고 83년도에도 기억나는 게 그 당시 현안이라고 그래서 제가 기억이 납니다마는 현안이라고 신문에 계속 나왔어요. 현안이 뭔지 몰랐습니다, 그때는. 그때의 현안이라는 게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이었거든요. 23일 간의 단식이었어요. 계속 나오는 얘기입니다마는 일단 YS 하면 떠오르는 것이 대통령 되고 난 다음에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

그런데 하나회 척결 하면 떠오르는 게 그때 하나회라는 것은 다 아시다시피 군의 사조직이잖아요. 1989년도에 12. 12가 가능했던 거죠. 12. 12군사반란이 가능했던 게 군의 하나회라는 사조직으로 가능했던 것이거든요. 공수특전사령관 말을 듣지 않고 전두환 작전사령관 얘기를 들어서 일어났던 거죠, 12. 12군사반란이. 그런 하나회를 척결했다는 것이 전광석화였죠.

그런데 만약에 DJ 대통령이라면 가능했을까. 왜냐하면 DJ대통령은 여러 가지 생각이 많으시고 논리가 분명하고 이런 것에 비해서 YS대통령은 간단하고 명쾌하면서도 단순한 면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 일선에 의하면 당시에 육군참모총장이 육사 17기 김진영 장군이었는데 김진영 육참총장이 육군 본부에서 회의가 끝나고 나오면서 그런 보고를 받았다고 얘기를 했어요.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그런 식으로 어쨌든 한국 사회에 있어서 DJ도 마찬가지이기는 합니다마는 짧은 시간에 얘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일화를 많이 남긴 분이죠, 어록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고 떠오르는 것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워낙 유명한 말이고. 그리고 대도무문이라는 것. 큰 일에는 문이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호가 거산 아닙니까? 큰 산이라는 뜻이거든요. 그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공과 과를 흔히들 얘기를 하는데 저는 과보다 훨씬 공이 많다. 단지 야당에서 당시 1990년대에 합당을 했었잖아요. 그당시 노무현 의원이 거세게 반발하는 사진을 우리가 종종 봅니다. 그래서 야당에서는 그것을 당시 야합이다라고 얘기를 했었습니다마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사의 공과 과를 평가를 합니다마는 과보다는 역시 민주화에 끼친 커다란 공이 있다라고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를 해야 된다고 봅니다.

[인터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좌우명이 말씀하셨지만 대도무문입니다. 큰 길에는 문이 없다. 그러니까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도리, 정도에는 거침이 없다. 거침 없는 인생을 사신 분입니다, 그 좌우명처럼. 그러셨기 때문에 물론 대통령 임기 말에 차남 김현철 씨의 문제.

그리고 IMF 관리체제 문제 그리고 3당 합당에 관한 상반된 견해들. 이런 비판적인 시각이 틀림없이 있고 또 그것은 그것대로 판단해야 될 문제지만 사실 60년대, 70년대, 80년대 이 암울한 시대에 정치민주화를 위해서 23일간 단식하고 투쟁하고 정치테러 몇 번 당하고 한 그런 아픔들. 또 그러면서도 신념을 잃고 않고 타협하지 않고 독재정권과 싸웠던 그런 여정들은 정말 아무리 평가를 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앵커]
지금 거침없이 갔던 그런 인생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만큼 역경이 또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얘기할 만한 그런 고난이랄까요, 역경이랄까요. 뭐가 있을까요?

[인터뷰]
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연소 국회의원, 9선 국회의원이라는 아주 화려한 수식어도 있지만 신민당 대표 시절에, 79년이었죠. YH사건으로 인해서 제명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직을 또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가 문제가 돼서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한 유일한 사례를 기록한 적이 있고요. 그리고 80년도 신군부가 왔을 때는 정치 활동 규제로 인해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죠. 그래서 23일간 동안의 단식투쟁을 통해서 가택연금 해제 그리고 민주화추진협의회라는 단체를 발족시켜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킨 그런 장본인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앵커]
YH사건 같은 경우는 여공들을 도와준 사건이었고 뉴욕타임즈의 인터뷰 같은 경우에는 군부세력을 미국이 도와줘서는 안 된다, 이런 취지의 인터뷰를 한 거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야당 대표들 당연히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79년 유신독재 시절에서는 정권에서 그런 일들을 용납을 하지 않았던 일이죠.

[앵커]
그렇습니다. 아까 어록에 대해서도 말씀을 해 주셨어요. 대표적인 어떤 어록이 있을까요?

[인터뷰]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 있고 또 1990년도에 3당 합당. 1월 22일인데요. 정확하게. 제가 그 당시에 통일민주당 전문위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억을 하는데 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된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1987년도 9차 개헌으로 직선제가 성취가 됐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이 됐다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때 노태우 후보가 당선이 되고 그 당시 평화민주당이 탈당해서 나가지 않습니까? 결국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는 거죠. 그래서 표의 분열로 해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이 되는데 그때도 어쨌든 2위가 김영삼 후보였어요.

그런데 1988년도 13대 총선에서는 이른바 여소야대가 처음으로 형성이 됐는데 그때는 평화민주당이 제1야당이었습니다. 통일민주당 총재는 YS였는데. YS는 제2야당이었기 때문에 판단하기에 제2야당 가지고 4년 후에 대선에서 이기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결국은 3당 합당을 하게 됐는데.

[앵커]
교수님 잠시만요. 저희가 지금 들어온 속보 먼저 전해 드리겠습니다. 김무성 대표가 잠시 후 빈소에 찾겠다고 밝혔는데요. 오늘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주의 마음으로 빈소에 머물겠다고 밝혔습니다.

[앵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한 것으로 그래서 아까 서거 소식이 알려진 뒤에도 정치적인 대부다라고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었죠.

[인터뷰]
김영삼 전 대통령하고 김무성 대표의 부친하고도 관계가 있습니다. 김용주 씨가 1960년에 아마 국회의원이 돼서 그때 신민당인지 민주당인지 기억이 날 안 나지만 원내대표를 지내신 기억이 있는데 그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원내 부총무를 지낸 그런 인연이 있었고요.

그리고 민주화추진협의회 시절에 김무성 대표가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와서 같이 돕겠다. 그래서 정계에 입문하고. 그 이후로는 한 차례 공천을 못 받기는 했습니다마는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 시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일을 했었고 내무부 차관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발탁한 그런 인연이 있습니다.

[앵커]
그런데 김무성 대표 같은 경우에는 그러면 상도동계 막내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까요?

[인터뷰]
막내보다는 연차가 높을 거고요. 상도동계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인터뷰]
김무성 대표가 13대 총선에서 되고 난 다음에 제2 야당을 할 때 합당하기 전에 당의 총무국장을 했습니다, 김무성 대표가. 그래서 결국 YS가 발탁한 인물이죠.

그리고 아까 얘기가 끊겼는데 어록 얘기. 3당 합당 얘기까지 제가 했는데 3당 합당을 하면서 했던 얘기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했고 또 아주 유명한 얘기가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 그것 아주 유명한 얘기입니다. 일반 국민들도 많이 아는 얘기죠. 워낙 건강은 좋으시잖아요. 조깅을 오래 하셨고. 전에 한번 찾아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새벽, 아주 겨울이었는데 그때도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상도동 자택에 들어오셔서 만나뵀던 기억이 나는데 그 얘기는 결국은 머리는, 여러 인재들은 부하, 참모들을 둘 수 있으나 건강을 잃으면 정치고 아무도 못한다는 얘기여서 당연히 맞는 말이지만 이런 얘기 한마디한마디가 굉장히 함축적이잖아요. 머리에 딱딱 들어오는 정치적 얘기를 많이 했죠.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나와의 관계는 세계사 중에서도 특수한 관계다라는 얘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물론 여러 정치인들이 여러 어록을 보면 훌륭한 말씀들 많이 했겠죠. 유난히 YS는 귀에 딱딱 꽂히는 얘기를 많이 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인터뷰]
인사는 만사다, 이 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했던 말입니다.

[앵커]
그것은 언제 했던 얘기입니까?

[인터뷰]
언제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납니다마는 장관이나 인사할 때 사람이 시스템을 움직이다, 이런 신념을 갖고 계신, 그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앵커]
당시에 출입기자 하셨잖아요. 당시에 옆에서 봤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나요? 인상 깊었던 상황이라든가 이런 게 있으십니까?

[인터뷰]
저는 김영삼 전 대통령 초기에는 청와대 출입을 안 했었고 중후반기에 특히 역사바로세우기를 하고 그다음에 한보사태 때 정권교체기에 같이 있었는데 어떤 분이냐면 제가 취재기자로서 근접하지는 못하지만 나이 많으시면서도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참 편하게 만드시는 그런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을 많이 보이셨고요.

특히 어린이날 같은 경우에는 어린이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녹지원에서 부인 손명순 여사와 같이 하기도 하셨고. 하지만 임기 마지막에 아들 문제로 힘들어하셨을 때는 머리도 초기에는 염색을 하시다가 후반기에는 염색도 안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주 힘들어하셨던 모습들을 그때 많이 보여주셨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앵커]
지금 화면 보시면 서울대병원의 장례식장 모습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아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소식 전해 드렸는데 상주의 마음으로 빈소에 머물겠다고 얘기했다는 소식 전해 드렸는데 잠시 뒤에 조문 예정이고 잠시 뒤에 조문 예정이고 3김시대의 한 축이었죠. 김종필 전 총리도 조문을 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잠시 뒤에 조문을 하게 되면 관련 얘기를 계속 전달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3김 시대라고 얘기를 했었죠. 김종필 전 총리까지 해서. 그런데 이제는 대부분 양김시대다, 이렇게 얘기를 하다가 양김시대가 끝났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3김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야 될까요?

[인터뷰]
세 분이 협력하기도 하고 경쟁도 하셨죠. 김종필 전 총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자당 합당 과정에서 또 같이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협력을 하다가 또 어느 순간에서는 김종필 전 총리께서 탈당을 하셔서 자민련을 만들어서 또 경쟁 관계가 됐고. 또 그 이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하고 DJP연합을 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또 협력하는 관계, 이런 식으로 세 분이서 협력과 또 대립 이런 관계들을 끊임없이 지탱을 해 오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현대 정치사의 모습이었고 과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지금 3김 간의 협력과 그리고 서로 등을 돌렸던, 견제했던 그런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하셨는데.

[인터뷰]
글쎄요, 3김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제가 앞서 잠깐 언급했습니다마는 JP는 사실 5. 16쿠데타의 주역이었잖아요. DJ, YS와는 결을 달리했던 인사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우리가 주로 보수주의라고 보는데 이념적인 부분을 떠나서.

[앵커]
지금 잠시 화면을 보시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빈소에 도착을 했습니다.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김무성 대표가 찾은 모습입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이룬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정치의 문민정부를 여신 대통령이셨고. 대통령 재임 중에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위대한 업적을 만드신 시대의 영웅이셨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저는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분 가시는 길에 빈소를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상주 역할을 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앵커]
김무성 대표가 지금 빈소로 들어가는 모습 함께 보셨고요. 민주화를 이루셨고 그리고 개혁을 이뤘다. 가슴이 아프다. 이런 얘기를 했거든요. 문민정부를 연 대통령이다. 위대한 업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본인은 정치적 아들이다. 아버지를 잃은 마음이라고 표현을 해 주셨습니다.

[인터뷰]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죠. 정치적인 아들이다.

[인터뷰]
그렇죠. 아무리 말씀을 해도 지나치지 않죠, 김무성 대표로서는. 정치적으로 발탁을 했던 분이 바로 YS였고. 그래서 YS, DJ라고 제가 자꾸 얘기를 드리는데 우리나라 정치사에 이른바 이니셜을 썼던 분들이 YS, DJ거든요. 그게 지금 상당히 일반화됐죠, JP도 쓰는데 YS 대통령이 발탁한 인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앵커]
어떤 인물들이 있습니까?

[인터뷰]
일단 대통령이 된 인물 중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13대 때 국회의원 초선이었죠. 이인제 의원 같은 경우는 YS가 깜짝 놀랄 인물이 나올 거다라는 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인제 의원이었고 그때 노동부 장관하고 그랬었죠. 그리고 워낙 많아서 거론하기도 힘들어요.

사실 제가 언뜻 생각나는 게 1993년에 그 당시 손학규 당시 서강대 교수를 발탁했던 것도 YS였고요. 박종오 의원이 보궐선거에 부산 사하에 나왔던 것도 기억이 나고. 서청원 현재 새누리당 최고위원도 YS맨이에요.

지금 우리가 여야를 막론하고 이른바 우리가 상교동계, 동교동계 이렇게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YS와 DJ가 우리나라의 정치적 큰 거목들이었어요. 제가 또 말씀이 끊겼는데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뤄낸 데 있어서 두 분은 경쟁과 협력 관계를 계속 되풀이해 왔던 것이고 87년도에 직전세를 쟁취하고 난 다음에 결국은 한 분이 나가야 되는데 그게 안 되서 후보 단일화를 못 해서 정권교체가 미뤄졌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봐서 YS가 우리 사회에 남긴 족적이라고 그럴까. 그리고 우리 시대 현대사의 여러 가지 굴종도 있었고 영광도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에 YS, DJ가 있다. JP도 마찬가지로 5. 16이라는 그런 정치적 사건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 3김시대라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전무후무한 다시는 그런 정치인들이 나오기 어렵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앵커]
지금 아까 정치권에 영입한 인물들에 대해서 얘기를 했었는데. 김문수 전 경기지사라든가 이재오 의원 이런 분들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영입을 한 경우라고 볼 수 있나요?

[인터뷰]
그분들은 원래 민중당 출신 인사들입니다. 민중당 출신으로써 원외정당에서 활동을 하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 신한국당이 민중당 인사들을 흡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재오 의원, 김문수 전 지사 등 이런 분들이 신한국당에 입당을 하면서 어떻게 보면 보수정당에 나름대로 진보의 색깔을 갖춘, 이념의 스펙트럼을 넓힌 그런 역할들을 많이 하신 분들이죠. 그리고 영입한 인사 중에서 어떻게 보면 이명박 전 대통령도 어떻게 보면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 인해서 정계에 입문한 걸로 보시면 됩니다.

뭐냐하면 정주영, 돌아가신 현대그룹 회장께서 통일국민당이라는 정당을 만드셨거든요.
그래서 활동을 할 때 그때 민자당 비례대표로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회장을 스카우트해서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데뷔시킨 그런 인연도 있습니다.

[앵커]
그뿐만 아니고 당시 대통령이 되고 나서 김남조 시인이나 박노해 시인 같은 분도 복권을 시켰다, 이런 부분에서 또 민주화의 의미를 찾는 분도 있더라고요.

[인터뷰]
집권 이후 제일 먼저 한 일이 기억나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인모 씨라고 비전향 장기수를 먼저 북한으로 보낸 그런 일도 기억이 나고요. 초기에는 높은 지지율을 배경으로 과감하게 광폭적으로 정치활동을 폭넓게 하신 그런 기억이 납니다.

[인터뷰]
그 말씀하시니까 생각나는 게 당시에 조선총독부 건물 있잖아요. 우리 어릴 때 중앙청이라고 했죠. 효자동 앞에 있는 거. 정부 수립도 거기서 했던 건데 그 건물을 철폐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논란이 많았어요. 건축학계에서는 이것을 건축양식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고 정치권이나 시민사회에서는 일제의 잔재니까 없애야 된다는 그런 주장과 함께 역사니까 남겨야 한다, 이런 얘기도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고민하지 않고. 그런 조선총독부 건출을 철폐하는 것은 이 말 저 말 다 들으면 실행에 옮기기 힘든데 하나회 척결도 그랬고 금융실명제도 그랬고 그것을 드러냈거든요. 9시 뉴스에 나오면서 굉장한 박수를 받았어요.

그리고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잖아요. 거기 청와대 주변 안가를 다 철폐하고 안가 부수는 게 화면에 나오고 그랬는데 그때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80%가 올라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중에 96년도 말에 노동법 날치기가 되고 그리고 97년도에 아들 비리 터지고 한보비리 터지고 한보 청문회하면서 임기 말기에 이른바 레임덕으로 갔고 연말에 IMF 오고 이랬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인기가 대단했던 대통령이었는데 나중에는 한국 대통령들의 숙명이었던 레임덕을 피할 수 없었던 대통령이었는데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임기 내에 취했던 개혁 정책들은 어느 대통령도 흉내내기 어려운 개혁 정책들이 아니었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관련해서 두 분 모시고 얘기 나눠 봤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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