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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태, 통일연구원 박사 / 김주환,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
[앵커]
제20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이 시각 현재 마지막 작별상봉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김주환 정치안보 전문기자와 함께 자세한 내용 들어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기자]
안녕하세요.
[앵커]
작별 상봉이 지금 진행 중인데 11시 반까지죠?
[기자]
네, 30분 남았죠. 30분 후면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번이 북측 가족들을 만나기 때문에 1차 때와는 달리 우리 남측 상봉단들이 먼저 버스에 타서 출발하는 형태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한 5시쯤 속초로 귀환하는 그런 수순입니다.
[앵커]
어쨌든 오늘 공식 일정은 11시 반이 마지막이 되는 거죠. 지금 작별 상봉의 화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족의 손을 1초라도 더 잡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노모의 모습도 보이고 있습니다.
[기자]
화면을 봐야 될 것 같은데요. 또 테이블 번호를 봐야 될 것 같은데요.
[앵커]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와...
[기자]
북측에 남겨둔 큰딸 내외를 만났죠. 아마 김월순 할머니로 보이는데요. 6.25 때 둘째딸만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왔다가 북측 가족들이 살아 있는 걸, 생사 여부를 몰랐다가 이번에 다시 확인이 돼서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에 만나는 거죠.
이번에 안타까웠던 것은 그러니까 가슴을 찡하게 했던 것은 어제 같은 경우는 북측의 누나와 손수건을 바꾸자. 그래서 누나 채취라도 맡게 손수건을 바꾸자 했었고. 그리고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43년 전에 납북됐던 오대양호의 정건목 씨 같은 경우에는 첫날 상봉할 때는 북측에서 나올 때 안경을 썼어요.
그런데 그다음 날 어제 나올 때는 안경이 바뀌었어요. 사연을 들어보니까 남측에서 누나가 준 안경인데 참 행운이었는지 도수도 맞더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바뀐 안경을 쓰고 나오기도 했죠.
[앵커]
지금 나오고 있습니다. 이복순 할머니, 아들 정건목 씨를 43년 만에 만났습니다.
[기자]
정건목 씨가 납북 어부였는데 43년 만에 어머니를 보자모자 어린 아이처럼 20살 초반의 아들로 돌아가서 엄마라고 소리를 외쳐서 참 주변을 아프게 했죠.
[앵커]
어머니의 눈물은 끊이지 않습니다. 이제 만남의 시간이 30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기자]
옆에 있는...
[앵커]
12번, 테이블 번호로 저희가 지금 소개해 드리고 있는데요. 김우택 할아버지입니다. 조카와 조카사위를 만났는데요. 전쟁 때 둘째형이 인민군으로 끌려가서 2010년 북한에서 숨졌고 조카 부부를 이번에 상봉을 했습니다.
[기자]
11번 테이블도 마찬가지죠. 김우종 할머니는 동생, 북에서 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내려왔다가 막내 여동생을 몰랐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5남 1녀 중에서 막내라고 해서 했는데, 이번 2차 상봉단의 특징은 북측 가족들이 남쪽에 있는 친인척들을 찾는 이런 형태이기 때문에 이렇게 상봉단에서 만나게 됐죠.
그리고 또 안타까웠던 것이 우리가 보도를 몇 차례 해 드렸습니다마는 98살 구상연 할아버지. 두고 온 딸들에게 꽃신을 주겠다고 꽃신을 준비해 갔는데 꽃신을 신어봤는지 안 신어봤는지 한편으로는 들려오는 이야기는 신어보지는 못했다, 이런 소식도 들려오고 있고요. 좀 안타까움이 있고.
그리고 또 하나 눈물겨웠던 것은 김월순 할머니가 북측에 72살 된 아들을 어제 오전에는 알아봤어요. 어제 오전에는 알아보다가 오후에는 누구시냐고 해서, 할머니가 연세가 있으시니까 치매가 좀 있으시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간헐적으로 이렇게 당신 누구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주변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기도 했고요.
지금 이석주 할아버지. 남측에서 최고령자 두 분이 올라왔는데 어제 건강이 나빠서 단체상봉에는 불참을 했었는데 오늘 못 보면 아주 못 본다. 그래서 의료진들이 괜찮겠느냐고 염려를 했다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만나겠다라고 해서 지금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이 나오죠.
이분이 정건목 씨입니다. 43년 만에, 오대양... 안경이 바뀐 게 확인이 되죠. 남측에서 간 누나가 안경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도수가 맞아서 다행이다라고 해서 얘기를 했죠. 일단 작별상봉이 25분 남았는데 이제 끝나면 개별 중식을 합니다. 그리고 짐을 꾸리고요. 그래서 남측으로 먼저 출발해서 돌아오고 이런 형태가 되겠습니다.
[앵커]
화면에도 보입니다마는 이번에 가족들의 고령화가 굉장히 심해서 걱정이 됐었는데 진행되는 동안 건강에서 큰 이상이 있는 분은 안 계셨죠?
[기자]
처음에 두 분이 건강상이 염려가 됐는데 업혀서라도 가겠다. 그래서 구급차를 타고 가신 분들도 있어요. 그래서 갔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고요. 어제 개별상봉이나 단체상봉을 했을 때 워낙 고령이시다 보니까 좀 과로를 하셨는지 자주 객실에 들어가서 누워서 피로를 푸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하고요.
지금 사실 이번에 북한이 역시 국군포로 특수 이산가족... 저분은 그나마 72년도 오대양호 어선으로 있다가 납북됐는데 1975년도 강원도 고성 동명호 납북사건 등 그쪽 분들은 우리 정부가 비공식으로 해서 이렇게 요청을 하는데 거기도 한 30여 명이 생존해 있는 걸로 전해지고 있는데요. 한 번도 북측이 그분에 대해서 가타부타 언급을 안 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지금 과거 국군포로 같은 경우에는 북에 생존해 계신 분이 추정컨대 한 700여 분 정도 살아 있는 것으로 이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앵커]
현장화면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1분 1초가 참 아쉬운 그런 현장입니다. 가족들이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21번 가족입니다. 김준겸 씨, 동생과 조카를 만났습니다. 전쟁 중에 잠깐 피난하려다가 가족과 영영 헤어졌다고 하는데요.
[기자]
지금 전쟁 중에 잠깐씩 헤어졌었던. 결과론적으로는 한국전쟁이 3년이 갔습니다마는 저때 개념으로는 이른바 어르신들 표현으로 하면 전쟁이라는 표현보다는 난리가 났다. 그래서 일주일, 3일, 이렇게만 갔다 오면 모든 게 해결되는 줄 알았던 분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갑자기 저런 일들이 벌어지니까 가족 중 몇 사람하고 헤어져서 그것이 이제 65년이라는 세월을 지속적으로 지내왔고요. 이런 부분이 굉장히 길었죠. 그러니까 사연들 중에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잠시 갔다 오겠다고 했던 이런 분들이 굉장히 많죠.
[앵커]
작별상봉 후에는 북한 가족이 남한 가족을 배웅을 하게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나와 계십니다. 지금 작별상봉이 계속 진행 중인데 이산가족 상봉 행사 이후에 후유증을 호소하는 분들이 조금 많다고 해요, 어떻습니까?
[인터뷰]
그렇죠. 사실은 이게 한 60여 년 정도 못 보다가 갑자기 이렇게 보게 되는데 보는 것만 해도 굉장히 감격적인 그런 것이고, 굉장히 놀랄 만한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한 12시간 정도 그렇게 잠깐 만나보고, 그 이후에 여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제는 앞으로 더 이상 못 볼 수도 있다는 희망이 사실 사라졌다는 그런 측면이 사실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분들은 안 본 것이 더 좋았지 않느냐, 그런 분들까지 있다는 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또 이런 분들 이외에도 이 짧은 만남 그 자체는 굉장히 충격적으로 와 닿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죠. 그렇다 보니까 그야말로 울화증이 생긴다든가 여기에 대해서 희망을 잃어버리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는 그런 측면도 사실 있고 하니까, 사실 이 문제가 심각하죠.
그래서 예를 들어서 북쪽 이산가족에 대한 확인한 상황이 아닙니까. 그러면 확인을 했으면 그 이후에는 연락이라도 서신이 됐든 화상상봉이 됐든 아니면 다른 형태로 됐든 연락이라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그 채널은 만들어줘야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러한 여러 가지 단절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조치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
대한적십자 통계를 봐도 지금 말씀하셨습니다마는 후유증이 너무 힘들다라는 게 기쁘다보다 사실 좀 많습니다. 정확한 퍼센트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마는 좀 많습니다. 지금 말씀하셨다시피 사실 실향민들 대부분이 고향에 가겠다라는 일념 하나, 가족들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해 가지고 북쪽이 고향인 분들은 남측에 사실은 오랫동안 살았습니다마는 객지였거든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살았는데 지금 모든 게 만나고 나면 이제 희망도 사라지고 무너져내리는 그런 심정으로 살기 때문에요.
그리고 제 주변에도 저렇게 해서 돌아가신 분들이 사실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고통을, 그 사무치는 그리움을 이겨내지 못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술을 많이 드시는 분들도 사실 있었어요. 그래서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도 많았고요.
다시 보입니다마는 72년도 오대양 선원, 아들, 정건목 씨가 벌써 60대 중반이 돼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피붙이와 헤어져야 되는 그런 순간인데요. 그러니까 한 20분 남았죠. 20분 후면 헤어져야 되는 그런 시간이 됩니다.
[앵커]
납북 당시 21살이었던 아들이 60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났는데 아들이 계속해서 어머니를 달래고 있습니다.
[기자]
지금 18번에 김인성 할머니가 58살, 아주 어렸던 아들과 조카 이렇게 상봉을 하는 만남이 되겠죠. 아들이 아니라 동생입니다. 이때 대동강을 건너려다 실패했다는 사연이 나오자 이제 대동강이건 한강이건 대동강 같은 경우에는 이제 폭격을 해가지고 우리가 그 유명한 사진이 있습니다. 퓰리처상까지 받은 겨울에 대동강 철교를 내달려서 내려온 그런 사진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그때 아마 대동강을 넘어서 황해도를 거쳐서 남쪽으로 피난왔던... 그래서 좀 특징이 있습니다.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그 특징이 뭐냐하면 함경도 또는 함경남도 원산, 청진이었던 분들은 과거 우리가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봤습니다마는 배를 타고 저 부산이나 거제도로 갔고요. 이쪽 내륙에 있던 분들은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내륙으로 피난하러 왔다가 잠시 일주일이면 이 전쟁이 끝날 줄 알고 원거리도 못 가고 있다가 다시 저렇게 오랫동안 작별을 해야 했던 사람들, 그런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조카며느리죠. 그리고 또 안타까웠던 사연은 남측에 이석주 할아버지죠. 아들을 위해서 양복을 맞췄었어요. 양복을 맞춰서 아들을 주겠다고 하셔서 만났는데 왜 이렇게 말랐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취재진들이 아들 치수를 아느냐 그러니까 내 아들인데 내가 왜 모르겠느냐고 해서 그 양복이 전달됐는지 그리고 남측에서 올라간 아버지가 사준 양복을 입은 아들이 그 양복을 입고 나왔는지 그건 아직 화면상으로 나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앵커]
지금 작별상봉, 이제 한 17분 정도 남겨두고 있습니다. 박사님, 앞서서 이산가족 상봉의 후유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러면서 정례화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는 계속해서 나왔는데요. 이번에 조금 의미 있는 부분이 북한 적십자중앙위원회 위원장이 조금 긍정적인 전망을 했어요.
[인터뷰]
항상 북측에서는 마칠 때쯤 되면 그런 데 대한 언지를 사실 하기는 합니다마는. 이번 경우는 좀 색다른 측면이 조금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이전에 8. 25 합의가 있거든요. 그 고위급회담의 합의의 중요한 사안으로써 그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한 항으로 넣어놨죠. 그것을 이제 1차적으로 이행한 게 이번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거기에 합의한 그 내용들은 1차 상봉에 목적을 둔 거라기보다는 앞으로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인도적 문제를 남북한이 서로 머리를 맞대서 해결을 한다 하는 그런 넓은 의미의 뜻을 나름대로 갖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이것에 이어서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보다 정례화하는 문제들, 이런 것들이 적극적으로 논의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볼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자기들이 여기에 대한 가능성을 어느 정도 비추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실질적인 의미가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기자]
그런데 사실 북측 리충복 위원장이 밝혔습니다. 서신교환 이 문제는 사실 처음이 아니고요. 과거 2000년 6. 15남북공동성명 이후에 했었어요. 한 차례 했고 2003년도에 남북관계가 핵문제라든가 악화되니까 북측이 일방적으로 끊었거든요.
이번에 결국 신뢰문제인데요. 서신 교환이라든가 이런 약속들을 또 이산가족 정례화라든가 특별상봉을 하자라든가 이런 부분은 과거 남과 북이 원칙적이나마 이렇게 합의를 한 적이 수차례 있었어요. 굉장히 많이 있었죠. 그랬는데 결국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먼저 신뢰를 깨고 약속을 안 지키는 북측이 그랬거든요.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 때문에요.
이 문제는 박사님께서 말씀하셨지만 탈정치 영역이고 인도주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거와 조금 분리해서 북측도 대응해 줬으면 하는... 저런 아픔이 없을 테고 그리고 남은 이산가족들이 한 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리라고 봅니다.
[인터뷰]
거기에 대해서 지금 이산가족 상봉행사 이 자체를 좀더 정례화하고 또 여러 가지 서신교환이라든가 이런 것을 더 확대해서 이런 아픔을 덜어준다고 하는 그런 본격적인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단 남북한의 관계개선이 돼야 됩니다.
그게 바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화도 이뤄지고 또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실상 지금 이산가족 상봉을 하기 위한 면회소 자체가 사실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강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산에 뒀다는 거는 여기에 정례적이고 상시적으로 뭔가 할 수 있도록 하는 의미를 담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앞으로 북한이 소위 금강산 관광사업을 재개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먼저 만들 필요가 있지 않느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박왕자 씨 사건이라든가 이런 것에 대한 어떤 사과를 한다든가 그리고 또 재발방지를 보다 더 공식적으로 한다든가, 이런 것을 기초로 해서 남북한이 최소한 금강산 관광사업만 또 재개된다고 한다면 사실은 그러면 1차적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면회소가 또 상시적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거든요.
그러면 거기에 또 기초를 해서 보다 더 상봉의 정례화라든가 이런 것들이 급물살을 탈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듭니다.
[앵커]
앞서서 이산가족 문제는 정치적인 논리와는 분리해서 다뤄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그런 같은 맥락에서 국제적으로 공론화해야 되는 건 아닌가요?
[기자]
전 단계로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볼 필요가 있는데요. 우리가 2009년도에 이산가족 관련 특별법을 제정해 놓은 게 있어요. 남북 이산가족 생사확인 및 교류 촉진에 관한 법률입니다. 그래서 이거에 대해서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고. 그리고 지금 국제적으로 공론화해야 된다는 의미는 지금 행사 주관은 적십자사가 하고 있거든요. 국제적십자사 산하 북한 적십자사 남한적십자사. 물론 정부 당국이 지원하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과거에 국제적십자사에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남과 북이 서로 협의, 합의하면 도와줄 용의가 있다.
1차적으로 서신교환이 되겠죠. 국제적십자사에 국제시민국이라는 기구가 있고, 다른 나라도 이산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이산이라는 것이 전쟁통에 헤어진 그런 분리된 가족이라는 개념 정리가 확고히 돼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UN이라든가 이런 데서 해야 된다. 왜냐하면 그 근거 중 하나는 북한도 제네바협정, 그러니까 세계인권선언, 이런 국제국 규약에 이미 가입이 되어 있기 때문에요.
그러면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북측으로서는 이른바 불량국가 이미지도 어느 정도 탈색할 수 있는 그런 부분도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필요하다라고 봅니다.
[앵커]
어쨌든 이산가족 상봉행사로 남북관계에 조금이나마 물꼬는 트인 것 같아요. 앞으로 남북관계가 충분히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보시나요?
[인터뷰]
지금 남은 건 남북한 개선관계밖에 없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북측의 김정은 체제 하에서도 여러 가지 자기들이 3차례에 걸친 핵실험도 했고 로켓 발사도 했고, 이번에 당 창건 70주년 기념일 이전에 로켓 발사를 할 것이다, 말 것이다 하는데 사실는 그걸 하지 않았거나 혹은 못했거나 일단 없는 사항이 됐죠.
어쨌든 김정은 체제에 들어와서 김정은 체제의 특성을 크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핵과 경제 병진노선을 제시했거든요. 그러면 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기들이 자신감을 만방에 표출했다. 이렇게 하면 여기에 근거를 해 가지고 그다음에 경제노선으로 가게 된다. 이 경제노선에 있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교류협력, 경제적인 교류협력, 혹은 남한으로부터 경제적 지원 이런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봤을 때는 북측에 있어서도 이제 남북한 관계 개선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이게 하나 있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가 하나 있는 게 김정은 체제가 사실은 갑작스럽게 들어온 거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까 체제의 정통성 문제가 많이 생기고 또 이 정통성에 대해서 각계 외부에서 사실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는 거죠, 북측에. 그렇다면 부정적인 평가는 김정은 체제를 훼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것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도 바깥으로부터의 어떤 김정은 체제의 부정적 평가, 이것을 또 완화해야 된다는 거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남북한의 관계개선에 의해서 그게 우호적 환경을 앞장서서 만들어야 된다. 이게 바로 첫 표출이 이산가족 상봉행사라고 볼 수 있고.
그다음에 앞으로 고위급 당국자 회담 이게 8. 25 합의에 들어가 있는 거니까 고위급 당국자회담을 한다든가, 이것을 기초로 해서 지금 개성공단을 보다 더 확장, 발전시킨다든가 그다음에 또 금강산 관광사업 이것을 재개를 하는 것, 그것을 한다든가. 여타 이외에 민간 차원의 교류라든가 이런 것들을 확대한다든가 이런 것으로 연결시켜나가고자 할 겁니다.
여기에는 우리 정부가 충분히... 사실은 원칙과 대화라고 하는 이런 투 트랙을 지속적으로 견지해 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어느 정도 여기에 균형을 맞출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그렇다고 하면 관계개선은 사실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앵커]
이제 작별상봉 10여 분 정도 남았습니다. 이게 마무리 되면 이번 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모두 마무리가 됩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잠시 뒤 12시부터 이어지는 뉴스특보에서 좀더 자세히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두 분의 말씀은 여기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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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제20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이 시각 현재 마지막 작별상봉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김주환 정치안보 전문기자와 함께 자세한 내용 들어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기자]
안녕하세요.
[앵커]
작별 상봉이 지금 진행 중인데 11시 반까지죠?
[기자]
네, 30분 남았죠. 30분 후면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번이 북측 가족들을 만나기 때문에 1차 때와는 달리 우리 남측 상봉단들이 먼저 버스에 타서 출발하는 형태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한 5시쯤 속초로 귀환하는 그런 수순입니다.
[앵커]
어쨌든 오늘 공식 일정은 11시 반이 마지막이 되는 거죠. 지금 작별 상봉의 화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족의 손을 1초라도 더 잡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노모의 모습도 보이고 있습니다.
[기자]
화면을 봐야 될 것 같은데요. 또 테이블 번호를 봐야 될 것 같은데요.
[앵커]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와...
[기자]
북측에 남겨둔 큰딸 내외를 만났죠. 아마 김월순 할머니로 보이는데요. 6.25 때 둘째딸만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왔다가 북측 가족들이 살아 있는 걸, 생사 여부를 몰랐다가 이번에 다시 확인이 돼서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에 만나는 거죠.
이번에 안타까웠던 것은 그러니까 가슴을 찡하게 했던 것은 어제 같은 경우는 북측의 누나와 손수건을 바꾸자. 그래서 누나 채취라도 맡게 손수건을 바꾸자 했었고. 그리고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43년 전에 납북됐던 오대양호의 정건목 씨 같은 경우에는 첫날 상봉할 때는 북측에서 나올 때 안경을 썼어요.
그런데 그다음 날 어제 나올 때는 안경이 바뀌었어요. 사연을 들어보니까 남측에서 누나가 준 안경인데 참 행운이었는지 도수도 맞더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바뀐 안경을 쓰고 나오기도 했죠.
[앵커]
지금 나오고 있습니다. 이복순 할머니, 아들 정건목 씨를 43년 만에 만났습니다.
[기자]
정건목 씨가 납북 어부였는데 43년 만에 어머니를 보자모자 어린 아이처럼 20살 초반의 아들로 돌아가서 엄마라고 소리를 외쳐서 참 주변을 아프게 했죠.
[앵커]
어머니의 눈물은 끊이지 않습니다. 이제 만남의 시간이 30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기자]
옆에 있는...
[앵커]
12번, 테이블 번호로 저희가 지금 소개해 드리고 있는데요. 김우택 할아버지입니다. 조카와 조카사위를 만났는데요. 전쟁 때 둘째형이 인민군으로 끌려가서 2010년 북한에서 숨졌고 조카 부부를 이번에 상봉을 했습니다.
[기자]
11번 테이블도 마찬가지죠. 김우종 할머니는 동생, 북에서 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내려왔다가 막내 여동생을 몰랐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5남 1녀 중에서 막내라고 해서 했는데, 이번 2차 상봉단의 특징은 북측 가족들이 남쪽에 있는 친인척들을 찾는 이런 형태이기 때문에 이렇게 상봉단에서 만나게 됐죠.
그리고 또 안타까웠던 것이 우리가 보도를 몇 차례 해 드렸습니다마는 98살 구상연 할아버지. 두고 온 딸들에게 꽃신을 주겠다고 꽃신을 준비해 갔는데 꽃신을 신어봤는지 안 신어봤는지 한편으로는 들려오는 이야기는 신어보지는 못했다, 이런 소식도 들려오고 있고요. 좀 안타까움이 있고.
그리고 또 하나 눈물겨웠던 것은 김월순 할머니가 북측에 72살 된 아들을 어제 오전에는 알아봤어요. 어제 오전에는 알아보다가 오후에는 누구시냐고 해서, 할머니가 연세가 있으시니까 치매가 좀 있으시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간헐적으로 이렇게 당신 누구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주변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기도 했고요.
지금 이석주 할아버지. 남측에서 최고령자 두 분이 올라왔는데 어제 건강이 나빠서 단체상봉에는 불참을 했었는데 오늘 못 보면 아주 못 본다. 그래서 의료진들이 괜찮겠느냐고 염려를 했다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만나겠다라고 해서 지금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이 나오죠.
이분이 정건목 씨입니다. 43년 만에, 오대양... 안경이 바뀐 게 확인이 되죠. 남측에서 간 누나가 안경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도수가 맞아서 다행이다라고 해서 얘기를 했죠. 일단 작별상봉이 25분 남았는데 이제 끝나면 개별 중식을 합니다. 그리고 짐을 꾸리고요. 그래서 남측으로 먼저 출발해서 돌아오고 이런 형태가 되겠습니다.
[앵커]
화면에도 보입니다마는 이번에 가족들의 고령화가 굉장히 심해서 걱정이 됐었는데 진행되는 동안 건강에서 큰 이상이 있는 분은 안 계셨죠?
[기자]
처음에 두 분이 건강상이 염려가 됐는데 업혀서라도 가겠다. 그래서 구급차를 타고 가신 분들도 있어요. 그래서 갔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고요. 어제 개별상봉이나 단체상봉을 했을 때 워낙 고령이시다 보니까 좀 과로를 하셨는지 자주 객실에 들어가서 누워서 피로를 푸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하고요.
지금 사실 이번에 북한이 역시 국군포로 특수 이산가족... 저분은 그나마 72년도 오대양호 어선으로 있다가 납북됐는데 1975년도 강원도 고성 동명호 납북사건 등 그쪽 분들은 우리 정부가 비공식으로 해서 이렇게 요청을 하는데 거기도 한 30여 명이 생존해 있는 걸로 전해지고 있는데요. 한 번도 북측이 그분에 대해서 가타부타 언급을 안 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지금 과거 국군포로 같은 경우에는 북에 생존해 계신 분이 추정컨대 한 700여 분 정도 살아 있는 것으로 이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앵커]
현장화면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1분 1초가 참 아쉬운 그런 현장입니다. 가족들이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21번 가족입니다. 김준겸 씨, 동생과 조카를 만났습니다. 전쟁 중에 잠깐 피난하려다가 가족과 영영 헤어졌다고 하는데요.
[기자]
지금 전쟁 중에 잠깐씩 헤어졌었던. 결과론적으로는 한국전쟁이 3년이 갔습니다마는 저때 개념으로는 이른바 어르신들 표현으로 하면 전쟁이라는 표현보다는 난리가 났다. 그래서 일주일, 3일, 이렇게만 갔다 오면 모든 게 해결되는 줄 알았던 분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갑자기 저런 일들이 벌어지니까 가족 중 몇 사람하고 헤어져서 그것이 이제 65년이라는 세월을 지속적으로 지내왔고요. 이런 부분이 굉장히 길었죠. 그러니까 사연들 중에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잠시 갔다 오겠다고 했던 이런 분들이 굉장히 많죠.
[앵커]
작별상봉 후에는 북한 가족이 남한 가족을 배웅을 하게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나와 계십니다. 지금 작별상봉이 계속 진행 중인데 이산가족 상봉 행사 이후에 후유증을 호소하는 분들이 조금 많다고 해요, 어떻습니까?
[인터뷰]
그렇죠. 사실은 이게 한 60여 년 정도 못 보다가 갑자기 이렇게 보게 되는데 보는 것만 해도 굉장히 감격적인 그런 것이고, 굉장히 놀랄 만한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한 12시간 정도 그렇게 잠깐 만나보고, 그 이후에 여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제는 앞으로 더 이상 못 볼 수도 있다는 희망이 사실 사라졌다는 그런 측면이 사실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분들은 안 본 것이 더 좋았지 않느냐, 그런 분들까지 있다는 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또 이런 분들 이외에도 이 짧은 만남 그 자체는 굉장히 충격적으로 와 닿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죠. 그렇다 보니까 그야말로 울화증이 생긴다든가 여기에 대해서 희망을 잃어버리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는 그런 측면도 사실 있고 하니까, 사실 이 문제가 심각하죠.
그래서 예를 들어서 북쪽 이산가족에 대한 확인한 상황이 아닙니까. 그러면 확인을 했으면 그 이후에는 연락이라도 서신이 됐든 화상상봉이 됐든 아니면 다른 형태로 됐든 연락이라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그 채널은 만들어줘야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러한 여러 가지 단절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조치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
대한적십자 통계를 봐도 지금 말씀하셨습니다마는 후유증이 너무 힘들다라는 게 기쁘다보다 사실 좀 많습니다. 정확한 퍼센트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마는 좀 많습니다. 지금 말씀하셨다시피 사실 실향민들 대부분이 고향에 가겠다라는 일념 하나, 가족들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해 가지고 북쪽이 고향인 분들은 남측에 사실은 오랫동안 살았습니다마는 객지였거든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살았는데 지금 모든 게 만나고 나면 이제 희망도 사라지고 무너져내리는 그런 심정으로 살기 때문에요.
그리고 제 주변에도 저렇게 해서 돌아가신 분들이 사실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고통을, 그 사무치는 그리움을 이겨내지 못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술을 많이 드시는 분들도 사실 있었어요. 그래서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도 많았고요.
다시 보입니다마는 72년도 오대양 선원, 아들, 정건목 씨가 벌써 60대 중반이 돼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피붙이와 헤어져야 되는 그런 순간인데요. 그러니까 한 20분 남았죠. 20분 후면 헤어져야 되는 그런 시간이 됩니다.
[앵커]
납북 당시 21살이었던 아들이 60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났는데 아들이 계속해서 어머니를 달래고 있습니다.
[기자]
지금 18번에 김인성 할머니가 58살, 아주 어렸던 아들과 조카 이렇게 상봉을 하는 만남이 되겠죠. 아들이 아니라 동생입니다. 이때 대동강을 건너려다 실패했다는 사연이 나오자 이제 대동강이건 한강이건 대동강 같은 경우에는 이제 폭격을 해가지고 우리가 그 유명한 사진이 있습니다. 퓰리처상까지 받은 겨울에 대동강 철교를 내달려서 내려온 그런 사진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그때 아마 대동강을 넘어서 황해도를 거쳐서 남쪽으로 피난왔던... 그래서 좀 특징이 있습니다.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그 특징이 뭐냐하면 함경도 또는 함경남도 원산, 청진이었던 분들은 과거 우리가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봤습니다마는 배를 타고 저 부산이나 거제도로 갔고요. 이쪽 내륙에 있던 분들은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내륙으로 피난하러 왔다가 잠시 일주일이면 이 전쟁이 끝날 줄 알고 원거리도 못 가고 있다가 다시 저렇게 오랫동안 작별을 해야 했던 사람들, 그런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조카며느리죠. 그리고 또 안타까웠던 사연은 남측에 이석주 할아버지죠. 아들을 위해서 양복을 맞췄었어요. 양복을 맞춰서 아들을 주겠다고 하셔서 만났는데 왜 이렇게 말랐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취재진들이 아들 치수를 아느냐 그러니까 내 아들인데 내가 왜 모르겠느냐고 해서 그 양복이 전달됐는지 그리고 남측에서 올라간 아버지가 사준 양복을 입은 아들이 그 양복을 입고 나왔는지 그건 아직 화면상으로 나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앵커]
지금 작별상봉, 이제 한 17분 정도 남겨두고 있습니다. 박사님, 앞서서 이산가족 상봉의 후유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러면서 정례화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는 계속해서 나왔는데요. 이번에 조금 의미 있는 부분이 북한 적십자중앙위원회 위원장이 조금 긍정적인 전망을 했어요.
[인터뷰]
항상 북측에서는 마칠 때쯤 되면 그런 데 대한 언지를 사실 하기는 합니다마는. 이번 경우는 좀 색다른 측면이 조금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이전에 8. 25 합의가 있거든요. 그 고위급회담의 합의의 중요한 사안으로써 그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한 항으로 넣어놨죠. 그것을 이제 1차적으로 이행한 게 이번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거기에 합의한 그 내용들은 1차 상봉에 목적을 둔 거라기보다는 앞으로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인도적 문제를 남북한이 서로 머리를 맞대서 해결을 한다 하는 그런 넓은 의미의 뜻을 나름대로 갖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이것에 이어서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보다 정례화하는 문제들, 이런 것들이 적극적으로 논의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볼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자기들이 여기에 대한 가능성을 어느 정도 비추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실질적인 의미가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기자]
그런데 사실 북측 리충복 위원장이 밝혔습니다. 서신교환 이 문제는 사실 처음이 아니고요. 과거 2000년 6. 15남북공동성명 이후에 했었어요. 한 차례 했고 2003년도에 남북관계가 핵문제라든가 악화되니까 북측이 일방적으로 끊었거든요.
이번에 결국 신뢰문제인데요. 서신 교환이라든가 이런 약속들을 또 이산가족 정례화라든가 특별상봉을 하자라든가 이런 부분은 과거 남과 북이 원칙적이나마 이렇게 합의를 한 적이 수차례 있었어요. 굉장히 많이 있었죠. 그랬는데 결국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먼저 신뢰를 깨고 약속을 안 지키는 북측이 그랬거든요.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 때문에요.
이 문제는 박사님께서 말씀하셨지만 탈정치 영역이고 인도주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거와 조금 분리해서 북측도 대응해 줬으면 하는... 저런 아픔이 없을 테고 그리고 남은 이산가족들이 한 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리라고 봅니다.
[인터뷰]
거기에 대해서 지금 이산가족 상봉행사 이 자체를 좀더 정례화하고 또 여러 가지 서신교환이라든가 이런 것을 더 확대해서 이런 아픔을 덜어준다고 하는 그런 본격적인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단 남북한의 관계개선이 돼야 됩니다.
그게 바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화도 이뤄지고 또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실상 지금 이산가족 상봉을 하기 위한 면회소 자체가 사실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강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산에 뒀다는 거는 여기에 정례적이고 상시적으로 뭔가 할 수 있도록 하는 의미를 담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앞으로 북한이 소위 금강산 관광사업을 재개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먼저 만들 필요가 있지 않느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박왕자 씨 사건이라든가 이런 것에 대한 어떤 사과를 한다든가 그리고 또 재발방지를 보다 더 공식적으로 한다든가, 이런 것을 기초로 해서 남북한이 최소한 금강산 관광사업만 또 재개된다고 한다면 사실은 그러면 1차적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면회소가 또 상시적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거든요.
그러면 거기에 또 기초를 해서 보다 더 상봉의 정례화라든가 이런 것들이 급물살을 탈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듭니다.
[앵커]
앞서서 이산가족 문제는 정치적인 논리와는 분리해서 다뤄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그런 같은 맥락에서 국제적으로 공론화해야 되는 건 아닌가요?
[기자]
전 단계로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볼 필요가 있는데요. 우리가 2009년도에 이산가족 관련 특별법을 제정해 놓은 게 있어요. 남북 이산가족 생사확인 및 교류 촉진에 관한 법률입니다. 그래서 이거에 대해서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고. 그리고 지금 국제적으로 공론화해야 된다는 의미는 지금 행사 주관은 적십자사가 하고 있거든요. 국제적십자사 산하 북한 적십자사 남한적십자사. 물론 정부 당국이 지원하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과거에 국제적십자사에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남과 북이 서로 협의, 합의하면 도와줄 용의가 있다.
1차적으로 서신교환이 되겠죠. 국제적십자사에 국제시민국이라는 기구가 있고, 다른 나라도 이산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이산이라는 것이 전쟁통에 헤어진 그런 분리된 가족이라는 개념 정리가 확고히 돼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UN이라든가 이런 데서 해야 된다. 왜냐하면 그 근거 중 하나는 북한도 제네바협정, 그러니까 세계인권선언, 이런 국제국 규약에 이미 가입이 되어 있기 때문에요.
그러면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북측으로서는 이른바 불량국가 이미지도 어느 정도 탈색할 수 있는 그런 부분도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필요하다라고 봅니다.
[앵커]
어쨌든 이산가족 상봉행사로 남북관계에 조금이나마 물꼬는 트인 것 같아요. 앞으로 남북관계가 충분히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보시나요?
[인터뷰]
지금 남은 건 남북한 개선관계밖에 없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북측의 김정은 체제 하에서도 여러 가지 자기들이 3차례에 걸친 핵실험도 했고 로켓 발사도 했고, 이번에 당 창건 70주년 기념일 이전에 로켓 발사를 할 것이다, 말 것이다 하는데 사실는 그걸 하지 않았거나 혹은 못했거나 일단 없는 사항이 됐죠.
어쨌든 김정은 체제에 들어와서 김정은 체제의 특성을 크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핵과 경제 병진노선을 제시했거든요. 그러면 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기들이 자신감을 만방에 표출했다. 이렇게 하면 여기에 근거를 해 가지고 그다음에 경제노선으로 가게 된다. 이 경제노선에 있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교류협력, 경제적인 교류협력, 혹은 남한으로부터 경제적 지원 이런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봤을 때는 북측에 있어서도 이제 남북한 관계 개선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이게 하나 있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가 하나 있는 게 김정은 체제가 사실은 갑작스럽게 들어온 거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까 체제의 정통성 문제가 많이 생기고 또 이 정통성에 대해서 각계 외부에서 사실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는 거죠, 북측에. 그렇다면 부정적인 평가는 김정은 체제를 훼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것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도 바깥으로부터의 어떤 김정은 체제의 부정적 평가, 이것을 또 완화해야 된다는 거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남북한의 관계개선에 의해서 그게 우호적 환경을 앞장서서 만들어야 된다. 이게 바로 첫 표출이 이산가족 상봉행사라고 볼 수 있고.
그다음에 앞으로 고위급 당국자 회담 이게 8. 25 합의에 들어가 있는 거니까 고위급 당국자회담을 한다든가, 이것을 기초로 해서 지금 개성공단을 보다 더 확장, 발전시킨다든가 그다음에 또 금강산 관광사업 이것을 재개를 하는 것, 그것을 한다든가. 여타 이외에 민간 차원의 교류라든가 이런 것들을 확대한다든가 이런 것으로 연결시켜나가고자 할 겁니다.
여기에는 우리 정부가 충분히... 사실은 원칙과 대화라고 하는 이런 투 트랙을 지속적으로 견지해 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어느 정도 여기에 균형을 맞출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그렇다고 하면 관계개선은 사실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앵커]
이제 작별상봉 10여 분 정도 남았습니다. 이게 마무리 되면 이번 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모두 마무리가 됩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잠시 뒤 12시부터 이어지는 뉴스특보에서 좀더 자세히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두 분의 말씀은 여기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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