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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YTN 이슈오늘 (08:00∼10:00)
■ 진행 : 정찬배 앵커
■ 추은호, YTN 해설위원 / 김미소, 탈북 방송인 /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앵커]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습니다. 이산가족상봉 첫날 어제. 65년 만에 재회한 가족들의 행사장은 그야말로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2박 3일의 일정, 오늘 이틀째인데요.
오늘 개별상봉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산가족 얘기 잠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분 모셨습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김미소 탈북방송인 그리고 추은호 YTN 해설위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고유환 교수님, 전문가 입장에서 어제 이산가족 상봉 어떻게 보셨습니까?
[인터뷰]
부모, 자식 간에 또는 형제, 자매 간에 생사를 이제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도주의를 넘어서 천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죠. 지구상 어디에서도 부모자식 간에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지역은 아마 한반도가 유일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정치권이 남북 간 대화를 통해서 이산가족상봉을 선물 주듯이 이벤트성으로 그렇게 가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하는 그런 전근대적 방식의 상봉사업을 이번 기회로 정례화하고 많은 이산가족들이 생사를 확인하고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빨리 마련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앵커]
가장 눈길을 끄는 가족들이 많이 있었죠. 어떻습니까?
[인터뷰]
그렇습니다. 65년 만에 신혼 때 6개월 정도 결혼 생활을 하고 헤어진.
[앵커]
남편이 인민군으로 끌려가고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아들의 경우는 유복자로 태어났다가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경우. 가슴 아픈 사연들이 너무 많아서 어느 하나 소개시켜드리기가 민망할 정도로 하나하나 사연들이 다들 기구하고 참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앵커]
특히 이번 상봉이 눈에 띄는 것은 80대 이상이 많다는 겁니다. 하마터면 그냥 가족들 얼굴도 못 보고 헤어질 뻔했어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이번 상봉을 보면 북한측에서는 90대 이상은 한 분도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80대 고령자들이 상당히 많은데 지금 남측에 살아 있는 이산가족 중에서 54%가 80대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3000여 명 정도 돌아가시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이러다 보면 10년도 안 돼서 상당히 많은 분들이 고령자들이 한 번도 가족들을 못보고 돌아가시는 게 아닌가, 이런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앵커]
지금 화면에 나왔습니다마는 부부 또는 부모를 만나는 경우가 다섯 가족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부모 중에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것이지요.
어제 사연 중에 한 가족을 저희들이 영상을 보고, 아까 추은호 해설위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신혼생활 7개월 만에 생이별한 부부가 65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65년 만에 신랑 얼굴을 다시 보고 65년 만에 색시 얼굴 다시 본 부부. 어떻게 얘기를 해야 될까요? 특히 부인께서는 아들을 낳고 한국에서 수절했다고 표현을 해야 되나요? 결혼을 할 생각을 안 했습니다. 부부가 만났을 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뭐라고 호칭을 할까. 누구 아빠라고 하기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색시한테 여보, 이것 쉽지 않았거든요. 보니까 호칭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이 괄호로 했는데 당신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얘기를 했습니다.
김미소 씨께 질문을 드리도록 할까요? 만약에 저분의 경우라면 어땠을 것 같아요? 65년 만에 부부를, 남편을 처음 만난다, 부를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세요?
[인터뷰]
상당히 입밖으로 나올 수 있는 그런 말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 65년이라는 긴 세월.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랬었고 아내 같은 경우도 그동안 자기 남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것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말 그리움과 그리움 속에서도 여보, 당신 그 말이 애틋한 정이 아니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앵커]
김미소 씨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는데 다른 탈북자 입장에서는 이게 남다를 것 같아요, 이산가족 상봉을 보는 게.
[인터뷰]
그렇죠. 남북이 통일이 되지 않는 한 저희 같은 경우는 고향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 진짜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가서 술 한 잔 부어드릴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저런 행사를 보고 할 때면 진짜 먼 훗날의 내 모습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상상도 해 보고 이런 남북 간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서 저분들이 살아생전에 얼굴이라도 볼 수 있다는 그런 저분들한테는 오늘 만나고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 그런.
[앵커]
죄송한데 가족 중에 북한에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인터뷰]
네, 저는 저 혼자 오다보니까 가족들이 다 그쪽에 계신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정말 저분들한테는 오늘 2박 3일이 정말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그 65년을 기다려왔고 65년을 그리웠던 그 아픔과 슬픔이 한번에 무너지고 서로의 사랑과 사랑을 더 존중해 주는 그런 시간이 되지 않을까.
[앵커]
아까도 잠깐 짚어봤습니다마는 아버지를 만나는 가족, 어머니를 만나는 가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는 지난번 상봉 때는 어머님이 못 알아봅니다, 아들을 아예. 이제 이런 게 비극 아니겠습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분단된 지 70년됐고 또 6.25 전쟁이 휴전된 지도 60여 년이 넘었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까 결국은 헤어진 이산가족들의 자연수명이 80대를 넘어갈 수밖에 없죠. 그런 상황에서 점차 고령화되고 또 일부 이산가족들은 자연수명을 다해가는 그런 상황이죠. 그러니까 지금 오랫동안 분단체제 하에서 60여년 이상 나뉘어살았기 때문에 이제 다시 재개라고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한으로 남아있는, 생사라도 확인하고 또 살아있는 가족들끼리라도 만나서 그동안의 정을 나누고 그런 한을 풀어주는 의미, 지금 그런 의미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시간이 경과가 됐죠. 그렇지만 늦었다하더라도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앵커]
그러면 본격적으로 그 얘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박 3일간의 상봉이 끝나면 또 이분들은 언제 볼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이산가족상봉 하신 분들이 다시 만나는 경우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역대 정부의 이산가족상봉 진행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이번을 포함해 모두 스물한 차례 이뤄졌습니다. 남북관계에 따라 역대 정부별로 상봉 횟수에 큰 차이를 보였는데요.
한국전쟁이 끝나고 50년대 이승만 정부부터 70년대 박정희 정부까지는 이산가족 상봉이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85년 전두환 정부 당시 딱 한 차례 상봉이 이뤄졌습니다. 한국전쟁 후 첫 상봉이었는데요, 서울과 평양을 서로 방문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이후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상봉이 재개돼 모두 6차례 성사됐고요. 가장 많은 상봉이 이뤄진 건 노무현 정부 때였습니다. 모두 10차례 남북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상봉 횟수가 크게 줄어 각각 2번에 그쳤습니다. 이처럼 역대 정부별로 이산가족 상봉 횟수에 큰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남북관계"에 있습니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냐에 따라 남북관계가 "화해" 분위기로 흘러갔거나, 반대로 "대결" 국면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의 도발이나 핵문제도 이산가족 상봉을 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전두환 정권 때 한 번 그리고 노무현 정권 때 가장 많았고요. 이명박 정권 때는 천안함, 연평도. 그리고 이번 정부 들어서도 북한의 핵실험, 이런 것들 때문에 못 만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보십니까?
[인터뷰]
그렇습니다. 어차피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그동안 남북 모두 다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이 상당히 많습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때 많았던 것은 남북 정상회담이 각각 열렸고 그 파급효과로 상당히 남북이 화해 분위기 때는 남북이산가족회담이 많이 진행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이후 이명박 정부 또 박근혜 정부 때는 두 차례밖에 진행이 되지 않는데 이산가족문제는 철저하게 인도주의적인 문제 또 천륜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남북 정치 상황에 따라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남북, 같은 민족끼리 만나게 해 줘야 된다라는 당위성들을 당국자들이 마음가짐을 새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13만 명의 이산가족이 등록이 됐습니다. 하지만 절반 가까이 세상을 떠나셨고요. 6만여 명만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 만난 분들은 극히 일부입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될까요.
이 케이스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 그때 올림픽 때문이었나요? 그때 한 번 있었던 이유는 뭡니까?
[인터뷰]
그때는 83년 아웅산 암살 폭파사건이 있었고요. 그래서 남북 관계가 매우 긴장했다가 후에 84년도에 남측에 큰 수해가 났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북한이 쌀, 옷감 등 일부 대남지원을 했어요. 그러면서 남북 사이에 제의대화라고 해서 각급 대화가 재개된 바가 있습니다.
보통 남북 사이에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질 때는 그런 대화할 때, 합의가 이뤄질 때 이벤트성으로 북측이 남측에 주는 선물처럼 상봉행사를 하나씩 집어넣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85년도에 서울과 평양 각각 교환 방문 형태로 이벤트성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한 차례 있었습니다.
그리고 쭉 없다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16차례 있었지만 그 기간에는 남북 화해협력이라는 흐름이 있었고 이산가족 상봉 문제는 인도적 사업으로 그당시 대북지원사업과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측에서 비료, 식량지원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그것과 연계해서 이산가족상봉이 16차례진행됐던 것이죠.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서는 현재까지 남북 관계가 전면적으로 복원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때도 남북 관계 복원을 위한 협의나 협상이 있을 때 한두 차례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됐던 것이죠.
[앵커]
안 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저는 이게 좀 궁금합니다. 저렇게 큰 행사로 하지 않더라도 지금 인터넷을 통해서 유튜브를 통해서 다 화상통화도 할 수 있는데 화상상봉도 하다 말다.
그리고 생사확인조차도 안 되고 그런 다른 대안들은 왜 안 되는 것이죠?
[인터뷰]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전면적인 생사확인이 필요하죠. 이번에도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지 여부도 확인이 안 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돼서 제사까지 지낸 분들이 많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우리는 이산가족들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사업이 끝나고 데이터베이스화돼 있어서 북의 경우는 이산가족 중의 상당수는 자기 신분에 불이익이 올 것을 우려해서 이산가족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쟁 중에 죽었다라든가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서 신분을 숨기거나 이산가족이라는 것을 숨기고 있는 분들이 많고. 또 체제와 관련되는 부분. 많은 이산가족이 만나게 되면 체제 불안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 남측의 여러 가지 사정들이 전달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고려됐다고 볼 수 있겠죠.
[앵커]
지금부터는 거시적인 얘기보다는 좀 미시적으로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가족들끼리 저렇게 만나잖아요. 그러면 선물을 준단 말이에요.
정해진 한도도 있겠습니다마는 우리는 점퍼, 초코파이, 라면. 그리고 제가 궁금한 게 옛날에는 금을 줬다고 하더라고요. 공공연한 사실입니다마는. 선물로는 어떤 게 주로 있다고 합니까?
[인터뷰]
이제 말씀하신 것처럼 의약품이나 의류, 금 같은 그런 희귀금속도 주기는 하지만 그게 한정이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거기서 주는 대로 다 받으면 받은 분들은 받을 때는 좋지만 나중에 사후처리 문제 때문에. 왜냐하면 주는 것을 주는 대로 받으면 북한측에서 봤을 때 왜 이렇게 많이 받았냐. 그런 것도 있고.
[앵커]
뺏깁니까, 혹시? 필요 이상으로 받으면?
[인터뷰]
네, 몰수당하는 것도 있고 시계라든가 금이라든지 이렇게 돈이 나가는 그런 물건 같은 경우는 본인이 알아서 다시 바치는 경우가 거의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지게 되면 그분한테는 나중에 자기 먹고사는 데에는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보다도 자기네를 이렇게 만날 수도 없었던 그런 가족을 만나게 해 주는 정부에 고마워서, 당국에 고마워서 그 선물이 돈값이 되는 것은 나라에 스스로 바쳐서 나라에 보탬이 되는 그런 것을 많이 하십니다.
[앵커]
상납을 하는군요, 공공연하게. 그러니까 내가 이산가족상봉 때 한국에서 좀 산다는 동생한테 달러를 좀 받았다. 그런데 이것을 위대하신 우리 지도자께 이것을 드리겠다?
[인터뷰]
네, 또 그렇게 한면 그분들 경우는 집에 돌아올 때는 별로 가지고 온 게 없지만 상장 같은 거라든지 이런 종이장으로 이 사람은 많은 것을 나라에 헌금을 했다, 이런 식으로 상장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계나 금붙이, 이런 것은 그분들한테는 그런 종이장 하나가 더. 김정일, 김정은의 상장을 받았다, 이게 더 큰 것이기 때문에 종이 하나와 바꾸는.
[앵커]
그리고 약 같은 건 어때요? 아무래도 우리가 의료쪽은 더 발전이 되어 있다 보니까 두통약, 그 밖의 약도 많이 줍니다. 써 있는 게 노인이다 보니까 두통약이라고 안 써 있고 머리 아플 때 드세요, 크게. 파스에는 일하다 다쳤을 때 붙이세요.
[인터뷰]
그게 왜냐하면 우리 북한이랑 남한의 언어적 차이입니다. 두통이라고 하게 되면 북한 사람들 잘 모릅니다. 머리 아플 때 드셔야 됩니다라고 하셔야 이게 두통 있을 때. 우리만 두통하게 되면 통하지만 북한분들은 그게 통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밝혀야 되고. 또 다 나이 드신 분들이기 때문에 일단 그런 큼직큼직하게 써야 되고 약품을 받아도 그것을 본인이 다 가져갈 수 없다는 게 그게 단점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일부를 다 회수를 합니다. 남한제품이기 때문에. 그리고 북한에서는 남한 것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자기 주머니에 넣지 못하는 게 북한이다보니까 딱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두통약 10개를 받았다고 하면 9개 같은 경우는 회수하고 1개나 본인이 챙겨가면 감사한 거고 그렇죠.
[앵커]
지금 금강산 쪽에서 관련 소식이 지금 막 들어옵니다. 잠시 뒤에, 오늘 이틀째인데요. 개별상봉을 합니다. 아침에 관련자들이 건강 문제를 체크를 했는데 전원 건강상태가 양호하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가족들을 만나다 보면 심장에 이상이 생기거나 그럴 수 있는데 다 건강하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들어왔죠. 그래서 현지에서 상봉행사가 차질 없이 진행이 된다는 얘기가 들어와 있습니다. 남북 가족들이 따로 아침식사를 하시고 잠시 뒤에 제 생각에는 한 10시쯤 시작될 것 같은데요.
개별상봉이 곧 비공개로. 이것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개별상봉도 카메라기자들이 가서 촬영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보면 이게 카메라가 들어와서 그런지 우리가 만나는 게 다 위대하신 지도자 덕분이야, 이게 사실일까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그것을 아예 배제를 시켰던 것 같아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가족끼리 만나는 것이 오히려 가족의 정을 나누는 데 바람직하다. 이렇게 판단한 것 같고요. 아까 선물 이야기를 하셨는데 제가 이번에 본 것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선물이 북한에 채훈식 할아버지라고 있습니다.
그분은 남측의 이옥연 할머니. 신혼 때 헤어진 분들인데 이분이 경북 문경에서 수절을 하면서 이사도 안 가고 혹시 남편이 돌아올까봐 쭉 계신 분인데 이분이 남편에게 선물한 것이 고향에서 지은 햅쌀입니다.
햅쌀을 선물하면서 고향에 못가시니까 고향에서 지은 햅쌀이라도 드셔보시라, 이런 선물을 했다고 합니다.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닐 수가 없죠.
[앵커]
어렸을 때 먹던, 엄마가 지어준 밥 그 밥맛을 느껴보라고 햅쌀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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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정찬배 앵커
■ 추은호, YTN 해설위원 / 김미소, 탈북 방송인 /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앵커]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습니다. 이산가족상봉 첫날 어제. 65년 만에 재회한 가족들의 행사장은 그야말로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2박 3일의 일정, 오늘 이틀째인데요.
오늘 개별상봉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산가족 얘기 잠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분 모셨습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김미소 탈북방송인 그리고 추은호 YTN 해설위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고유환 교수님, 전문가 입장에서 어제 이산가족 상봉 어떻게 보셨습니까?
[인터뷰]
부모, 자식 간에 또는 형제, 자매 간에 생사를 이제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도주의를 넘어서 천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죠. 지구상 어디에서도 부모자식 간에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지역은 아마 한반도가 유일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정치권이 남북 간 대화를 통해서 이산가족상봉을 선물 주듯이 이벤트성으로 그렇게 가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하는 그런 전근대적 방식의 상봉사업을 이번 기회로 정례화하고 많은 이산가족들이 생사를 확인하고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빨리 마련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앵커]
가장 눈길을 끄는 가족들이 많이 있었죠. 어떻습니까?
[인터뷰]
그렇습니다. 65년 만에 신혼 때 6개월 정도 결혼 생활을 하고 헤어진.
[앵커]
남편이 인민군으로 끌려가고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아들의 경우는 유복자로 태어났다가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경우. 가슴 아픈 사연들이 너무 많아서 어느 하나 소개시켜드리기가 민망할 정도로 하나하나 사연들이 다들 기구하고 참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앵커]
특히 이번 상봉이 눈에 띄는 것은 80대 이상이 많다는 겁니다. 하마터면 그냥 가족들 얼굴도 못 보고 헤어질 뻔했어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이번 상봉을 보면 북한측에서는 90대 이상은 한 분도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80대 고령자들이 상당히 많은데 지금 남측에 살아 있는 이산가족 중에서 54%가 80대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3000여 명 정도 돌아가시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이러다 보면 10년도 안 돼서 상당히 많은 분들이 고령자들이 한 번도 가족들을 못보고 돌아가시는 게 아닌가, 이런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앵커]
지금 화면에 나왔습니다마는 부부 또는 부모를 만나는 경우가 다섯 가족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부모 중에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것이지요.
어제 사연 중에 한 가족을 저희들이 영상을 보고, 아까 추은호 해설위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신혼생활 7개월 만에 생이별한 부부가 65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65년 만에 신랑 얼굴을 다시 보고 65년 만에 색시 얼굴 다시 본 부부. 어떻게 얘기를 해야 될까요? 특히 부인께서는 아들을 낳고 한국에서 수절했다고 표현을 해야 되나요? 결혼을 할 생각을 안 했습니다. 부부가 만났을 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뭐라고 호칭을 할까. 누구 아빠라고 하기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색시한테 여보, 이것 쉽지 않았거든요. 보니까 호칭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이 괄호로 했는데 당신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얘기를 했습니다.
김미소 씨께 질문을 드리도록 할까요? 만약에 저분의 경우라면 어땠을 것 같아요? 65년 만에 부부를, 남편을 처음 만난다, 부를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세요?
[인터뷰]
상당히 입밖으로 나올 수 있는 그런 말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 65년이라는 긴 세월.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랬었고 아내 같은 경우도 그동안 자기 남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것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말 그리움과 그리움 속에서도 여보, 당신 그 말이 애틋한 정이 아니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앵커]
김미소 씨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는데 다른 탈북자 입장에서는 이게 남다를 것 같아요, 이산가족 상봉을 보는 게.
[인터뷰]
그렇죠. 남북이 통일이 되지 않는 한 저희 같은 경우는 고향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 진짜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가서 술 한 잔 부어드릴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저런 행사를 보고 할 때면 진짜 먼 훗날의 내 모습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상상도 해 보고 이런 남북 간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서 저분들이 살아생전에 얼굴이라도 볼 수 있다는 그런 저분들한테는 오늘 만나고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 그런.
[앵커]
죄송한데 가족 중에 북한에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인터뷰]
네, 저는 저 혼자 오다보니까 가족들이 다 그쪽에 계신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정말 저분들한테는 오늘 2박 3일이 정말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그 65년을 기다려왔고 65년을 그리웠던 그 아픔과 슬픔이 한번에 무너지고 서로의 사랑과 사랑을 더 존중해 주는 그런 시간이 되지 않을까.
[앵커]
아까도 잠깐 짚어봤습니다마는 아버지를 만나는 가족, 어머니를 만나는 가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는 지난번 상봉 때는 어머님이 못 알아봅니다, 아들을 아예. 이제 이런 게 비극 아니겠습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분단된 지 70년됐고 또 6.25 전쟁이 휴전된 지도 60여 년이 넘었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까 결국은 헤어진 이산가족들의 자연수명이 80대를 넘어갈 수밖에 없죠. 그런 상황에서 점차 고령화되고 또 일부 이산가족들은 자연수명을 다해가는 그런 상황이죠. 그러니까 지금 오랫동안 분단체제 하에서 60여년 이상 나뉘어살았기 때문에 이제 다시 재개라고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한으로 남아있는, 생사라도 확인하고 또 살아있는 가족들끼리라도 만나서 그동안의 정을 나누고 그런 한을 풀어주는 의미, 지금 그런 의미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시간이 경과가 됐죠. 그렇지만 늦었다하더라도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앵커]
그러면 본격적으로 그 얘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박 3일간의 상봉이 끝나면 또 이분들은 언제 볼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이산가족상봉 하신 분들이 다시 만나는 경우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역대 정부의 이산가족상봉 진행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이번을 포함해 모두 스물한 차례 이뤄졌습니다. 남북관계에 따라 역대 정부별로 상봉 횟수에 큰 차이를 보였는데요.
한국전쟁이 끝나고 50년대 이승만 정부부터 70년대 박정희 정부까지는 이산가족 상봉이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85년 전두환 정부 당시 딱 한 차례 상봉이 이뤄졌습니다. 한국전쟁 후 첫 상봉이었는데요, 서울과 평양을 서로 방문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이후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상봉이 재개돼 모두 6차례 성사됐고요. 가장 많은 상봉이 이뤄진 건 노무현 정부 때였습니다. 모두 10차례 남북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상봉 횟수가 크게 줄어 각각 2번에 그쳤습니다. 이처럼 역대 정부별로 이산가족 상봉 횟수에 큰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남북관계"에 있습니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냐에 따라 남북관계가 "화해" 분위기로 흘러갔거나, 반대로 "대결" 국면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의 도발이나 핵문제도 이산가족 상봉을 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전두환 정권 때 한 번 그리고 노무현 정권 때 가장 많았고요. 이명박 정권 때는 천안함, 연평도. 그리고 이번 정부 들어서도 북한의 핵실험, 이런 것들 때문에 못 만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보십니까?
[인터뷰]
그렇습니다. 어차피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그동안 남북 모두 다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이 상당히 많습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때 많았던 것은 남북 정상회담이 각각 열렸고 그 파급효과로 상당히 남북이 화해 분위기 때는 남북이산가족회담이 많이 진행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이후 이명박 정부 또 박근혜 정부 때는 두 차례밖에 진행이 되지 않는데 이산가족문제는 철저하게 인도주의적인 문제 또 천륜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남북 정치 상황에 따라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남북, 같은 민족끼리 만나게 해 줘야 된다라는 당위성들을 당국자들이 마음가짐을 새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13만 명의 이산가족이 등록이 됐습니다. 하지만 절반 가까이 세상을 떠나셨고요. 6만여 명만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 만난 분들은 극히 일부입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될까요.
이 케이스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 그때 올림픽 때문이었나요? 그때 한 번 있었던 이유는 뭡니까?
[인터뷰]
그때는 83년 아웅산 암살 폭파사건이 있었고요. 그래서 남북 관계가 매우 긴장했다가 후에 84년도에 남측에 큰 수해가 났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북한이 쌀, 옷감 등 일부 대남지원을 했어요. 그러면서 남북 사이에 제의대화라고 해서 각급 대화가 재개된 바가 있습니다.
보통 남북 사이에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질 때는 그런 대화할 때, 합의가 이뤄질 때 이벤트성으로 북측이 남측에 주는 선물처럼 상봉행사를 하나씩 집어넣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85년도에 서울과 평양 각각 교환 방문 형태로 이벤트성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한 차례 있었습니다.
그리고 쭉 없다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16차례 있었지만 그 기간에는 남북 화해협력이라는 흐름이 있었고 이산가족 상봉 문제는 인도적 사업으로 그당시 대북지원사업과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측에서 비료, 식량지원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그것과 연계해서 이산가족상봉이 16차례진행됐던 것이죠.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서는 현재까지 남북 관계가 전면적으로 복원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때도 남북 관계 복원을 위한 협의나 협상이 있을 때 한두 차례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됐던 것이죠.
[앵커]
안 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저는 이게 좀 궁금합니다. 저렇게 큰 행사로 하지 않더라도 지금 인터넷을 통해서 유튜브를 통해서 다 화상통화도 할 수 있는데 화상상봉도 하다 말다.
그리고 생사확인조차도 안 되고 그런 다른 대안들은 왜 안 되는 것이죠?
[인터뷰]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전면적인 생사확인이 필요하죠. 이번에도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지 여부도 확인이 안 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돼서 제사까지 지낸 분들이 많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우리는 이산가족들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사업이 끝나고 데이터베이스화돼 있어서 북의 경우는 이산가족 중의 상당수는 자기 신분에 불이익이 올 것을 우려해서 이산가족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쟁 중에 죽었다라든가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서 신분을 숨기거나 이산가족이라는 것을 숨기고 있는 분들이 많고. 또 체제와 관련되는 부분. 많은 이산가족이 만나게 되면 체제 불안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 남측의 여러 가지 사정들이 전달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고려됐다고 볼 수 있겠죠.
[앵커]
지금부터는 거시적인 얘기보다는 좀 미시적으로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가족들끼리 저렇게 만나잖아요. 그러면 선물을 준단 말이에요.
정해진 한도도 있겠습니다마는 우리는 점퍼, 초코파이, 라면. 그리고 제가 궁금한 게 옛날에는 금을 줬다고 하더라고요. 공공연한 사실입니다마는. 선물로는 어떤 게 주로 있다고 합니까?
[인터뷰]
이제 말씀하신 것처럼 의약품이나 의류, 금 같은 그런 희귀금속도 주기는 하지만 그게 한정이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거기서 주는 대로 다 받으면 받은 분들은 받을 때는 좋지만 나중에 사후처리 문제 때문에. 왜냐하면 주는 것을 주는 대로 받으면 북한측에서 봤을 때 왜 이렇게 많이 받았냐. 그런 것도 있고.
[앵커]
뺏깁니까, 혹시? 필요 이상으로 받으면?
[인터뷰]
네, 몰수당하는 것도 있고 시계라든가 금이라든지 이렇게 돈이 나가는 그런 물건 같은 경우는 본인이 알아서 다시 바치는 경우가 거의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지게 되면 그분한테는 나중에 자기 먹고사는 데에는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보다도 자기네를 이렇게 만날 수도 없었던 그런 가족을 만나게 해 주는 정부에 고마워서, 당국에 고마워서 그 선물이 돈값이 되는 것은 나라에 스스로 바쳐서 나라에 보탬이 되는 그런 것을 많이 하십니다.
[앵커]
상납을 하는군요, 공공연하게. 그러니까 내가 이산가족상봉 때 한국에서 좀 산다는 동생한테 달러를 좀 받았다. 그런데 이것을 위대하신 우리 지도자께 이것을 드리겠다?
[인터뷰]
네, 또 그렇게 한면 그분들 경우는 집에 돌아올 때는 별로 가지고 온 게 없지만 상장 같은 거라든지 이런 종이장으로 이 사람은 많은 것을 나라에 헌금을 했다, 이런 식으로 상장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계나 금붙이, 이런 것은 그분들한테는 그런 종이장 하나가 더. 김정일, 김정은의 상장을 받았다, 이게 더 큰 것이기 때문에 종이 하나와 바꾸는.
[앵커]
그리고 약 같은 건 어때요? 아무래도 우리가 의료쪽은 더 발전이 되어 있다 보니까 두통약, 그 밖의 약도 많이 줍니다. 써 있는 게 노인이다 보니까 두통약이라고 안 써 있고 머리 아플 때 드세요, 크게. 파스에는 일하다 다쳤을 때 붙이세요.
[인터뷰]
그게 왜냐하면 우리 북한이랑 남한의 언어적 차이입니다. 두통이라고 하게 되면 북한 사람들 잘 모릅니다. 머리 아플 때 드셔야 됩니다라고 하셔야 이게 두통 있을 때. 우리만 두통하게 되면 통하지만 북한분들은 그게 통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밝혀야 되고. 또 다 나이 드신 분들이기 때문에 일단 그런 큼직큼직하게 써야 되고 약품을 받아도 그것을 본인이 다 가져갈 수 없다는 게 그게 단점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일부를 다 회수를 합니다. 남한제품이기 때문에. 그리고 북한에서는 남한 것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자기 주머니에 넣지 못하는 게 북한이다보니까 딱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두통약 10개를 받았다고 하면 9개 같은 경우는 회수하고 1개나 본인이 챙겨가면 감사한 거고 그렇죠.
[앵커]
지금 금강산 쪽에서 관련 소식이 지금 막 들어옵니다. 잠시 뒤에, 오늘 이틀째인데요. 개별상봉을 합니다. 아침에 관련자들이 건강 문제를 체크를 했는데 전원 건강상태가 양호하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가족들을 만나다 보면 심장에 이상이 생기거나 그럴 수 있는데 다 건강하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들어왔죠. 그래서 현지에서 상봉행사가 차질 없이 진행이 된다는 얘기가 들어와 있습니다. 남북 가족들이 따로 아침식사를 하시고 잠시 뒤에 제 생각에는 한 10시쯤 시작될 것 같은데요.
개별상봉이 곧 비공개로. 이것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개별상봉도 카메라기자들이 가서 촬영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보면 이게 카메라가 들어와서 그런지 우리가 만나는 게 다 위대하신 지도자 덕분이야, 이게 사실일까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그것을 아예 배제를 시켰던 것 같아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가족끼리 만나는 것이 오히려 가족의 정을 나누는 데 바람직하다. 이렇게 판단한 것 같고요. 아까 선물 이야기를 하셨는데 제가 이번에 본 것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선물이 북한에 채훈식 할아버지라고 있습니다.
그분은 남측의 이옥연 할머니. 신혼 때 헤어진 분들인데 이분이 경북 문경에서 수절을 하면서 이사도 안 가고 혹시 남편이 돌아올까봐 쭉 계신 분인데 이분이 남편에게 선물한 것이 고향에서 지은 햅쌀입니다.
햅쌀을 선물하면서 고향에 못가시니까 고향에서 지은 햅쌀이라도 드셔보시라, 이런 선물을 했다고 합니다.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닐 수가 없죠.
[앵커]
어렸을 때 먹던, 엄마가 지어준 밥 그 밥맛을 느껴보라고 햅쌀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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